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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ching Photographs

Margaret Olin

by 노용헌

acknowledgments

이 책이 보여줄 것처럼, 사진은 사람들과 연결을 만든다. 나에게 사진 초기 몇 년 동안, 나는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집이나 직장에서 그들의 초상화를 찍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거기서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들의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바쁜 인도에서, 사람들은 내가 "햇빛과 그것이 어떻게 떨어졌는지"를 포착하기 위해 나의 뷰 카메라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수다를 떨기 위해 멈췄다. 사진은 예술의 한 형태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또한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진을 만드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학문(Scholarship)은 어슬렁거리기에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사진처럼, 그것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처럼, 장황하고 사치스럽다.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는 시카고에 있는 디자인 연구소에서 이 예술 형태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귀중한 수업을 해주었다. 나중에, 예술 대학 수업의 스튜디오 비평에 참여하면서 사진 실습에 대한 나의 교육이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거의 20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이끌어낸 아이디어를 처음 발전시킨 그곳의, 직원, 학생, 교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몇 년 동안, 내 세미나에서 학생들은 내게 제임스 에이지(James Agee),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그리고 다른 많은 저자들의 글을 읽고 다시 읽었고, 내 생각을 다듬는 것을 도와주었다.


뉴욕 공립 도서관인 숌버그 흑인 자료 도서관(Schomburg Center for Research in Black Culture)의 큐레이터들에게도 감사하다; 할렘 스튜디오 박물관; 해치-빌롭스(Hatch-Billops) 컬렉션과 그 큐레이터인, 제임스 해치(James Hatch)와 카밀 빌롭스(Camille Billops);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수잔 메이셀라스(Susan Meiselas)는 친절하게도 그녀의 스튜디오와 아카이브를 나에게 공개해 주었다; 멕시코, 치아파스Chiapas,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obál de las Casas)에 있는, 원주민 사진 아카이브(Archivo Photográphico Indigena)의 카를로타 두아르테(Carlota Duarte)는 내 질문에 답했고, 린 바르샤프스키(Lynn Warschafsky)와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애넨버그Annenberg 커뮤니케이션 및 저널리즘 학부의 사진 기능 연구소(Institute for Photographic Empowerment)의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카고에 있는 프란시스 W. 파커 학교에서, 크리스틴 베(Christine Beh)와 고(故) 앤 힐스(Ann Hills)가 나의 방문을 도왔다. 나는 <여기 뉴욕Here Is New York>의 주최자인, 찰스 트롭(Charles Traub)과 마이클 슈란(Michael Shulan)에게 감사하다; 전시회에 대한 나의 많은 질문에 대답해준 마크 루벨(Mark Lubell)에게도; 그리고 미키 커(Mickey Kerr)와 티모시 소터(Timothy Soter)에게도, 사진가들은 내가 <여기 뉴욕Here Is New York>에 그들의 제출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와 함께 그것들을 토론했다; 정치교육을 위한 연방 관청(Bundesamt für politische Erziehung)의, 아르네 무테르트(Arne Mutert); 뉴욕 벨뷰Bellevue 병원 센터의, 제임스 사운더스(James N. Saunders)와 테리 마일즈(Terry Miles); 그리고 뉴욕시립박물관의, 사라 헨리(Sarah Henry)이다. 지금은 없어진 맨하탄에 있는 성 빈센트 가톨릭 의료 센터에서, 나는 그들의 시간, 기억, 그리고 그들의 전문 지식에 대해, 최고 선교 책임자인, 미리암 케빈 필립스(Miriam Kevin Phillips) 수녀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미디어 및 정부 관계 책임자인, 마이클 페이건(Michael Fagan); 기록학자, 제임스 리치(James Leach); 그리고 의료 사진가, 리사 펠드먼(Lisa Feldman). 매사추세츠주 앤도버Andover의, 동북문서보존센터(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에서, 앤 러셀(Ann Russell) 전 국장님께 감사드린다; 월터 뉴먼(Walter Newman), 수석 관리인; 그리고 캐롤린 프리사(Carolyn Frisa), 전 관리인.


