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asis - Don’t look back in anger
말실수를 할 때가 있다. 물을 흘리면 아차, 하듯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이 행동으로 튀어나와서 스스로조차 당혹스러운 순간이다.
나는 손톱깎이로 언니를 울렸다.
오래간만에 집으로 온 언니는 나에게 손톱깎이를 빌려달라고 했고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언니에게 손톱깎이를 건네면서 ’ 언니 집 가서 깎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는 그 말 때문에 혼자 방에 들어가서 울었다.
‘지금은 빌려주기 어려우니까 나중에 빌려줄게.’ 라던지, 좀 더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 텐데 퉁명스러운 말이 불쑥 튀어나온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상대방의 상처 입은 표정을 보면 너무 미안해져서 당장이라도 미안하다고, 말실수라고 덮어버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사과하기가 어려웠다.
사과하기 어려운 이유는 참 많다. 상대방도 나에게 불친절로 나를 기분 나쁘게 할 때가 있었고 그에 대해서 나에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대충 미안한 표정? 정도.
하지만 언니는 꼭 나에게 사과를 받아내곤 했다. 너는 날 이런 식으로 상처를 줬기 때문에 앞으로는 다른 대안으로 행동해 주길 바라. 그렇게 약속할래?
요구였다. 이런 요구는 참… 숨 막힌다.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너, 앞으로 나한테 그러지 마..라는 표정.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언니는 또 말한다.
대답 좀 해줄래?
철저히 자기 자신만이 이 사건의 피해자임이 명백하며 너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언니 집 가서 깎지.’
‘그거 말 참 퉁명스럽게 하네. 주기 싫음 주지 마라.’
라고 언니가 받아쳤더라면?
내 의도가 어쨌든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상대방이 너무나도 상처를 잘 입는 유리멘털 인간이라면? 차라리 가까이하고 싶지가 않다.
상대방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자꾸만 내가 품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자꾸 사과를 요구하는 상대에게 정들지 못하겠다. 단순히 코드가 안 맞음, 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언니는 나보다 섬세하고, 한편으로는 유치했다.
*
할머니 앞에서 언니는 울었다. 할머니도 찔끔 훌쩍이셨다.
할머니는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서 형제와도, 동네 사람들하고도 싸워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가 조금의 부정적인 소란에도 눈물이 나시나 보다.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과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할 말이 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
그녀는 타인의 실수에 눈 감지 않는다. 그 실수가 작던, 크던간에 질책했다. 마치 그녀 자신이 법관인 것처럼.
그런 면이 가장 지겨운 점이었다. 가장 좋은 면이기도 하지만.
작게 그녀의 자존심에 흠을 내더라도 꼭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다시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그녀는 한껏 후련해진 표정과 함께 황당하여있는 상대를 지나쳐갔다. 정말 그녀는 그렇게 하면 후련해지는 걸까 궁금하다.
*
할머니한테서 중요한 걸 배운다. 할머니의 움푹 파인 눈과 검게 그을린 피부, 고목 같은 주름… 가끔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으면 거북이 같기도 하고, 아이같기도 하다. 할머니 웃음은 아이같이 순박하다.
-할머니, 사과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돼?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상대방이 상처받았어.
- 사과하는데 돈 안 든다.
- 뭐라고?
- 사과하는데 돈 안 든다고.
하고 씩 웃으셨다.
- 언니가 먼저 태어났다고 언니노릇하고 싶다는데 동생이니까 동생 해야지.
- 언니는 꼭 사과를 받으려고 하는데 그게 얄미워서 사과하기 싫어.
- 그거 사과받아서 쓸데도 없다. 돈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할머니는 1942년 출생했다.) 형제간에 싸울 수 있어. 그래도 우애하고 지내라. 그거 이기고 지는 거 안 중요하다.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면 안 싸울 수 있다.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건 순서 없다.
그래서 할머니 말을 듣고 나도 기분이 풀렸다. 그렇지. 동생인데 언니한테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점은 그런 면이었다.
희한하게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더 꼬여서 들리는데 할머니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시면 나는 그냥 곧이곧대로 듣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할머니와 지내던 어릴 적에 그 작은 아이가 돼서 좋은 사람으로 자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할머니가 나를 순하고 착한, 그런 사람으로 보니까 그렇게 된다.
*
상대에게 먼저 웃어 보이면 나도 상대의 웃음을 볼 수 있다.
며칠 전에 유퀴즈 온 더 블록에서 나태주 시인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맥락은 이러했다.
예쁜 아이가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길래 어, 예쁜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니 웃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보고 웃으니 아이도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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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건 아니지만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겠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그렇게 살라고 하고 나는 기분 좋게 살아야겠다. 후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