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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 반물질의 블루스>

영화 <미키17>  2024년

by 노용헌 Mar 26. 2025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2권, <미키7>, <미키7: 반물질의 블루스>으로 이루어져있다. <미키7: 반물질의 블루스>는 크리퍼라는 외계 생명체와 미키가 손을 잡고 또 다른 적대적인 크리퍼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에선 삭제됐지만 소설에선 ‘반물질’이라는 핵폭탄을 연상시키는 무기가 나온다.     

“내 말 들은 거야? 또 다른 나를 봤다고. 맨 아래층 사이클러 근처에 있었어. 마샬이 내 복제본들을 새로 탱크에서 뽑아내기 시작한 모양이야.”

나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불가능해. 미키, 마샬은 네가 사임했을 때 네 패턴을 지워 버렸어, 맞지?”

“그랬지. 내 말은 그랬을 거야.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마샬이 탱크에서 누굴 꺼낸 적이 없잖아. 있어?”

“그건 아닌 것 같아. 베르토한테 들었는데 내 버블 폭탄의 연료를 다시 원자로로 밀어 넣다가 드론을 두 대나 태워 먹었대. 여분으로 굴러다니는 미키들이 좀 있었으면 그만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나샤는 등을 뒤로 기대며 내 옆 침대에 두 발을 걸쳐 올렸다. “맞아, 지난 2년간 크리퍼들과 어울려 지내던 에잇이 문득 우리 쪽에 다시 합류하기로 마음먹지 않고서야, 네가 복도를 돌아다니는 너 자신을 볼 리는 없어. 해리슨이 아닌 건 확실하고?”

“해리슨? 제이미 해리슨 말이야?”

나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응, 꼭 네 도플갱어 같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갤 보고 너로 착각한 게 분명해.”

제이미 해리슨은 농업부에서 근무한다. 대개 토끼를 돌보는 일을 맡는다.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이며, 칙칙한 갈색 머리칼이 비죽 뻗친 채로 다닌다. 항상 초조한 눈을 가늘게 뜨고 도ᅟ굘출된 부정교합이 도드라져 보이는, 나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녀석이다. 

어쨌든 내가 볼 때는 나와 닮은 데가 아예 없다.                 (P10-11) 

    

반물질 원자로 내부에서 빈둥대는 일은 익스펜더블의 주요 업무다. 우리는 중성자 선속을 견대 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드론보다 오래 버틴다. 죽고 나서 교체할 때 훨씬 용이한 것도 우리다. 그냥 사이클러에 낡은 시체를 넣고 바이오 프린터를 켜서 몇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물론 나는 더 이상 익스펜더블이 아니다. 은퇴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나샤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딱히 네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실체화된 또 다른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신경 쓸 의무란 뭘까? 방사선을 쬐게 되는 존재는 나일까 아니면 나처럼 생긴 어떤 남자에 불과할까? 테세우스의 배는 어딘가의 섬에 남아 잊힐 지경에 처한 파손된 선체를 두고 뭐라고 말할까? 하지만 입을 벌린 채로 5초가 지났다.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P12)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제가 사실은 무임 승차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니플하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일 교대 근무를 합니다. 이따금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만 빠졌을 뿐 기본적으로 제가 사직하기 전에 그랬듯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맞네. 자네의 근무 스케줄에 대한 보고는 받았어. 토마토 까꾸기, 화학 실험실 바닥 청소하기, 토끼들과 놀기, 유휴 인력을 안 말려고 억지로 꾸면 낸 임무잖나. 반스, 자네가 직접 말했듯이 이따금 맞는 끔찍한 죽음, 그 일을 하라고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아닌가. 나머지 시간에는 그 임무 사이에 시간을 때우는 게 전부였어.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 찬찬히 돌아보면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걸세. 지난 2년간 자네는 그 어떤 일로도 이 개척지에 실제로 가치 있게 기여한 바가 없단 말이지. 상륙거점에서 생존은 백척간두와 같아. 자네가 먹고 싸고, 자원을 끌어다 써 놓고 아무것도 갚지 않으면 우리는 한층 더 실패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거야.”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자살을 권유하시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말입니다. 사령관님,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말씀하셔야 할 것 같아요.”

마샬은 다시 상체를 앞으로 들이밀고 목소리를 낮추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반스. 나도 그러면 고맙겠지만 자네에게 자살을 권유하지는 않아. 은퇴 이후 자네의 존재가 동료 개척민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걸 덜어 줄 방법에 대해 결단을 내리라고 제안하는 걸세.”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마샬은 등을 의자에 기대더니 가슴에 팔짱을 꼈다. 