온타리오, 트렌트 대학에서 컨퍼런스를 위한 청중; 보스턴 대학교; 밀워키Milwaukee에서 위스콘신 대학; 컬럼비아; 예일; 라이스 대학(Rice University); 게티 연구소(Getty Research Institute); 뉴욕 시립 대학교의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 루이빌Louisville의, 스피드 미술관(Speed Art Museum); 암스테르담, 슈테델릭 미술관(Stedelijk Museum Bureau); 뉴욕 대학교의 스토니 브룩(Stony Brook); 아일랜드, 코크 대학교; 토론토 대학; 그리고 코펜하겐 대학은 내 발표에서 모두 나에게 명민한 질문을 던졌다. 이 에세이들 중 일부가 처음 등장한 저널의 독자들도 마찬가지였다(캐서린 버거론(Katherine Bergeron)은 롤랑 바르트의 표현(Representation)에 대한 내 에세이를 읽었다; 다른 사람들은 익명으로 남았다). 이 책의 이슈들을 생각하고 재고하는 데 나와 함께 한 많은 예술가와 학자, 학생, 교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Michele Bogart, Jonathan Bordo, Ann Boyd, Alan Cohen, Bridget Cooks, Paula Duffy, Dan Eisenberg, James Elkins, Jane Gallop, Lydia Goehr, Camara Holloway, Maud Lavin, Elliot G. Mishler, Mary Patton, Kym Pinder, Ellen Rothenberg, Mette Sandbye, Deb Olin Unferth, Susan Ward, 그리고 Heidi C. R. N. Winterburn을 포함한다. 알렉스 막스(Alex Marx)는 9/11 테러 이후의 맨해튼 남부 지역을 안내해 주었고, 그의 경험을 나에게 공유해 주었다. 크리스토퍼 피니(Christopher Pinney)가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를 위해 초안을 차례로 읽어본 것은 원고에 사실상 영향을 미쳤다. 다리오 감보니(Dario Gamboni)는 일부의 초기 초안을 읽은 후 이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나는 또한 이 책에 영향을 준, 그들의 유용한 제안들에 대해 몇몇 익명의 원고 독자들에게도 감사한다.


일련의 연구와 기술적 조수들이 원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했다. 나는 사진 텍스트를 만들기 위한 나의 초기 시도를 도와준, 아미르 베르비크(Amir Berbic)에게 감사한다; 나를 위해 네가티브를 스캔해준, 브래드 파웰(Brad Farwell), 린제이 페이지(Lindsay Page), 그리고 다니엘 에버렛(Daniel Everett)에게도; 그리고 젠 모리스(Jen Morris)에게, 직접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에게도 감사한다. 그들 모두는 나에게 많은 유용한 기술적 정보를 제공했고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조이 어(Joey Orr)는 연구를 도왔고 나의 첫 번째 작업 서지(書誌) 목록을 작성했다. 나의 연구 조수인, 집요한 애비 글로거(Abby Glogower)와 헤더 버뮤렌(Heather Vermeulen)은 실례illustration를 모으는 힘든 일을 도와주었다.

"집요함"은 시카고 대학 출판부의 편집자인, 수잔 비엘스타인(Susan Bielstein)에게도 적용된다. 사진처럼, 책을 쓰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수잔Susan은 몇 년 전에 원고를 받았었고, 여러 차례의 읽기 및 교정을 통해 원고와 –나를- 계속 지원하고 지도했다. 앤서니 버튼(Anthony W. Burton)은 기술적인 문제와, 다른 많은 이슈들에 대해 끈기 있게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산드라 하젤(Sandra Hazel)의 세심한 퇴고(copyediting), 로라 에이비(Laura J. Avey)의 마케팅과 다른 문제들에 대한 도움과, 라이언 리(Ryan Li)의 책의 예술적인 디자인에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책을 쓰고 출판하는 것이 사진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도, 단체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간단히 얻게 되었다. 미국 국립인문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은 지각 이론에 대한 계획된 선집(anthology)에 대해 내게 보조금을 준 적이 있다. 계획이 바뀌었고 의도된 선집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가 했던 연구는 대신 현재의 책을 강화했다. <예술 연구소>는 다양한 교수진 강화 보조금(Faculty Enrichment Grants)으로 내 연구를 지원했고, 나는 이전 학술부 수석 부회장인, 캐롤 베커(Carol Becker)의 지원을 받았다. 예일 대학교 미술사학과는 컬러 일러스트레이션 인쇄 비용에 실질적이고 상당한 금액을 제공했다.


