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빠, 다녀올게."
세화는 양손으로 가방 끈을 꽉 쥔 채, 신발장 위를 응시하며 속삭였다. 시선 끝에는 얇고 투명한 봉투에 담긴 증명사진 몇 장이 있었다.
사진 속 상근의 표정은 모호했다. 얼핏 보면 웃는 듯했고, 다시 보면 찡그린 듯했다. 기묘한 부조화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동네 사진관에서 대충 찍었다더니, 주인장 포토샵 실력이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용도는 운전면허 갱신이라고 했었다. 몇 달 전 출근길에 챙겨갈 요량으로 무심코 던져두더니,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화는 증명사진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눈알을 위로 굴리더니, 이내 짧게 심호흡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세화는 또다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누군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잡이를 돌렸다. 끼이이이. 낡은 경첩이 뻑뻑하게 움직였다. 다행히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내 쾅 하는 소음이 복도에 울렸다.
세화는 하얀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 내벽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한때는 지역 신문에 ‘1호 아파트’라 대서특필되었다던 6층짜리 건물. 하지만 그 위상은 너덜거리는 외벽과 함께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502호. 그곳이 세화의 집이었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세화는 교복 치마 아래 종아리를 살폈다. TV 속 아이돌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꿈꾸는 중학생에게,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고역이었다. 한 계단을 디딜 때마다 발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은 괜찮아.’
가녀린 다리를 주무르며 안도했다. 6층이 아닌 게 어딘가. 세화는 6층 아주머니의 무우 같은 다리를 떠올려보려다 이내 관뒀다.
대신, 세화는 주머니에서 남은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 최신형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잠금을 해제하려던 찰나 배경화면이 눈에 밟혔다. 반년 전, 중학교 입학 선물로 이걸 사주며 상근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배경화면은 무조건 세 식구의 사진으로 박제해 둘 것.
액정 속 까만 얼굴의 상근은, 세화와 지은을 끌어안은 채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있었다.
상근은 남들이 눈대중으로 넘기는 수평계의 1mm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샷시공이었다.
입사 이래 그의 근태 기록에는 단 한 번도 ‘지각’이라는 단어가 찍히지 않았다. 그가 휴가를 낼 때라고는 고작 지은과의 결혼기념일 또는 세화의 운동회 같은 가족 행사가 전부였다.
한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매일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그였다. 하지만 지은을 만나며 술자리가 줄더니, 세화가 태어난 뒤로는 단골집 주인이 친구들에게 그의 생사를 물을 정도였다.
유일한 일탈은 가끔 회식 날 밤뿐이었다.
그날이면 상근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본인이 유독 좋아하는 세화네 학교 앞 옛날 통닭이 담긴 봉투가, 반대 손에는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취기를 달래 줄 차가운 캔맥주 6개들이가 들려 있었다.
하 부장의 끈질긴 유혹을 뿌리치고, 좋아하는 안주와 함께 스스로에게 허락한 집에서 즐기는 ‘심심한 2차’였다. 그럴 때면 지은은 현관으로 마중 나가 짐을 받아 들고는,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라며 괜한 한소리를 했다. 지은도 상근의 직속 상사인 단란주점 마니아 하 부장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장 배정’을 볼모로 술자리를 강요하는 위인이었다. 눈 밖에 나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이나 위험한 외벽 작업만 골라 보낸다는 소문을, 신혼 집들이 때 상근의 동료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지은은 사회생활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어울려주라고 권했지만 그 좀스러운 보복조차 상근의 귀가 본능은 꺾지 못했다.
어쩌면 상근의 손에 들린 통닭은, 불가피한 회식으로 인한 늦은 귀가에 대한, 지은에게 바치는 사과였다.
사실 어린 시절 지은에게 기다림은 익숙한 일과였다.
어릴 적 그녀의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동쪽 수평선 위로 뜬 해가 머리 꼭대기를 지나 서쪽 바다로 잠길 때까지 어부인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러다 지은의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 왔다. 아버지는 “우리 딸 예쁜 교복 사줘야 한다”며 끝내 궂은 날씨를 뚫고 방어잡이 배에 올랐다.
하지만 배는 너울성 파도를 이기지 못했다.
그 대가로 지은은 새 교복의 감촉을 느끼기도 전에, 거친 상복부터 입어야 했다.
시신이라도 찾길 바랐지만 해경의 수색은 며칠 만에 소득 없이 종료됐다. 야속하게도 날씨 탓이었다.
상근에게 끌린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연애 시절, 막무가내인 진상 고객 탓에 상근이 약속 시간에 한참 늦은 적이 있었다. 연락 수단은 고작해야 삐삐와 공중전화뿐이었던 시절.
허겁지겁 택시에서 내린 상근은 지은이 오랜 기다림에 지쳐 이미 화가 나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달렸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화가 난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파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지은이었다.
상근은 습관처럼 뒤통수를 긁으며 지은을 불렀다.
