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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3시간전

난 좋은 사람이야. i am a good person.

fourth of july - sufjan stevens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살아왔다.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을 보고 엘리베이터 열림버튼을 누를 때, 부모님 어깨를 주물러드릴 때, 가지고 있는 책을 친구에게 선뜻 빌려줄 때 ‘착한 일’을 한 ‘좋은 사람’이라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고 그런 기억 속에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


부모님은 인쇄업을 하신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디자인을 하는 건 어머니, 종이 종류에 따른 견적을 내고 배송서비스 및 기타 등등의 일을 하는 건 아버지.


어머니는 주로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션, 쿽을 이용해서 슥슥 명함, 전단지, 명세표, 주문서 등을 그려낸다. 픽셀로 이뤄진 화면에 텍스트를 정렬하고, 화면과 달리 인쇄에서 보일 글자를 고려해 자간과 행간에 공간을 띄운다. 도형을 그려서 회사나 가게 로고를 그리기도 하고 책자를 디자인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부모님 사무실로 하교를 하면 엄마가 앉은 의자 등받이와 엄마의 등짝 사이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매달려서 어깨너머로 엄마가 하는 일을 쳐다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여러 업체의 단가를 비교하고 고객의 니즈에 맞춰 작업이 가능한 업체를 선정하신다. 작업한 파일을 전송하고 실물로 나온 전단지, 명함 등 종이 뭉치들을 트렁크에 싣고 동네를 돌면서 고객들에게 배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금박이 들어가는 명함, 흑백, 컬러, 레이저프린트인지 잉크인지, 반짝이는 매끈한 종이인지 아니면 무겁고 무광의 종이인지에 따라 모든 단가는 달라진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도 많지만 가게를 시작한 20년 전만 해도 그런 정보들은 각 인쇄업 회사에서 나온 카탈로그에서 알 수 있었다.



한 때는 일주일 내내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일이 많았었고, 최근에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할 일 없이 사무실에 앉아있는 게 일이 많아서 잠을 못 자는 것보다 괴롭다고 한다.


최근에 부모님 사무실로 작업물 의뢰가 들어왔다.

pdf파일을 편집기를 활용해서 꼬리말을 지우고 추가하는 페이지를 옳은 위치에 두고 페이지번호를 다시 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자인지라 그 모든 페이지를 어머니가 작업하고 있을 수 없어서 아버지가 작업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전화로 물어보셨다. ”혹시 사무실로 올 수 있니? “


버스를 타고 사무실에 갔더니 아버지는 톡, 톡, 키보드 delete키를 손수 누르고 있었다. 화면에 표시된 쪽 번호를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고 113번째 페이지를 지우는 중이었다.


“혹시 이거 한꺼번에 지우는 방법 아니?”


안타깝게도 나는 (아버지가 현재 쓰고 계신) pdf편집기를 쓰지 않았고 그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했다. ”알 pdf 똑같은 위치에 있는 각 페이지 번호 지우기“


안타깝게도 페이지번호라는 값을 가지고 만들어진 텍스트가 아니라서 일일이 지울 수밖에 없어 보였다. 다행히 250쪽 언저리였고, 쪽번호와 그 옆에 디자인된 꼬리말, 동그라미 도형을 지우고 스크롤하는 일을 140번가량 반복하면 됐다. 아버지가 하게 두려고 했지만 굉장히 신중한 마우스포인트 이동에 감명받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금 과장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지는 1시간 동안 대략 420번의 클릭을 하고 있을 터였다. 뒤에 배경으로 잡히는 것을 지울지 말지 고민하는 그런 순간 하나하나 모인다면 정말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뜨끈한 의자에 앉아서 나는 광클했다.


틱, 틱, 딸깍, 틱, 도로록.

틱, 틱, 틱, 도로록.

….

틱, 틱, 틱, 드르륵…


자리에 앉은 지 10분 만에 없어져야 할 텍스트이미지를 삭제했다. 아버지는 이런 나의 재롱에 만족스러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믿고 있었다. 과거에도 아버지는 집으로 일감을 가지고 와서 종종 나에게 방법을 물어보셨고, 나는 검색을 해서 알려드렸다. 아니, 내가 해결해 드렸다. 당시의 질문을 떠올려보면 한글에서 pdf로 변환하는 법, pdf를 파워포인트로 가져왔을 때 편집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다시 pdf로 변환하는 방법,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친절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고, 나는 아는 것에 대해서 자랑하길 좋아하니까 시혜적으로 굴 수 있었다.


