Empty note - Ghostly Kisses
집에 디지털카메라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상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케이크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고, 할머니는 촛불을 불려고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 이모, 사촌들 목소리가 점심시간을 지나 서늘한 공기의 시골 식당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병상에서 폐렴으로 호흡기내과에 다섯 달째 입원 중인 할아버지, 혼자 시골집을 지키고 있는 치매 초기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영상을 본다. 슬픔이 과할 땐 과거의 그날이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당연함이 슬펐다. 변화는 늘 있는 일이고 살다 보면 사람들 다 겪는 일이라지만 나의 적응은 계절의 변화보다 느린 것 같다. 겨울이 다 갔는데 아직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찍은 2분짜리 영상을 카카오톡으로 엄마한테 보냈다.
할아버지가 건강하실 땐 그렇게 자주 할아버지 사진을 볼 일이 없었는데, 할아버지가 입원하시고 나니 오히려 자주 카톡으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기도 삽관을 한 채 바셀린이 잔뜩 발려진, 얇은 가죽이 덮인 얼굴. 눈을 뜨고 계신 사진도 있고, 감고 있는 사진도 있다. 뭔가 지쳐 보였다.
엄마는 할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아이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 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
오래간만에 일 년 전, 건강했던 할아버지 영상을 엄마에게 보내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그 영상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안면 근육도 마비되고, 목소리도 희미해진 할아버지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 치는 할아버지의 과거 영상이 엄마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는 모른다.
영상을 보고 엄마가 더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울 때 추억할 수 있는 건강한 할아버지 모습이 담긴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적응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세상이 다 바뀌어도 오래된 친구 하나 있으면 나를 기억하기 쉬운 것처럼, 변화를 받아들일 때까지 쥐고 있을 애착인형 하나 있는 건 참 감사한 것 같다.
관측, 거기 있는 사물을 관측한다는 건 그 사물에 빛이 닿았고, 반사되어 내 눈까지 도달해서 뇌에 정보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작고 가벼운, 정말 가벼운 건 빛이 닿으면 날아가버린다. 나는 그게 거기 있다고 관측했지만, 지금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경우는 아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측하곤 한다.
그땐 여기서 관측되었고, 그전엔 저기서 관측되었고… 그러니까 지금은 여기쯤에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찍어둔 엄마 아빠의 사진도 새로웠다.
가까운 관찰자 입장으로서 그들의 변화는 별 다를 거 없이 소소함에 그쳤지만 점점 미래로 갈수록 그 사진은 더 새로워질 것이다.
과거에는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과거를 붙잡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적이지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미는 미래에서 획득되는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을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다시 쓸데없는 사진들이나 찍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