이 책은 두 단체의 본부에서 쓰여졌다. <예술 연구소>에서, 앞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나는 현대미술사, 이론, 비평 부문의 수석 총무 부장(Administrative Director)인, 샤이 드그랜디스(Shay DeGrandis)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시각 및 비평 연구 부서의 총무 부장인, 티나 맥클랜드(Teena McClelland)이다. 나에게 편안하고 환영받는 새로운 단체의 본부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예일 신학교 학장인, 해롤드 아트리지(Harold W. Attridge)에게 감사하고, 예일 대학교 휘트니 인문학 센터장인, 마리아 로사 메노칼(Maria Rosa Menocal)이 나를 멋지게 수용해 주었다. 많은 도움들에 대해, 나는 유대인(Judaic) 연구 프로그램의 수석 총무 보조인, 르네 리드(Renee Reed)와, 예일의 휘트니 인문학 센터의 총무 보조인 크리스티나 안드리오티스(Christina Andriotis)에게 감사하고, 그들은 또한 책에 있는 사진 중 하나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개별 장(章, chapter)의 맥락에서 이 사람들 중 일부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출판 후에야 누락 사실을 알게 될 분들께, 나는 미리 사과드립니다. 나는 또한 나의 인내심 있는 남편과 나의 멋진 아이들인, 벤Ben과 셰바Sheba에게, 그들의 형성기 중 많은 세월을 내가 이 책을 작업하는데 할애했던 것에, 감사하고 미안하다.


metaphors of photography and touch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춘 사진적 그림(photographic picture)들을 조사할 때는, 노인들이 독서에 자주 이용하는 것과 같은, 대형 렌즈(large lens)를 사용하는 것이 추천한다. 이것은 그 대상object을 2~3배로 확대하고, 이전에는 관찰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의 많은 디테일들을 종종 드러낸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벗(William Henry Fox Talbot), <자연의 연필The Pencil of Nature> (1844)

사진은 눈에 보이지만, 사진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가 아니다. 칼로타입(Calotype)의 발명가이자 사진의 선구자인 탈보트Talbot가, 그의 글쓰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는 사진에 돋보기를 들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안경을 눈에 대고, 자신이 선택한 사진의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자세를 조절한다. 이 제스처는, 외관상 사진의 디테일(돋보기는 보는 데 도움이 된다)에 관한 것으로, 사진을 다루는 방법, 얼마나 친밀하게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 몸짓gesture은 사진에 대한 담론을 암시하고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은 렌즈glass를 가지고 가까이 보는 사람들에게 비밀을 제공하는 바위나 화석 같은 표본(標本)인가? 그것은 감식가connoisseur의 캐비닛에 있는 미세한 에칭etching과 같고, 그는 그의 렌즈glass를 사용하여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그것의 확실성authenticity을 조사하는가? 아니면 작은 프린트로 된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스테레오 뷰어(stereo viewer)에서 디지털 액자(picture frame)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보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새로운 장치들은, 또한,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touch에도 사진이 관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진 담론을 공유한다.


