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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Dec 10. 2024

사진-강의노트

[8화 창(窓)]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창가 자리를 선호하곤 한다. 건물의 빌딩의 창문들도 요즘은 통유리가 대부분이다. 창문의 여닫이나 미닫이가 있는 경우와는 달리 통유리 창문은 그저 바깥 풍경을 관음증(觀淫症)적으로 보기만 할 뿐이다. 창문을 열지 못하니 바깥 공기의 내음을 맡을 수도 없다. 바람의 소통도 없는 창문은 그저 뒷면이 막힌 거울마냥 일방통행적 보기이다. 창문이나 거울이나, 카메라의 렌즈나, 안경은 유리(glass)로 되어 있다. 반투명 유리도 있지만, 유리의 물성은 투명함에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키소스처럼, 유리는 그대로의 자신을 비추거나 그대로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영화 <이창Rear Window>에서 제프리스는 휠체어에 앉아서 창문을 통해 아파트 건너편의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영화 <스모크>에서 오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시간에 브룩클린의 모습을 사진 찍는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바깥 풍경에 대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활용하고 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사진을 찍고 있지만, 내용상 약간의 차이를 가진다. 전자는 관음증적 보기에서 출발했다면, 후자는 기록적 보기에서 출발한다. 완전히 다르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쓰임새에서 달라질 것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매일 같은 장소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처럼 말이다. 영화 <욕망Blow-up>에서 토마스는 무작위로 찍은 사진에서 우연히 살인의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것은 증거의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창문과 거울에 대한 해석은 존 자코우스키(John Szarkowski)가 독보적(獨步的)이다. 그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적극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문(window)을 통해 바라본 사회적 풍경이나, 거울(mirror)을 통해 바라본 내면적 풍경은 바깥 일기와 내면 일기로 두 가지로 구분하는 데 용이하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책에 밑줄을 긋는 사람과 긋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진보적인 사람과 보수적인 사람, 사람들의 성격을 단순히 두 부류의 나눈다는 것이 사실 모순적이다. 사람들의 성격은 오히려 이중적이고, 모호하지 않은가.   

   

우리 사진가들이 다루는 것은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는 현재의 대상들이다그 대상들이 사라져갈 때 어디에도 그것들을 되돌아오게 할 방법은 없다우리는 기억을 찍을 수 없다오로지 현재를 담을 뿐이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 ‘결정적 순간’, 1952-  

   

창(窓)에는 과거를 내다보는 창문과, 현재를 내다보는 창문, 미래를 내다보는 창문이 있다. 까르띠에 브레쏭의 말처럼 사진은 현재만을 촬영하게 되지만, 우리가 보는 인식은 오로지 현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것들과, 언제가 과거가 될 것들, 과거로부터 나올 미래의 것들은 그 대상과 주체에게 남겨져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이 찾아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올 거라는 시간은 영원반복하고 있고, 공간 또한 과거의 공간, 현재의 공간, 미래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렸을 때, 살았던 안방에 있던 커다란 창문과 내 방의 작은 창문들, 그 기억들을 과거의 창문으로 남아 있다. 집 밖에서 아이들이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팽이치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을 열고 밥 먹으라고 들어오라고 소리치던 할머니의 목소리. 집 안과 집 밖은 창문을 통해서 소통되었다. 창문을 열면 바깥 담장도 보이고, 그 너머의 다른 집의 대문도 보인다. 어느 집에 누가 찾아왔는지, 바깥에 왜 이리 시끄러운지, 딸랑~ 딸랑~ 두부장수의 종소리이든,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창문은 내가 외부로 나가게 되는 문이 된다. 그런 창문들이 이중창이 되고,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범창으로 또는 벌레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방충망으로 바뀌었다. 창은 있어도, 바깥과 연결된 창은 점점 줄어들었다. 바깥으로부터 완벽하게 막아주는 창문. 그런 창문의 완벽함으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든 소음으로부터 삭제된 무음(無音)의 공간이 된다.  


사진은 과연 과거를 말하는 것인가, 현재를 말하는 것인가, 미래를 말하는 것인가. 사진이 찍혀진 시간은 현재이면서 과거가 된다. 과거의 기억이면서 미래를 이야기한다. 흔적을 쫓는 사진가들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다시 되찾아가, 현재의 공간을 찍기도 한다.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다시 사진을 찍고, 남긴다. 사진은 실제(real)를 재촬영, 재복사, 다시 시뮬레이션(simulation)한다. 두 현대 예술 사진가가 있다. 사라 피커링(Sarah Pickering)과 안마이 레(An-My Lê)는 과거를 통헤서 미래에 대한 예감과 기대에 기인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사건Incident>(2008)와 <화재 현장Fire Scene>(2007)이라는 두 편의 사진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그녀의 이미지들은 상상된 미래를 기록함으로써 사진의 본질, 지표(index)와 환영(simulacrum)을 결합하는 것에 대한 오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에이도스(eidos)라고 표현하고, 사진의 본질을 ‘죽음’으로 규정한다. “사진은 미래의 죽음을 말해준다... 피사체가 이미 죽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진은 이 비극적인 결말(catastrophe)이다.” 피커링의 이미지는 삶의 또 다른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또 다른 사진가 안마이 레는 자신의 이미지를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지게", "기억을 출현시키고", "사실과 허구를 모호하게" 하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의 이미지를 다시 재연하여 촬영한다. 그녀의 프로젝트는 재연(reenactment)이다. 재연을 통해서 과거를 다시 환기시킨다. 재연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 그 이상이다. 과거의 사건들은 레의 사진을 통해서 현재 진행형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간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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