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지은은 여전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정자나 세화의 눈에 띄는 시간에는 최대한 나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따금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럴 때면 다른 식구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유령처럼 움직였다. 간혹 새벽에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시러 나온 정자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자도 혀를 끌끌 찬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자는 물 한 잔 마신 뒤 방으로 돌아왔다. 생각이 깊어져 일단 화장대에 앉았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때 화장대 화장품들 사이로 거울에 붙여둔 상근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이 보였다. 정자는 사진을 한참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겼다. 속 한 번 썩인 적 없던 우리 아들. 고등학생 때부터 삼촌을 따라 샷시 일을 배워 부모 내복을 사 오던 아이. 상근이 보고 싶었다. 어느새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양 손으로 훔쳤다. 마음을 더 굳게 먹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눈을 감은 채 양 손을 마주잡고 기도했다. ‘상근을 무사히 돌려 달라, 그게 어렵다면… 시신이라도…’ 눈물이 주르륵 양 빰을 타고 흘러 기도를 관뒀다. 이제 절에 가야겠다 싶어 로션병을 들었다. 그 때 상근과 지은의 결혼식 사진이 눈에 밟혔다.
정자는 문득 지은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상근이 결혼을 하겠다 했다. 부모와 미리 상의라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적어도 부모 의사는 물어볼줄 알았지만, 상근은 저녁 식사 중에 결혼 얘기를 툭 뱉더니 이번 주말에 인사시키겠다 하였다.
토요일 아침, 정자는 오랜만에 패물장을 열어 금목걸이와 큰 보석이 박힌 가락지 등을 꺼냈다. 요즘 여자애들이 발랑까졌다고 하니 상근을 잘 보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미리 단단히 기강을 잡아야 한다 생각했다. 아끼던 밍크 코트를 입고 거울을 보니 꽤 기품있어 보인다 생각했다. 티브이 속 사모님들과 자신을 매칭시키며 거실로 나섰다.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남편은 여편네 웬일로 꽃단장했냐며 낄낄거렸다. 확 쥐어박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기품 있는 여자가 되기로 다짐했기에, 한 번 째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얼른 나가자고 재촉했다. 남편과 차를 타고 약속장소인 시내에 유명한 한식당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식당 입구로 가자 전형적인 미인 상에 눈웃음이 서글서글한 여인이 상근과 함께 있었다. 식사하며 대화해보니 애가 싹싹하고 나쁘지 않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점이 마음에 다소 걸렸다. 하지만 아들이 좋다니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둘은 식을 올리고 정자가 해준 것도 없지만 씩씩하게 아주 잘 살았다.
얼마 안가 지은의 큼지막한 눈과 상근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빼다 박은 손녀 딸도 얻었다. 손녀 딸을 품에 안았을 때, 상근을 처음 낳아 품에 안았을 때가 생각나 눈물을 글썽였다. 그날,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제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다, 라는 말이 이해되었다. ‘나 정말 잘 살았네, 그치?’, 잠들 기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날 웬수 같았지만, 가끔은 하는 짓이 귀엽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직 이른 나이였지만, 평소에 끼고 살던 술이 화근이었다. 간암으로 고생한 끝에 명운을 달리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물건을 치우지 못한 채 지냈다. 혼자 이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덜컥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럴 때면, 상근에게 전화를 걸어 외로움을 달랬다. 한 편으로 집에 종종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너지시 내비췄다. 착한 아들은 내 마음을 알아채고 전보다 더 자주 찾아왔다.
몇 개월 뒤에는 상근이 모시고 살고 싶다, 라고 운을 땠다. 그 말을 듣고는 양 손을 좌우로 휘저으며 거절했지만, 못이기는 척 승낙했다. 마음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다. 절대 이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상근이 돌아간 뒤, 짐을 싸며 콧노래를 불렀다.
눈 감는 그날까지 평생 행복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상근이 사라졌다. 아니 죽었을지도…모른다.
남편 잃은 슬픔? 나도 안다. 하지만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 먼저 간 어미의 속을 며느리가 알리 없다. 정자는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지은이 미웠다. 나도 숨쉬고 살아가는데, 유세라도 떠는 건가 싶어 마음을 닫았다.
하지만 덩그러니 남겨진 손녀, 세화가 눈에 밟혔다. 그 불쌍한 것을 나라도 거둬야지 싶어 꾸역꾸역 밥상을 차렸다. 그것은 상근에 대한 예의이자 본능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환갑 넘은 늙은이가 사춘기 손녀의 마음까지 하나하나 보살피기엔, 그녀 역시 너무 지쳐 있었다. 일과는 여전히 새벽에 밥을 짓고, 절에 가 관세음보살에게 상근을 무사히 돌려달라고 빌었다.
정자가 방으로 돌아간 후, 지은은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했다. 문득 시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상근과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정작 자신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동안 매일 차려지는 밥상은 모두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한순간 죄책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럼 일단 오늘 까지만… 잊자, 그래 잊자… 설거지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무심코 또 캔맥주를 꺼냈다. 이럴꺼면 상근과 종종 마실 걸 싶었다. 양 손에 캔 맥주를 집어들고 방에 들어가려던 때, 식탁 위에 모여있는 아파트 관리비와 건강보험료 등 각종 고지서가 눈에 들어왔다. 캔 맥주를 식탁에 올려둔 채 고지서를 집어 들어 하나씩 펴보았다. 한참을 보던 지은은 한숨을 푹 내쉬고 캔맥주를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결국 현실은 슬픔보다 무거웠다. 집안에 남은 유일한 가장인 지은은 언제까지고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지은은 결국 휴직계를 철회했다. 다시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그 곳으로 결국 스스로 다시 돌아 가야 했다.