터치Touch는 사람들을 사진과 접촉하게 한다; 그러나 사진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됨에 따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거나 –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은유metaphor"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은유가 제공하는 가치를 이행하기 위해, 성공적이든 실패적이든, 사진적 시도의 증거가 된다. “우리 계속 연락하자Let’s stay in touch”라는 표현을 알고 있다. 보통 그것은 누군가가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운이 좋다면,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이 있을 것이다. 사진이 발명된 이래로, 가족들은 그들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돕기 위해 먼 친척들에게 아이들의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면서,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왔다. 다양한 저자들은 마리안 허쉬(Marianne Hirsch)의 적절한 용어인, "가족적 시선familial gaze"에 따라 그러한 사진 작업에 기인하는 성별gender 특이성을 강조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일단 경제적 필요성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유지하는 데 사진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또한 죽은 사람들을 우리의 손아귀 안에 간직하는데, 사진과 사면(死面, death mask)과 같은 현상들 사이의 비교, 죽은 친척들에 대한 묵상, 그리고 죽은 사람들 자신의 초상화에서 반향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새끼고양이와 어린 소녀들의 사진이 “애처로운touching” 것을 발견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명인이나, 잘 알려진 대상object에 대해,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고, "나는 그/그녀/그것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한 친구는 우리에게 그 친밀감closeness으로 찍혀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아마도 "그"를 찍은 사진일 수도 있고, 아마도 "그것" 앞에 자랑하는 친구의 사진일 수도 있다. 종종 우리는 터치touch와 관련된 용어에 도달한다. 우리는 고문torture을 묘사하는 사진을 "보고seeing" "다룰handle"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문들은 탑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든, 외국에서 참수된 우리의 동포들이나, 쓰나미tsunamis나 지진의 희생자들이든, 어떤 사진 주제들을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한다. 때때로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은 사진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은 나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홀로코스트Holocaust 기념 박물관의 가장 끔찍한 사진들과 다른 이미지들 앞에 있는 장벽은 아이들이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때때로 사진은 사람들이 사물thing을 "다루는" 것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사진 자체는 "관리managed"의 의미로, 다뤄져야 한다. 때때로 사진가는 "파견된embedded" 기자나, 테러리스트 동기로 의심되는 사진가와 같이, 관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다룸handling"은 관계가 위태로울 때 종종 발생하고 대개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함께 발생하는 것처럼, 촉각과 시각 사이에서 쉽게 지나가 버린다. 당신의 친구는 그녀가 어떤 남자를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각(視覺, sight)의 느낌은 바로 떠오르는 마음에서 나온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알고, 그녀가 "보고 있는seeing" 남자에게 눈이 멀었다고, 반응할 수도 있다. 만지는(Touching) 것은 맹목적이다. 보는 것(looking)과 만지는 것(touching)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다; 마치 우리가 동시에 둘 다 할 수 없는 것처럼, 두 활동은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교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장 친밀하게 만지는 것을 가장 보고도 못 본 체 한다. 학자Scholar들은 그들의 멋진 이론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종종 장님blind이 된다. 진지한 학자는, 결국, 개인적인 의의(意義, significance)를 가지고 주제를 연구한다. 역사학자들은 과거와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과거를 되살리려고 한다. 마이클 앤 홀리(Michael Ann Holly)는 그림에서 "감촉할 수 있는tactile 가치"를 확인한, 미술사학자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이, 사실은 우화적으로 "그의 갈망이 시간을 가로질러 명화가의 손에 닿기를" 바랬다고 제안한다. 그의 진술된 목적은 이 손들을 식별하기 위해 감촉할 수 있는 가치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 때, 우리가 보게 될 실수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것들을 산만하게 보기 때문에 실수는 피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지각의 한 방식으로서, 산만함distraction은 접촉touch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시각과 촉각을 통해 사유되고, "부차적인 방식으로 대상object을 알아차리는" 건축architecture에 관련된다. 그러나 사진은 신문, 전단지, 포스터, 스크린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종이 환경의 구조architecture이며, 우리가 그것들과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산만함은 그것들과 관련이 있다. 건축과 마찬가지로, 사진의 매체는 크게, 다양한 방식으로, 감촉할 수 있는 감각을 끌어들인다. "빛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의 사진이라는 단어는, 시각과 촉각을 모두 불러일으키고, 그 이름의 두 부분 사이의 차이slippage를 이용함에 있어, 사진은 그것이 어떻게 보이느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과 가질 수 있게 하는 관계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는, 상관적인relational 예술로서 힘을 얻는다.

산만함은 어떤 것을 덜 현실적real으로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디테일은 줄어들 수 있지만, 산만하게 본 표현은 향상된 존재감을 전달할 수 있다. 사진의 존재는 너무 강력해서 우리가 자세히 보는 것에 의해 그것들을 볼 수 없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이해했듯이, 우리가 사람의 눈을 직접 볼 때, 그 시선은 사라진다. 유명한 에세이에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홀바인(Holbein)의 유명한 2인 초상화인 <대사들The Ambassadors>에서 우리가 방을 떠나 우연히 돌아보기 전까지는 두개골skull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한다. 아마도 사진들도 이런 식으로 그들의 비밀을 숨길 것이다. 그리고, 산만한 시각과 함께, 존재감은 우리가 연인의 존재로 인해 혼란스러울 때 저지르는, 실수와 같은,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 부주의와 부수적인 부주의한 실수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관심이 고조시킨 실수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런 실수들은 내가 감촉할 수 있는 봄(looking)이라고 부를 이 책의 탐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실수는 사진의 "만지는 것touching"의 측면이 관계와 교류(community)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의 한 가지 징후symptom일 뿐이다. 실수든 아니든, 감촉할 수 있는 봄의 중요성은, 읽는 것보다 더 행동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낳는다. 대조적으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읽기는 시각적인 보기looking 개념에 의존한다. 사진 이론에 관한 중요한 최근 책의 한 구절은 이 구별을 언급한다. 1972년에 찍은 한 무리의 사진들의 자세와 시선에서, 마리안 허쉬(Marianne Hirsch)는 1970년대 미국의 인종 관계의 기호sign를 읽으며, 이 사진들은 프레시 에어 펀드(Fresh Air Fund)의 후원을 통해 어린 소년을 그들의 가정에 편안하게 통합시킬 수 없는 선의의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는 무능력inability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두 장의 사진은 그 손님과 그의 동갑내기 주인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소년인, 리딕 보우(Riddick Bowe)가, 현재 성장해서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 되어 20년 후에 그 가정을 방문하게 된 것에 대한 한 신문의 기사에 실렸다. "나는 아마도 참가자들 중 누구보다도 이 사진들을 더 주의 깊게 연구할 것이다,"라고 허쉬는 말했다. 그녀가 이 사진들을 주의 깊게 연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좋은 읽기reading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글은 토론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아마도 논쟁disagreement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단순히 그 단어를 더 주목하고 싶은 여기에서는, 어느 쪽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전 프레시 에어 펀드 아동은 2주간의 방문에서 소외된 도시 아동을 통합하기 위한 관대한 가정의 시도에 대한 연구원researcher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미나에서 나올 수 있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부에 관계없이 백인 소년이 도심에서 온 흑인 방문객과 그의 가정의 것들을 공유하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보이거나, 부모가 그들의 아들에게 다른 사람과 공유하도록 요청하는 데 더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 헤비급 챔피언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는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아이고, 내 딸과 똑같이 생겼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것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사진을 연구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하면 사진을 더 "주의 깊게" 연구하거나, 더 강력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은 1907년에, 알프레드 리히바크크(Alfred Lichtwark)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가까운 친구와 친척, 사랑하는 사람의 초상portrait 사진만큼 주의 깊게 본 예술 작품은 없다.” 그 남자와 그의 딸은 보는 행위(The act of looking)로 확인되었다. 우리의 딸, 엄마, 아빠, 또는 형제를 우리 자신의 사진에서 찾기 위해, 눈을 뗄 수 없게, 가족 관계를 굳게 한다.