“자넨 이게 지금 원래의 임무로 돌아가라는 지시인 줄 알고 있겠지. 확실히 말해 두겠네. 그렇지 않아. 앞서 말했듯이 자살을 명하는 것도 아니야. 사실은 말일세. 나는 자네에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필요한 뭔가를 해 보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건 이 개척지의 다른 모든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지.”

“아아아,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해 보라고 명령하신 일은 제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는다든가 하는 건 포함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그럼, 어떤 경우든, 꼭 그럴 필요는 없네.” 그가 대답했다.                 (P32-34) 

    

나샤가 말했다. “그래, 맞아. 얘 아직 확실히 그 명단에 올라 있어. 내가 추측한 대로라면 마샬은 이 문제를 일석이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크리퍼들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폭탄을 미키를 시켜 가져오게 하면 날씨가 바뀌어도 우리 모두 굶어 죽지 않거든. 그러고 나서 그 뒤에 미키를 죽일 기회가 생기면 딱 좋지.”

베르토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런, 그럼 너는 시키는 대로 하려는 거네, 그렇지?”

나는 나샤와 살짝 눈빛을 주고받았다. 베르토에게는 폭탄을 어떻게 했는지 사실대로 말한 적이 없고 지금은 그걸 알려 주기에 좋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샤가 말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알잖아. 그 폭탄 덕분에 미키가 지난 2년간 시체 구덩이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거. 그걸 도로 찾아오면 마샬이 미키를 끝장내는 건 시간문제야.”             (P46) 

    

그날 밤, 나는 에잇의 꿈을 꿨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잇이 된 꿈을 꿨다. 

내가 꾸는 꿈은 대체로 이상하고 단편적인 것들이다. 이번은 달랐다. 꿈이라기보다는 기억에 가까운 사실적인 꿈이었다. 대재앙의 폭탄을 등에 짊어진 내가 크리퍼들의 미로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터널들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암반에 갈림길이 나 있고 가시스펙트럼에서는 석탄처럼 검게 보이지만 적외선에서는 희미하게 빛이 나 보였다. 나는 폭탄의 기폭 장치에 한 손을 얹고 더 깊이 들어갔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뭔지 궁금해하면서, 그냥 폭탄을 터뜨려 그걸로 끝내 버려야 할지 고민하면서, 몇 분 간격으로 세븐이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세븐은 우리가 하려는 일을 포기하게끔 설득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는 마샬이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끝난 뒤 나인이 탱크에서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실제로 그를 설득하려고 했던가? 지금으로서는 기억할 수가 없다. 

드디어, 나는 휘청거리며 아치형 구멍을 통해 크리퍼 유치원이 내려다보이는 바위로 나왔다. 악몽 같은 구덩이다. 돔의 절반 크기 정도의, 칙칙한 주황색의 불빛으로 밝혀진 공간이다. 빛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퍼들이 그 공간에 가득하다. 수천, 수만의 크리퍼들이 서로를 밟고 밟히며 기어다닌다. 벽을 기어오르고 천장을 가로지른다. 나는 정지 화면을 찍어 세븐에게 전송한다. 바로 지금이야, 그렇지? 지금 해야 해. 나는 도화선에 얹은 손을 꽉 쥐었다. 나는..........                   (P62-63) 

       

암석 위에 앉아 산소 포화도가 어느 정도 정상 수치에 가깝게 올라올 때까지 퀴퀴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나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곱씹어 볼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그건 나도 안다. 그녀는 내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나샤는 내가 죽는 걸 이전에도 봤다. 내가 죽을 때까지 손을 잡아 준 것만 세 번이다. 매번 나는 몇 시간 만에 새것처럼 되돌아왔다. 나샤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겠지? 나샤는 내 결정에 맡기겠다며 내 목숨을 지난 2년간 부지해 준 방패를 잃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그 일을 그냥 해 줄 수 있고, 폭탄을 가져와 넘겨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 그러고 나서 마샬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바로 다음 날이면 그녀에게 금방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내가 내 개인의 생존과 개척지 전체의 운명을 저울질하면서 이기적인 행동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을, 나샤는 최소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겠지, 안 그럴까?                (P71)    

 

“뭐야?” 