지은의 직장 복귀 첫날, 지점장은 지은을 반갑게 맞이했다. "푹 쉬고 왔으니, 이제 다시 달려야지!" 지점장은 새 계약을 잡아주겠다며 지은을 고객 상담실로 밀어 넣었다. 고객은 50대 남성이었다.
지은은 능숙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자리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이고, 이번 태풍 피해가 역대급이었잖아요? 그 바람에 우리 가게가…" 그는 침을 튀어가며 말했다.
지은은 숨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을 깨물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대화를 능숙하게 이어 갔다. “아아, 이번 태풍 피해가 정말 심각했죠…” 자연스럽게 재난 피해 보험 매뉴얼을 꺼내 설명했다. 상담을 1시간이나 지속한 끝에, 복귀 후 첫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지은은 묵묵히 일했다. 감정은 배제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상품의 장점과 약관만 설명했다.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적 목표가 그녀를 지탱했다
어느 날 한 고객을 로비까지 마중했다. 오늘도 한 건 성공했다. 큰 계약 건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지은은 상담실로 돌아와 필기구를 챙겼다. 필기구를 챙기던 중 재난 피해 보험 매뉴얼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매뉴얼을 바라보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손에 들어 올렸다. 매뉴얼을 다시 열어보았다. 보상금 수령 페이지를 펼쳤다. ‘재난 실종 및 사망 시 보상금 수령법…’ 하지만 이내 매뉴얼을 덮었다.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며 매뉴얼을 서재에 다시 넣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사망 신고를 하는 순간, 직접 상근을 죽이는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지은은 종종 밤 11시가 넘어서야 귀가했다. 일이 몰린 탓이다. 몸은 피곤했지만, 방에 틀어박혀 있던 두 달 동안 세화에게 생긴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은 세화의 방 문을 두드렸다. "세화야... 자니?"
"아니요" 짧고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지은은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지은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밥은 먹었고?"
세화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냥 식탁에 있는 거 먹었어요. 괜찮아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지은은 입술을 다문채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래, 늦었으니까 이만 잘자, 라고 나지막히 남긴 뒤 문을 닫고 돌아섰다. 사실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일단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바로 방에 들어가려다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를 양손에 꺼내들고는 안 방으로 향했다.
세화 할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왔다. 제사는 항상 장남인 상근의 집에서 지냈기에,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정자도 올해 제사는 넘어가야 하나 했으나, 먼저 간 영감에게 마지막 도리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적막하던 집안은 오랜만에 시끌벅적 해졌다.
하교한 세화는 친척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술 취한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이어폰을 꽂고 침대에 누웠다. ‘씻어야 하는데…’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지만 화장을 지우지 않고 잠에 들면 뾰루지가 날지 모른다.
그때, 나와서 밥 먹으라는 정자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세화는 대답하지 않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거실로 나갔다. 어디 앉아야 할지 몰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정자와 지은이 뭐하나 살펴보았다. 정자는 친척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지은은 영혼 없는 얼굴로 음식만 나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만 바라보았다. 먹을 만한 음식은 잡채 밖에 없어 보였다. 좀만 먹고 들어가야지… "상근이네 애기 맞지?" 그때, 세화의 맞은편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갑자기 세화를 불렀다. 자신을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한참을 노인은 혼자 떠들었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을 보니 술을 꽤 많이 먹은 것이 분명했다. 세화는 어색한 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러다 갑자기 노인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근데 너희 아버지 장례는 치렀냐?" 세화는 화들짝 놀라 할머니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정자의 자리는 멀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고 기뻐 보였다. "아니요..."
"쯔쯔... 사라진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장례도 안 치르면 저승 가서 밥도 못 얻어먹는데." 입술을 다물고 쯔-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장례도 안 하고 제사도 안 올리면, 너희 아버지 저승에서 쫄쫄 굶으면서 배곯는다고."
"......"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풍기는 술냄새에 불쾌함을 느꼈다. 남의 집에 와서 술에 취해 헛소리하는 사람이라니,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랑 할아버지가 베스트 프렌드였다니 인자하신 줄만 알았는데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는 대화하기 싫어 고개를 떨구고 아래로 시선을 고정한 채 밥을 먹었다.
노인은 세화의 이런 마음을 알 리 없었다. 혼자 계속해서 떠들었다.
"애기야, 조만간 백중날이니까, 그날 밥이라도 한 끼 꼭 올려라. 알겠지"
"…네?"
"저승에서 망자들이 1년에 한 번 나와서 밥 얻어먹는 날이 있는데, 너희 아버지도 그날 나와서 밥 찾을 거니까 꼭 챙겨줘야해. 알겠지?"
“…네” 마침 밥도 다 먹었기에 대충 대답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방문 밖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싫어 이어폰을 끼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단톡방에는 내가 모르는 얘기가 한창이었다. 얼른 대화에 끼고 싶었다. 한참을 SNS로 떠들었다.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듯이 떠올랐다. 이내 검색창을 켜 단어를 검색했다.
[검색: 백중]
'백중(우란분절): 불교에서 망자의 영혼을 위해 기원하는 명절. 음력 7월 15일... 동양의 할로윈이라 불린다.'
앞의 설명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로윈'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가로로 길게 떴다. 귀신 분장하고 사탕 먹는 날인데… 그럼 아빠도 그날 하늘나라에서 나와, 밥을 먹고 간다는 건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제사도 왜 하는지 모르겠어서...’ 애초에 죽은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있나…? 짧게 고민하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날 밤,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세화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아도 스마트폰 속 아빠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