가족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민박 가정의 자전거와 자신의 사진에 대한 운동선수athlete의 읽기에서처럼 그런 상호교환은, 사진첩의 가족 보기(viewing) 때 자주 일어난다; 보우Bowe의 행동은 가족 사진의 역할에 대한 허쉬Hirsch의 이론과 완벽하게 일치하며, 이에 따르면 그들은 "가족의 시선"을 통해 한 가족이 결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가족이 앨범에 있는 사진을 사용하여 가족의 경계를 설명하고, 여름 손님을 외부인으로 주목한다면, 손님의 손에서 같은 사진이 상호텍스트(intertextual)적이 되어, 보우Bowe가 앨범 안의 사진을 보고 이 앨범 외부의 그의 딸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그러나 아마도 다른 사진일 것이다).

보우Bowe의 발언은 3가지 유사성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사진과 딸 사이, 남자와 딸 사이, 그리고 남자와 그의 사진 사이. 사진이 실제로 그의 딸을 닮을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읽기reading"가 아이들과 부모 사이의 거울과 같은 관계를 행하는 방법보다 덜 중요하다. 2장에서 보게 될 것처럼, 우리가 롤랑 바르트의 초점을 그의 어머니와 나눈 손동작에 대해 탐구할 때,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은 사진이 존재하든, 부재하든, 꾸며지든, 진짜가 아니든지에 관계없이 사진에서 유사성을 찾게 한다. The athlete’s reading, 바르트의 것과 같은, 운동선수의 읽기는, 내가 "수행적performative 지표"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유사성에 의존하지 않는 관계를 수행한다. 이러한 관계적인 의미에서 행동하는 능력은 사진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주의 깊은(attentive) 이라는 용어는, 관계적 연관성과 함께, 보우Bowe와 허쉬Hirsch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의 이미지 읽기는 모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과 유사하다. 허쉬Hirsch는 사진 속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투웨이 미러(two-way mirror)를 통해 사진을 읽지만, 보우Bowe는 그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한다. 허쉬Hirsch가 지적했듯이, 그는 가족의 "중산 계급의 가치"에 대한 관찰에 따라, 어린 시절 자신의 사진을 많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것들-나중에 내가 사진의 습관habitus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습관적인 행동, 즉, 유사성과 정체성을 통해 가족 관계를 강화하는 데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theories of touch and vision

촉각과 시각의 양극(兩極)성은 지각 이론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고 있다. 18세기의 이론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는 우리가 보는 것의 많은 부분이 실제로 우리가 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촉각의 대상object을 시각의 대상과 완전히 구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감촉할 수 있는 대상은 무게와 견고함의 개념을 전달한다. 그것들은 현실reality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 비롯되며, “정신적immaterial인 색과 빛을 전달하는, 시각적 감각의 환상적인 대상들보다 우리 자신의 몸에 이롭거나, 상처를 입히는” 그것들의 큰 능력 때문에, 우리는 시각의 대상을 촉각의 대상으로 식별하는 것을 배우고, 우리는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있다seeing"고 생각한다. 이 개념은 존 로크(John Locke)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이 반응을 "학습learn"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몰리뉴(Molyneux)의 질문”은 주어진 시각이, 가능한 그녀의 촉각을 통해 큐브cube와 구sphere를 구별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 그녀의 새로운 감각을 사용하여 즉시 동일한 구별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18세기에, 선천성 백내장(白內障)을 제거하는 수술의 발전은 이 질문에 대한 실험적인 답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과 유사한 질문들은,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와 다른 사람들의 20세기 이야기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촉감Touch은 엄밀한 테스트(acid test)였고, 시각sight이 아니었다; 감각 팀(sensory team)의 파트너들이 우리에게 지각을 제공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과 달리, 촉각은 "그 자체에 의해 외부성externality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인, 스스로 작동할 수 있다.