내가 묻자 베르토는 한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내며 다른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약 8미터 떨어진 곳, 그곳에 크리퍼가 있었다. 뒷부분은 아래로 말고, 앞부분은 치켜든 채로 바위 꼭대기에 앉은 모습이었다. 덩치가 크진 않지만 부속물도 아니었다. 몸길이는 3미터 정도에 갈색과 황금색이 얼룩덜룩한 대여섯 개의 마디와 수직으로 뻗은 한 쌍의 아래턱을 갖춘 개체였다. 지금은 우리 쪽이 아니라 돔을 보고 있었다. 

“미키, 저거 보이지?” 베르토가 속삭였다. 

“그래, 보여.” 내가 대답했다. 

“대화할 수 있겠어?”

나는 베르토를 쳐다보았다. 뭔가 비꼬는 말을 하려다가 베르토는 내가 지금 2년간 크리퍼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고 믿는단 걸 떠올렸다. 그는 내가 크리퍼들과 계속해서 협상해 왔다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나샤만 내 말이 순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이거 실망하게 생겼는걸.                 (P79)     


라이브 메모리 다운로드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볼까한다. 11년 전, 7광년 넘게 이동하며 여섯 번의 죽음을 맞기 전의 일이다. 젬마 아베라에게 어째서 설계도와 절차, 기술 지침서를 공부하며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메모리 다운로드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차피 탱크에서 재생될 때마다 그걸 사용하니까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다른 익스펜더블의 저장된 메모리를 꺼내 내 두개골에 집어넣으면 되지 않을까?

“훌륭한 질문이군요.”

젬마가 말했다.                    (P97)     


“아니야, 자기야. 난 네가 가길 원하지 않아. 네가 마샬의 아량에 기대어 사는 거 싫어. 더는 못 참겠다고. 하지만 미키. 우린 이 개척지를 위해 너무 많이 희생했어. 너도 이미 굉장한 희생을 했지. 포가 겪은 일, 파이브가, 식스가, 그리고 에잇이 한 일을 생각해 봐. 이곳이 망하고 모두가 죽는다면 그 희생이 모두 헛수고가 돼. 나는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아. 네가 수없이 죽어 갔던 일들이 아무 의미 없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 게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굶어 죽기도 싫어.” 나샤는 몸을 숙여 내게 키스를 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나샤는 두 손을 머리 뒤에 포개어 베고 등을 대고 누우며 말을 이었다. “있지, 네가 그 폭탄을 되찾아 오면, 내가 반드시 네가 한 일이라는 걸, 네가 이렇게 우리를 구했다는 걸 모두가 확실히 알도록 만들게. 혹시 마샬이 이후에 널 없애려고 하면 내가 반란을 일으킬 거야. 내가 전에 그랬잖아. 자기야, 나쁜 놈이지만 멍청이는 아니라고. 아무리 널 죽이고 싶어도 네가 이 일을 해내면 그런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을걸.”

한숨이 났다. “넌 기꺼이 내 목숨을 이 일에 걸겠단 말이구나, 그렇지?”

나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난 우리 목숨을 이 일에 걸 용의가 있어. 경비대원이 널 잡으러 오면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 거야.”

물론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한다. 막상 일이 잘못되면 대개는 빈말에 그치고 말지만, 어쨌든 나샤는 다를 것이다. 나샤가 시체 구덩이로 들어가는 나를 기쁘게 지켜볼 거라고. 곧 미키 11과 새로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문득 수치스러웠다. 내 말은, 그녀가 정말로 나를 지켜 줄 거라는 망상에 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나샤는 외모로 보나 태도로 보나 전쟁의 여신 같은 사람은 아니다.                   (P110-111)     

“넌 꼭 따라오지 않아도 돼.”  

나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렇다면, 뭐.

나샤에게 숨긴 곳을 보여 줬던 2년 전 이후로 폭탄을 보러가는 건 처음이다. 가 보고 싶었다. 개척지의 누군가 우연히 폭탄을 발견하고 어쩌다 작동시키는 꿈을 꿨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꿈을 끝은 개척지가 사라지면서 터지는 하얀 섬광이었다. 그래도 나는 폭탄을 보러 가지 않았다. 마샬이 혹시 내 움직임을 추적할지 몰라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 생긴다. 만약 마샬이 지금 나를 추적하고 있다면? 크리퍼들이 폭탄을 가져간 적이 없고, 폭탄이 내내 이 바위 더미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어떻게 나올까?