“지… 지은아!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그녀는 상근을 보자마자 원망 대신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작업복을 찢어져라 꽉 움켜쥐었다.
상근은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연애 초창기, 지은이 흘리듯 말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이 여자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그 시간 동안, 그녀는 혼자서 최악의 상상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상근은 다짐했다.
다시는 이 여자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 맹세는 유효했다. 이후 상근은 어김없이 약속 시간 10분 전에 나타났고, 평소 허허실실 웃으며 고객을 대했지만 퇴근 시간 앞에서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덕분에 지은의 사전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는 삭제되었다.
상근은 그런 남자였다.
지은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
그런 그가 결혼 생활 중 유일하게, 지은의 곤란함을 뻔히 알면서도 어렵게 꺼낸 부탁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떠나보낸 직후였다.
아파트 입주 2년 차,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삼 개월이 지났을 무렵. 상근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은아… 미안한데 어머니 모시고 살아도 될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지은의 눈에 상근의 축 처진 어깨가 들어왔다. 언제나 든든하게 지은을 지켜주던 이의 어깨가, 홀로 남은 어머니 걱정에 한없이 작아져 있었다.
그 무거운 짐을, 조금은 덜어주고 싶었다.
지은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안 그래도 우리 세 식구만 살기에 집이 좀 썰렁했는데 잘됐네!”
지은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상근은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며 말없이 아내를 부서져라 안았다.
“나도 찬성! 할아버지 없어서 할머니 심심하잖아.” 두 사람 사이로 작은 머리통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며칠 후, 상근의 작업용 포터 트럭에 짐 몇 가지를 실은 정자가 낡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상근은 업무 전화가 온 탓에 어머니에게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정자는 아들을 잠시 기다리려 했지만 통화 중 잠시 입을 뗀 상근이 손짓과 입으로 ‘5, 0, 2’를 만들어 보이는 것을 보고 짐 몇 가지를 챙겨 집어 먼저 집으로 향했다.
이전에 와본 기억이 있었기에, 동과 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며느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없어 초인종을 누를지 망설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상근이 올 것도 같아 망설이던 찰나, 502호 현관문이 철컥 열렸다.
정자는 흠칫 놀라며 말했다.
“에구!”
지은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머님! 안 그래도 도착할 때가 되어서 마중 나가 있으려고 했어요.”
지은은 다시 활짝 웃으며 시어머니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에고, 무슨… 짐도 별로 없는데…”
정자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들어오시죠, 어머니.”
“크흠… 그래… 그래, 세화는?”
정자가 현관으로 들어서며 손녀를 찾던 순간, 세화가 불쑥 튀어나왔다.
“할머니! 이거 쿠키 먹을래? 엄마랑 만들었어!”
“얘, 그건 좀 있다가! 일단 짐 정리부터 도와드리고…”
지은은 세화를 분주하게 저지했다.
세화를 제 방에 들여보낸 뒤, 지은과 정자는 신발을 벗고 정자가 쓸 방으로 이동했다.
지은이 방을 안내하며 말했다.
"어머님, 더 좋은 곳으로 모셔야 하는데..."
정자가 며느리의 말을 잘랐다.
"어휴 됐다, 방이 뭐 웃풍만 없으면 되지."
무척 넓다고 할 순 없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정자는 짐이 많지 않은 자신에게 이 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특히 사랑하는 손녀의 방과 바로 맞은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두 여자는 짐을 풀고 정리를 시작했다.
"어머니, 양말들은 어디 둘까요?"
정자는 괜스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아무 데나 둬라, 내가 정리할게."
"어머니, 그럼 여기 장롱 아래 칸에 넣을게요."
"그래… 그래."
한참을 말없이 정리하던 중, 지은은 상근이 언제쯤 연락해 올지 생각하다 잠시 멍해졌다. 바로 그 찰나,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정자가 갑자기 지은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참… 여러모로 미안하구나.”
지은은 놀랐지만 이내 정자의 손을 마주 잡은 뒤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무슨 말씀을요. 괜찮아요.”
그렇게 정자, 상근, 지은, 세화. 네 식구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물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여자들끼리의 불협화음은 있었다.
“어머니, 국이 좀 싱거운 거 같은데 소금 좀 넣어도 될까요?”
“티브이 보니까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다더라.”
“흠… 소금 좀 더 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바닷가 출신이라 간을 세게 하는 지은과, 아침 건강 프로그램 마니아 정자의 소소한 전쟁이었다.
그럴 때면 중재는 늘 상근의 몫이었다.
“에이, 맛있기만 하구먼!”
상근이 숟가락 가득 국물을 떠먹으며 너스레를 떨면, 정자가 혀를 찼다.
“이래서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어.”
“그래서 제가 딸만 낳았어요.”
지은이 킬킬대며 받아치면, 상근은 슬그머니 윙크를 날렸다.
넉살 좋은 가장 덕에 집은 금방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소박한 행복은 딱 거기까지였다.
아니, 죽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