일부 계몽주의(Enlightenment) 인물들은 "터치touch"로 그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사상은 근본 원리와 세속적인, 시각의 정신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건드린다.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역사적 용어로 그 철학적 사상을 표현했다: 촉각(touch)은 더 일찍, 더 원시적인 시대에, 시각은 나중에, 고도로 세련된 시대에 번성했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는 그 구별을 발달 심리학 이론으로 바꾸었다. 어린 아이들이 촉각을 통해 시각을 배운다는 그의 이론은 촉각에서 영원한 어린 시절까지 계속 배우는 누군가에게 위탁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로의 도관(導管, conduit)로서의 촉각의 개념은 타당성, 증거, 증명을 전달하기 위해 터치를 예로서 인용하는 일반적인 언어의 은유적 표현에서 살아남는다. "터치touch"는 환유적(換喩的)인 부분이다: 약간의 무언가, 단지 흔적일 뿐, 그것의 터치이다. 그것은 한 사람을 확인하였다: 그녀의 요리는 그녀의 특별한 손길touch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디서든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립 관계(rivalry)를 내포하고 있다: 그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에는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 it was touch and go. 그것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만져서 알 수 있는 이익은 실제적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의 진실genuineness을 시험하고 싶다면, 시금석touchstone을 사용하세요. 이 용어는 감각에 대한 문화적 연구에서 과학적 데이터의 사용에 어려움을 취하는 "시각 기억의eye-minded" 과학적 세계관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과학은 진실의 시금석을 제공할 수 없다.”


순수 예술에서도, 일부 이론가들은 그러한 세속적인earthbound 감각에 대해 거의 기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고급 예술은, 시각적 감각의 영성(靈性)과 상상력을 강조했다; 시각 예술은 적절하게 색상과 빛을 묘사하고 감촉할 수 있는 감각을 제안하는 윤곽outline과 같은 요소의 표현을 회피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겉보기에 영적인 시각의 본질은 인상주의자(impressionist)들과 대부분의 상징주의자(symbolist)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 흔적은 20세기 중반의 비평가들의 작업에 남아있는데, 그들은 광학성(opticality)의 형식적 기준을 사용하여 그러한 예술적 움직임을 추상적 표현주의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모든 야비함(baseness)과 무지함(simplicity)에도, 현실reality과의 직접적이고, 심지어 원시적인, 연결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 이미 18세기 후반에,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는 시각이 철학적이지만, 촉각에 비해, 차갑다는 것을 발견했다. 형태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개념"이다. 19세기 말에,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은 촉각을 "현실의 더 높은 계수(係數, coefficient)"로 칭송했다. 그림의 "감촉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주제의 리얼리티를 전달한다.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는 미술사가이자 촉각touch 이론가인,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두 가지 지각 방식 사이의 정교한 상호 작용을 구상했다. 1908년 독일어로 출판된, 그의 논문, <추상과 공감>은 독일을 훨씬 넘어서 예술가, 문학 이론가, 미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풍부하고 흥미로운 의미, 증거 및 경험의 뒤범벅jumble은 터치touch와 비전vision이라는 용어 사이의 상호 작용에 매달렸다. 터치는 관람자의 터치의 느낌, 예술 작품을 만든 붓이나 끌의 터치, 붓이나 끌을 잡은 예술가의 손에서, 또는 예술가가 도구를 집어 들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감정에 대한 호소appeal를 언급할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이 중시하는 터치touch는 시각vision과 빛과 색의 하루밖에 못 가는 속성, 뿐만 아니라 화가의 붓(터치)을 암시, 양쪽의 방향에서 캔버스 위의 시각적 붓놀림의 형태로 나타낸다. 시청자viewer의 촉각에 호소하는 것은 페인트의 질감이나 표현된 대상의 견고함solidity을 표현할 수 있다. 때때로, 터치는 광학적 "평탄성flatness"과 반대로, 3차원 공간을 의미할 수 있다. 공간에 있는 대상object에 대한 언급은 증거proof의 담론에서 터치의 도움을 얻었고, 견고하고, 실제적이며, 진정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재현적인representational 전략을 정당성을 입증했다.