그다지 의문을 가질 필요 없겠지. 나를 죽여 버릴 게 제법 확실할 것 같으니 말이다.           (P112)     


인류가 외계 지성과 상호 작용한 역사는 암울하리만치 빈약하다. 현재 유니언은 48개의 행성을 점령하고 대략 60광년에 걸친 광활한 우주로 널리 뻗어 나가고 있다. 이 행성들 대부분은 우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간신히 거주할 만한 곳들에 불과했다. 아마 여러분은 원주민 중에 진보한 기술을 겸비하고 우리를 맞아 준 곳이 좀 있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겠지?

사실 그렇지 않았다. 

롱샷에는 지적인 원주민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우리는 그들과 어떠한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상호 작용을 한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나무 위에서 사는 오징어들이고 거주 범위도 매우 제한적이다. 그들은 행성의 유일한 대륙 중심부에 있는 삼림 속, 접근이 어려운 어느 정글 속에서만 산다. 우리는 해안가에 상륙한 이후로, 인간들이 늘 그렇듯, 줄곧 바다 근처에서만 머물렀다. 몇 번 접촉을 시도해 봤지만 원주민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여 별다른 진전을 얻지 못했다. 

로어노크에도 지적인 원주민이 산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챌 무렵에 우리 개척지 주민 모두가 그들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상호 작용을 할 기회가 없었다.           (P132-133)     

크리퍼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몰라도 정말이지 지옥처럼 먼 길을 갔다. 우리는 며칠을 걷는 느낌으로 어둠 속을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는 걸 오큘러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구석구석에서 다른 크리퍼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대개 우리가 없는 듯이 행동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최소 수백 마리가 무리 지은 행렬이 우리가 가는 터널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길이 막히게 되었다. 우리를 이글고 가던 크리퍼는 터널의 측면과 천장으로 기어올라 행렬 너머 반대편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가던 길을 재촉했다. 나는 나샤를 바라봤다. 

“미안해, 난 그렇게 못 해.” 나샤가 말했다. 

우리의 가이드는 전보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기다려 주지도 않았다. 

“이러다 놓치겠어.”

“그럴지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샤가 말했다. 

나는 행렬 가장자리로 발끝을 들이밀었다. 

“미키? 뭐 하는 짓이야?”

“가설을 시험해 보는 거지.”                    (P143-144)  

   

“우선, 그들은 부속물들이 아니었어. 내가 전에 여기 왔을 때도 이걸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우리 종족은 부속물이 없어. 우리는 각자가 독립된 지성을 가져. 우리는 모두 다 너희가 프라임이라고 부르는 존재인 거야.”     

“너 말을 잘못했어. 아니면 내가 잘못 이해했겠지. 우리가 데려간 것들은 부속물들이었어.” 스피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말한 게 아니야. 우리 종족은 부속물이 없어. 각자가 프라임이지. 이걸 어떤 식으로 다르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이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는 이걸 납득할 수 없어.” 스피커가 말했다. 

“어째서? 뭐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거야?” 나샤가 물었다. 

스피커의 몸을 타고 떨림이 길게 파도쳤다. “네가 한 말은 사실일 리가 없어.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살해를 했다는 뜻이야. 우리가 살해를 했다면 너흰 이야기를 하러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지. 너희 무기들을 봤어. 아마 너희는 그것들을 가지고 와서 보복으로 우리를 살해하려고 했을 거야.”

사실, 그게 바로 정확히 우리가 하려던 일이라고 말할까 생각해 봤다. 

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지.

“아무래도, 우리가 워낙 너그러운 종족이다 보니 말이야.” 나샤가 말했다. 

스피커가 몸을 일으켜 나샤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네 말을 믿지 않아.”              (P154-155)

     

나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숨을 내뱉은 뒤 주먹 쥔 두 손의 마디로 두 눈을 문질렀다. 

“우리 폭탄을 그들에게 줬단 말이지. 너희가..... 왜 그런 짓을 했어?” 내가 물었다. 