*



목차를 조정, 페이지를 추가, 삭제한 후 아버지는 쪽번호 매기기에 대해 물어보셨다. 나는 검색해서 알려드렸다.

사실 좀 귀찮아졌다. 검색을 하면 똑같은 정보를 똑같이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그 과정을 대신하는 것에 대해 지루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태어난 어린 딸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준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고 보니 죄책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물어볼 것이 많아진 아버지의 세월을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니, 아빠. 네모칸 위에 있는, 저거, 여백.

화살표 눌러봐요. 아니, 그거 말고 더 옆에 있는 거요.

….

나 집에 가고 싶어. 언제 집에 가?(밤 11시.)


*



나는 내가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기다릴 줄 모르는 귀차니스트의 면을 봤다.


어머니는 제삼자로써, 아버지가 모르는 걸 나에게 물어보면 잘 대답해 주라고 조언하고 저 멀리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머니는 뭔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모르는 게 있는 사람이 질문을 하면 친절하게 참을성을 가지고 알려주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평소에 내게 그런 말을 잘 안 하시는데 내가 오늘 유난하게 굴긴 했다는 걸 깨달았다.


*


아버지는 마침내, 징징대며 알려주는 나에게 한마디 하셨다.


“너, 이럴 거면 먼저 버스 타고 집에 가.”


굉장히 젠틀한 말이었다. 알려주면서 굉장히 피곤하다고 징징거렸기 때문에, 얼마나 사려 깊은 말이었는지. 나도 더 이상 아버지 옆에서 철없이 굴지 말고 차라리 조용히 구석에 가서 기다려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약간은 불퉁한 어조로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표지 작업한 파일, 그거 꺼내려면 당신 컴퓨터가 켜져있어야 하는데.”


“네, 그럼 켜면 되는 거죠? “


*


“이제 됐어요. 꺼도 돼요.”


“네., 껐어요~“…


“아니, 당신 혹시 컴퓨터 껐어요? “


“네, 껐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당신 컴퓨터 파일까지 받아둬야 내일 출근해서 바로 쓰는데.”


“네, 그럼 켤게요~”



나는 이 대화를 듣고 고의는 아니지만 반복되는 아버지의 변죽에 대처하는 어머니의 친절함에 새삼스럽게 놀랐고, 그리고 그에 비해 여유 없던 나의 인성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과연, 어머니가 과하게 인내심이 깊고 친절한 것일까 아니면….


그게 뭐가 됐든 사람을 대하는 데에 내가 상당히 미숙하다고 느끼게 된 날이었다. 아버지가 마우스 클릭도 느리고 디자인 세부사항을 조절하는데 깨작거리는 걸 뒤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함을 느끼고 이것저것 말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 무엇보다 나도 내일 일어나서 할 일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부탁으로 내 시간을 침해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사실상 부모님의 일로 내가 일을 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일에 대해서도 내가 우호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가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대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헤매며 독학하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 빠릿빠릿하게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도 굉장히 재촉을 하고 혼자 버거워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부모님께 배울 점은 많을 것 같다.

집에 나란히 들어와서 아버지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드렸다. 내가 덜 징징거리고 친절하게 알려드려야 했는데 재촉해서 미안하다고… 아버지는 내게 늦게까지 남아있게 해서 미안했다고 하셨다.


나는 심히 내 인성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데 친절하려는 노력을 많이 배워둬야겠다. 앞으로 아버지에게 다시 또 계속 내게 물어보라고 당부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친절해져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친근하고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의 단편적인 기억과 제삼자가 보는 성격적 특성은 전혀 연관이 없다. 라쇼몽이라는 소설에서도 그렇듯이, 괴물이라는 영화에서 그렇듯이 각자 보는 시선마다 다른 이야기와 다른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



fourth of july 저녁에 쓰기 시작해서 fifth of july 새벽이 되었다. 7월 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7월 4일은 내 친구의 생일이다. 그리고 4월 7일은 내 생일이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똑똑한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다. 그래서 친절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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