터치를 언급하기 위해 3차원일 필요는 없다: 촉각과 시각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상징적이었다. 달moon은 만지기touch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18세기의 이론은 달이 그것의 천정(天頂, zenith)에서 보다 지평선 가까이에서 더 크게 보이는 것에 의하면, "달의 착시moon illusion"의 근원을 우리가 보는 이해할 수 없는 빛과 색깔에 기초한, 더 세속적인 것과 같이, 감촉할 수 있는 판단으로 추적했다. 만약 이 해독하기 어려운 광학적 기호sign들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감촉할 수 있는 지각(知覺, sensation)의 기호가 된다면, 이론에 따르면, 그때,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결코 만지고touch 싶지 않은 대상의 크기와 모양을, 시각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결과(consequence)는 주제subject가 실재하거나 상상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베렌슨(Berenson)이 독자들이 유화(oil painting)를 그들의 손가락으로 따라 움직이지 않고 감촉할 수 있는 가치를 테스트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터치는 비표현적(non-representational) 예술을 언급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물감의 터치는 추상적 표현주의의 두 이론들 사이의 갈등의 현장이 되었다.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는 그림을 어떤 행동의 기호sign가 물감으로 남아있는 장소arena로 보는 반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같은 물감을 시각적optical인 것의 표현manifestation으로서 보았다. 그 혼동은 벤야민의 산만함distraction의 개념에 이미 내재하는 문제equation를 설명한다: 만지는 것touching은 보는 것seeing이다.


이것은 촉각과 시각의 개념이 때때로 풀기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촉각과 시각의 능동적이고 통합된coordinated 사용을 고려하기 위해 우리가 추적해온 촉각과 시각의 상호성(reciprocity)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는 버클리Berkeley와 로크Locke가 가정했던 것처럼, 터치touch 그 자체가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가 "조작적operational"이라고 부르는 이성적 일반화의 더 높은 단계를 향해 지각적인 기반으로 지능이 상승하는 것에 의한 계층hierarchy의 탓으로 돌렸다. 다른 사상가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는, "조작적 사고operational thinking"에 대한 피아제Piaget의 특권을 무시했지만, 지각의 개념을 세계에 대한 구체화된 관계의 신호signaling로서 공식화하기 위해 지각에서의 적극적인 탐구의 역할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확장했다. 세상을 지각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은 항상 관계적이다. 거리와 크기에 대한 우리의 추정과 같은, 일상적인 판단에서도, 대상의 리얼리티, 즉 독립적인 존재는, 우리가 그 대상과 가질 수 있는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는 무언가가 "우리의 시선의 손아귀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그것과 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것으로 판단한다.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경우, 시각과 촉각은 실제 경험에서 서로 교환할 수 있다: “우리가 마침내 우리의 감각을 구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인체 과학의 결과일 뿐이다. 살아있는 물체object는 감각의 기여에 기초하여 재발견되거나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부터 이러한 기여contribution가 발산되는 것에서의 중심으로 우리에게 그 자체를 나타낸다.”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는 지각에서 관계의 상속인 지정(entailment)을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현상학적 설명에 접근했지만, 결국 시각과 촉각의 담론은 감소했고, 이는 " 시선gaze"의 담론으로 대체되었다. 그 시선은 우리가 어떻게 알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거나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까지 지각 이론의 변화를 나타냈다. 터치라는 용어는 이 담론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고, 최근까지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의 측면들은 새로운 형태로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쌍방향성(Interactivity)은, 시청자viewer 또는 사용자에게 힘power의 감각을 제공하기 위해, 그것이 나타내는 선택에서, 외관상seeming의, 시청자의 촉각에 호소한다. 우리가 웹사이트에서 이미지를 클릭할 때, 그것들은 더 커지거나 다른 이미지에 자리를 내준다. 온라인 또는 컴퓨터 지원 설치를 통해 시청자는 이미지를 클릭하여 식물에 조명을 제공하거나, 갤러리에서 물체를 이동하거나, 작은 유기체를 설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쌍방향성은 보는 사람을 수동적인 소비자보다는 오히려 수행자performer인, 행위자와 사용자로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렇게 하는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시청자에게 부여된 "권한authority"은 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일 수 있다; 시청자의 선택을 좁히는 패턴화된 행동을 통해, 시청자는 지휘자commander가 된 저자에 의해 지휘하거나 단지 안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권한이 하지 못하는 것은, 표현된 대상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가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접근을 허가하는 문지기gatekeeper로서보다 그의 부하underling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상사chief와 닮았다. "쌍방향성"은 예술의 호소appeal를 높이기 위해 도입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드물게 또는 결코 그것의 재현적인(representational) 권한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촉각의 전환diversion은, 시선의 담론과 쌍방향성에 의해 무시된 인식론적 질문을 예술 세계의 언어에서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터치 자체는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에서 부정확하게 차용한, 지표index라는 용어 안에 숨겨져 있었고, 수십 년 전에 진정성authenticity에 권한을 주는 터치의 기능을 권한 없이 부정하게 사용했었다. 퍼스의 가장 일반적인 단순화에서, 지표는 도상icon과 구별되는데, 후자는 유사성을 통해 대상object을 표현하는 반면, 전자는 접촉contact을 통해 대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의 대상을 가리키거나, 그것 자체가 그것의 대상에 의해 만들어진, 흔적 또는 표시이다. 그림에 그려진 닮음likeness은 도상icon이다. 그래서, 특정한 조건하에서, 도해diagram가 된다. 지문이나 풍향계는 지표이다. 물건item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표적(indexical) 표현이 거기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종종 지표가 도상보다 본질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인 단어를 대체하기 위해 철학과 수사(修辭)학에서 나온, 지표성의 기술적 담론은, 즉각적인 터치의 동물성(physicality)을 잃는다. 따라서, 지표라는 용어가 터치의 권한을 침해함에 따라, 그것은 또한 개념을 이탈시킨다: 그녀의 "터치"라기 보다 오히려, 예술가의 "지표"를 언급하는 것은, 예술가의 손, 또는 그림의 행위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본능적visceral 이론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지표에 대한 이론은 적어도 은연중에 터치의 리얼리티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만약 사람들이 보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터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우리가 본 것이 만져질 수 있을 정도로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달moon과 같은 관념은 만져질 수 없지만, 우리는 시각vision과 연결된 관념을 더 믿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지표는 그 근거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터치가 언어의 영역에 남아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터치의 담론에 기여했다. 시각적 표현에서, 터치는, 베렌슨Berenson의 "감촉할 수 있는" 가치의 이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감각이 아니라 하나의 시니피앙(signifier)이다. 그러나, 언어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지표적 이론은 터치를 일종의 읽기reading로 바꾼다.