스피커가 대답했다. “그들이 뭐든 너희 것을 달라고 요구해서. 공물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아까도 말했지만 친구들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그 단어를 확실히 이해한 게 맞는다면 재수 없는 놈들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네. 그들과 우리 관계는 늘 불편했거든. 적대적인 적도 자주 있었고, 너희가 이곳에 온 뒤로 우리가 너희들에게 접근하는 걸 점점 불안해했어. 우리가 자기네에 대항할 어떤 이점을 너희에게 제공받지 않을까 두려워했지. 부속물들을 잡아가고 우릴 협박했어. 너희들이 폭탄을 조사해 보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더라고. 흥미로울 만큼 신기했지만 내용물이 일반적인 물질과는 상호 작용을 안 하길래 무해한 물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거야. 쓸 만한 공물이 될 것 같았어.”

나샤가 말했다. “쓸 만한 공물? 그래, 그게 정확히 뭔지 몰랐으니까 그럴 만해. 그런데 방금 얘기할 때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들어 있었다고 했는데, 정말 그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다고?”                 (P171-172)     


경사면 아래로 10여 미터 지점에서 땅이 솟아오르더니 스피커가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안녕, 날 데리러 돌아워 줘서 고마워. 저건 무기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버 위에 달린 포탑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는데도 방향을 스피커가 있는 쪽으로 돌리더니 꼭대기에 달린 포커싱 크리스털이 윤기 없는 검은색에서 강렬하고 탁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이봐! 물러서!” 나는 두 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스피커와 로버 사이에 버티고 섰다. 

제이미의 목소리가 포탑 바로 아랫부분에서 흘러나왔다. 

“비켜, 미키! 크리퍼를 태운다고 하더니, 대체 저건 뭐야?”

그렇다. 그들은 작은 크리퍼들밖에는 본 적이 없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을 해 줬어야 하나.

“우린 얘를 데리러 여기까지 온 거야, 제이미. 멈추라고.”

“안 돼.” 제이미가 말했다. “세상에 빌어먹을. 미키, 저 크기 좀 보...... 아얏! 무슨 짓이야, 나샤?”

나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후 포탑이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잘하는 짓이다. 안 될 거 없지. 그렇게 원하면 태워. 내가 조종석을 밀봉해 버리지 뭐.” 제이미가 으름장을 놓았다. 

“어서, 새로운 동맹을 소개해 줄게.” 나는 스피커가 나머지 몸통을 땅 밖으로 빼내는 걸 지켜보며 말했다.                       (P212-213)     

"우린 많은 걸 알고 있어.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곳 말고도 우리 태양을 공전하는 여섯 개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 하지만 네가 그런 세계에서 왔다는 건 못 믿겠어. 두 곳은 공기가 없고 아주 뜨거운 데다가 나머지 네 곳은 행성이라기보단 실패한 항성이니까. 너희 같은 존재는 그 어느 곳의 지표면상에도 살 수 없어. 물론 위성들도 있지만 아무리 세계를 이룰 만큼 크다 해도 생명체가 살 만한 곳은 아니야. 항성들을 공전하는 세계가 더 있는지는 우리도 몰라. 하지만 아마도 있을 거라고 봐야 합당하겠지. 그 문제에 관한 진실은 어쩌면 우리보다 너희가 더 잘 알 거야.“

나는 크리퍼들이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나중을 위해서 그건 똑같은 주제로 나샤와 나누었던 대화 폴더에 같이 넣어 둬야겠다. 나샤의 말이 맞는다. 크리퍼들은 미개하지 않다. 얘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한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두드러지게 덜떨어진 종족이 아닌 건 제법 확실한 것 같다. 얘들을 과소평가했다가는 아마 죽음을 좌초하기에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넌 우리가 거기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해? 다른 항성들?” 나샤가 물었다.            (P225)   

 

“명료화를 해 줘. 나는 크리퍼야?”  

“그렇지, 너는 크리퍼야.” 루카스가 말했다. 

“그럼 맞아. 지금 밖에 있는 생명체들도 마찬가지로 크리퍼들이야. 우리는 똑같아. 내가 말했듯이 저들은 남쪽에 있는 우리 친구의 종복들이니까, 기억하지?”

“하지만......”

루카스가 나샤의 말을 가로챘다. “너는 벌레잖아. 저것들은 거미고 너희는 똑같지 않아.”

스피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우리가 이 점을 명확히 아는 줄 알았지 뭐야. 이건 생물학적 외피가 아니야. 구조물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너희들의 발성 기기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복제할 수 있었겠어? 이것 덕분에 우리는 굉장한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어. 다양한 형태도 취할 수 있지.”

“정말이야? 너희가 기계라고?”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 정확히 말하면 크리퍼들은 기계가 아니라고. 하이브리드 같은 거지. 적어도 우리가 잡은 표본에 따르면 그래.”

“정확해. 우리는 하이브리드야. 일부는 생물이고 일부는 기계야. 금속을 확보하는 걸 상당히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고, 다양한 금속 원소의 이용 가능성이 우리의 재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제한 사항이야.”

“맙소사, 듣고 보니 더더욱 로버를 넘겨주고 싶지 않은걸. 로버에서 얻은 금속으로 저들 같은 개체를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을까?” 나샤가 물었다. 

“수백 개. 정확히 어떤 물질로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수백 개가 될 수도 있어. 이 기계는 엄청난 자원이니까.” 스피커가 대답했다.                  (P265-266)     

“확실하지 않지. 그래도 거의 전부겠지. 원래는 100여 마리였던 것 같은데 네가 폭격을 해 준 데다 캣과 루카스의 저격 덕에 최소 절반은 죽인 게 분명해.” 내가 말했다. 

“그게 맞는 것 같네. 그런데, 지원군을 데려오지 않을까?” 베르토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모르지.”

“사실 그게 별로 중요하진 않겠어. 얼마든지 오라지. 시간됐어?”

“그래, 시간 됐어.”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꼭 감은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반쯤 멀 지경이었다. 이어서 열기가 퍼졌다. 대비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열기가 손과 이마의 피부를 그을리며 뿜어져 나왔다. 다음에 밀려온 건 압력파였다. 나는 거인의 주먹에 강타당한 것처럼 등부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침내 소리가 나를 덮쳤다. 웅웅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었다. 세상의 종말 같았다.                   (P308)    

 

나는 환하게 쏟아지는 햇빛과 비명 소리에 잠이 깼다. 

미처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내가 본 광경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첫 번째로, 비명 소리, 그건 루카스의 비명이었다. 그는 배낭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부릅뜬 채 두 손을 비틀어 등에 대고 있었다. 가속기를 손에 든 캣이 그 뒤에 서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제이미와 베르토는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었다. 나샤는 기척이 없었다. 

루카스가 주춤거리며 일어나 캣을 향해 몸을 비틀었다. 그의 손은 등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온 하얀, 마치 털 없는 꼬리처럼 생긴 무언가를 감아쥐고 있었다. 그는 그걸 빼내려고 잡아당겼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그의 몸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유유히 사라지려 했다. 어째서인지 루카스는 더 크게 비명을 질렀고 그가 손을 놓치는 순간 그것이 완전히 그의 몸으로 들어갔다. 루카스는 재차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고 비명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제야 그의 허벅지 뒤로 피투성이 구멍이 보였다. 그때, 오른쪽 신장 바로 위에서 꿈틀거리는 하얀 꼬리가 또 하나 솟아났다. 

“디거들이야! 봤지? 디거들이야! 여기서 멈춰선 안 되는 거였다고!”             (P318-319)    

 

그것이 말했다. “우리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우리는 그것을 너희에게 돌려주길 바라지 않는다.”

“이봐......” 나샤가 나섰지만 내가 눈짓을 보내 저지했다. 

“그 물건은,” 내가 말했다. “호의적으로 보인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지 않아. 위험하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만약 그걸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너희가 실수로 너희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커.”

“흥미롭다. 너희는 우리의 안녕을 염려해 여기에 온 것인가?”

“아니, 분명히 아니야.”

“분명히 그렇군.” 그것이 말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를 오도하지 않으려고 한 점에 감사하겠다.” 

“하지만 너희가 우리 물건을 돌려주기를 거부하면 그것이 결국 너희를 죽이게 될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크리퍼가 첫 번째 마디를 들어 올리더니 앞뒤로 흔들었다. 사람이 고개를 젓는 동작을 흉내 내면서도 소름끼치는 면이 있었다. 

“우리는 너희 말을 믿지 않는다. 너희는 협상에서 너희 위치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그 장치가 위험하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치를 연구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위험한 건 아니라고 믿는다.”

말이 끝나자 그것이 먹이 앞발을 드러내며 거품을 내뿜었다.                  (P350-351)   

  

베르토가 우리 쪽 통신을 음소거 상태로 두었다. 우리는 수백 미터 정도를 더 내려가서 또 한 번 언덕 위를 밀물처럼 오르는 크리퍼들 위를 한 바퀴 돌았다. 

“다 하면 적어도 2500마리는 되겠어. 세상에, 미키. 대체 우리가 왜 필요한 거래?”

나는 다시 유치원을 떠올렸다. 

“스피커 쪽 사람 중에는 큰 개체들이 아주 많진 않은 것 같아. 대신 작은 개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터널에서 싸울 때 아주 유리할 거야. 스피터한테 듣기론 집단은 독자적으로 그들을 축출할 만큼 강하지 않대. 그러니 네가 말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겠지. 우리가 스피커 쪽 사람들을 일정 수준으로 소모시키길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와서 제압하려는 거야. 우리 쪽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피해를 주게 내버려 둔 다음에 결국 우리가 괴멸되면 슬쩍 들어와 생존자들을 도살하는 수순이지. 옛날 지구의 인간 군대도 항상 식민지 군대를 똑같은 전술로 이용했어.”

“그렇군. 그럼 우리는 단순한 총알받이가 아니네. 그보다는 기습부대에 가깝나? 아니면 광전사? 어쨌든 우리 쪽 사람들은 분명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죽게 돼.”

베르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종간을 만졌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 크리퍼 대형 앞쪽을 한 번 더 가로질렀다. 

그가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전쟁이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할 거야.”

우리는 능선 꼭대기의 몇백 미터 상공을 선회하며 조용히 크리퍼들의 전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P389-390)     


그것이 다시 침묵에 빠졌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저절로 꺼진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시작하던 찰나에 그것이 말했다. 

“우리는 합의를 했다. 당신은 우리를 배신했다. 이젠 우리와 또 다른 합의를 하고 그들과 맺은 뭔지 모를 합의를 배신하려고 한다. 통상적인 합의 방식이 아니다. 결코 전례 없는 일이다.”

“정말? 우리 종족은 빌어먹게도 허구한 날 이런 짓을 해.”

그것이 몸을 떨었다. “당신 종족은 괴물들이다.”

“아마도, 어쨌든 그런 결론을 내린 건 너희가 처음이 아니니까. 그렇긴 해도 이건 너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제안이야. 장치를 주면 우리가 정말로 너희를 보호하겠다고 말할게. 이건 너희가 살아남을 유일한 기회야.”

크리퍼는 앞발로 리듬을 타며 바닥을 두들겼다. 

“우리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줄 수 있는 답이 없어. 사실, 우리는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하는 나쁜 놈들이니까. 그리고 내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내가 보기에는 네게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크리퍼는 가만히 있다가 몸을 떨더니 다시 몸을 원래대로 말고 방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먹이 앞발로 폭탄을 안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폭탄을 내 발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물러섰다. 

“그것을 받아서 가길 바란다. 당신 종족은 결코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

“내 생각도 같아.” 나는 폭탄을 어깨에 짊어졌다.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도록.” 그것이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럴게.”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번에는, 어쨌든, 기억할게.”               (P403-404)    

 

“너도 이제는 집단 심장부에 있는 그것이 우리 종족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잖아, 그렇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보게 되자 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 네가 거미들에 대해 말해 준 뒤에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않고 있었거든.”

“우리 종족이 아니란 건 확실해. 사실 어떤 종류의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야. 제3의 종류라 할 수 있는 생명체지. 그걸 적절하게 표현할 너희 단어를 모르겠어.”

“곰팡이?”

파문이 그의 몸을 타고 퍼졌다. “아마도. 우린 그 종류가 어떤 건지는 알고 있어. 기생충처럼 생물을 감염시켜서 신경계를 장악해. 특히 양치류 틈에서 사냥하며 사는, 작고 기어다니는 것들에게 유독 전염성을 띠는 생명체야. 우리는 그것이 더 큰 생명체를 장악한 것을 결코 본 적은 없었어.”

“그런데 그게 너희 프라임 중 하나를 장악했구나.”

“맞아, 그랬어. 그럼으로써 어떤 형태의 지각을 얻게 된 것 같아. 우리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 이젠 그걸 연구해서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진정한 위협이 될 새로운 종류의 발생인지 판단해야 해. 따라서 우리는 집단을 파괴하지 않을 거야. 다만 그들의 미로 입구를 봉쇄할 거야. 봉쇄된 채로 남도록 감시할 생각이지.”

“그들을 산 채로 묻어 버리려고?”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안전한 선택지인 것 같아. 우리는 연구를 위해서 그들을 보존해야 하지만 더 이상 오염이 확산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을 알아내고 나면 우리 중 누구든 집단과 직접 접촉한 자들은 모두 분해하고 살균할 거야.”

“엇, 하지만 너......”

“맞아, 네가 제대로 보고 있어. 나도 집단과 직접 접속했어. 확실히 감염된 거지. 그래서 나를 격리하고 관찰할 거야. 일단 감염이 뿌리를 내리고 발현하면 나는 파괴될 거야. 어렵지만 필요한 조치야.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마침내 웃음이 잦아들자 내가 말했다. “미안, 정말 미안해.”

나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스피커의 아래턱이 거의 내 얼굴에 스칠 만큼 가까워졌다. 잠시 후, 먹이 앞발 하나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끝에 발톱이 달린 촉수들이 펼쳐졌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 갖다 댔다. 

“난 이해해, 친구야. 내가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알면 아마 놀랄걸.”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피커가 팔을 거두었다. 그는 50센티미터 정도 뒤로 물러섰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얼굴 높이까지 몸을 일으켰다. 

“잘 가, 미키. 널 만나서 반가웠어.”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었다. 긴 5초가 지난 후, 스피커가 첫 번째 마디를 내 쪽을 향해 까딱거리더니 돌아서서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P410-412)   

  

의료국을 나서면서 나는 문득 테세우스가 버린 배의 조각들을 고려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로 그 신세겠지. 그렇지 않을까? 나의 다음 복제본이 탱크에서 나오면 이 순간의 나라는 사람은 더 이상 그의 서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미키 반스는 여전히 살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나는 이미 유령이다. 

의료국에서 매기 링의 방까지는 조금만 걸으면 된다. 아직 오전 4시라서 그녀는 분명히 깨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나는 얼른 이 일을 끝내고 싶었고 그녀의 수면 주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시스템 엔지니어링 부장으로서 매기는 마샬에 이어 사령부에서는 두 번째로 직급이 높은 사람이다. 실제로 그녀의 방에는 철제문이 달려 있다. 나는 그 문을 마주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여길 들어가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렇지?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놀랍게도 미처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던 매기는 하마터면 나와 부딪힐 뻔하고는 놀라서 뒤로 폴짝 뛰었다. 

“반스? 여기서 뭐 해?”                         (P421)     

익스펜더블은 보통 은퇴하지 않는다. 

뭐랄까. 대개 그들을 영원히 데리고 있지는 않으니까. 어느 지점이 되면 개척지는 자리를 잡거나 소멸한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수요는 서서히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기억하시라. 일반적으로 익스펜더블이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반드시 곁에 두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강도 살인 성범죄자를 데려와 그들이 녹거나 불살라지거나 해서 죽는 걸 지켜보게 되면 양심이 약간 회복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오면, 당신은 그들이 갓 디캔팅이 된 자녀와 공원에서 어울려 지내길 진심으로 바라는가를 신중히 고민하게 된다. 익스펜터블이 경력을 끝내는 가장 흔한 방법은 사망이고, 두 번째로 흔한 방법은 재생 거부다. 

마샬은 물론 그걸로 나를 자주 위협했다. 

매기 링은 다른 아이디어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공학자이고 드론을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기계만으로도 충분한 이 시점에서는 익스펜더블이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제법 확고하게 하는 것 같다. 그녀는 실제로 내가 해고되었다고 말한 적도 없고 내 패턴과 마지막 업로드도 아직 서버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마샬이 죽은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내게 범용 단순 노동자 이상의 다른 것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어떠한 암시도 내비치지 않았다. 

나로서는 괜찮은 것 그 이상이다. 나샤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를 꼭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인정은 해야지. 나는 가끔씩 또 다른 나를 생각할 때가 있다. 마샬이 죽던 밤 서버에 업로드 된 그 말이다. 내가 은퇴했다는 사실은 그가 존재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할 거라는 뜻이다. 이성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그가 서버 안에 실제로 머물면서 전전긍긍하며 얼른 내가 죽기만을 고대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지금 그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며 서버라는 불확실한 상황에 갇힌 잠재 인간인 것이다. 

내가 은퇴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그가 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만약 혹시.....

새로운 행성에 상륙해서 개척지 탐험을 위해 떠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의 중앙값은 약 200년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그건 별로 오랜 기간이 아니다. 물리부에서는 이미 우리가 어떻게든 시도할 거라고 가정하여 잠재적인 목적지를 찾아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아마 익스펜터블이 필요할 텐데. 그렇겠지?               (P429-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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