따라서, 지표를 문제 삼고 그 문제가 되는 것을 논하는 글writing은 촉각의 한계도 보여준다. 지표로 위장한 터치의 담론은 어떤 기호sign가 어떤 것이 진짜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납득이 가도록 드러낸다. 지표가 터치의 권한을 무너뜨릴 때, 그것은 모든 권한에 의문을 제기한다.


photography: a gestural practice

터치의 은유가 사진을 몸짓gestural의 실천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가 그의 칼로타입Calotype에 가깝게 가져온 돋보기를 사용한 제스처gesture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 사진을 둘러싸는 많은 일상적인 제스처 중 하나일 뿐이며, 만드는 것부터 보는 것까지, 모든 수준의 사진 실천에서 실행되었다.

화가가 공간, 사물, 사람, 아이디어를 묘사하기 위해 캔버스에서 붓으로 제스처를 취하고, 강사lecturer가 청중에게 아이디어를 묘사하거나 청취자와 연결하기 위해 제스처를 취하듯이, 그래서 사진의 제스처는 아이디어와 사물을 묘사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카메라로 그들의 만남을 중재한다고 관광객들을 조롱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카메라로 제스처를 취하면서, 실제로 그들의 렌즈를 통해 만남을 추구한다. 사진을 찍는 것은 관계를 행동으로 옮긴다. 그 제스처가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광객이든, 어쩌면 학생scholar이든 간에, 전통적인 35밀리 사진가의 바쁜 몸짓은, 마치 사진을 찍을 외부 세계가 없는 것처럼 그녀의 카메라의 장점들에 대해 외관상 계획하는 듯한 디지털 사진가의 초연한 몸짓이나, 휴대폰 카메라 여성의 경직된 위풍당당한 몸짓과는 다르다. 때때로 멍한 친구는 그의 동료에게 너무 집중해서 그의 카메라를 제대로 장착하는 것을 잊는다. 그러한 사진 촬영(picture-taking) 장면의 사진은 이 사례의 불운한 카메라맨, 위베르 다미쉬(Hubert Damisch)에 의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 대한 매혹적인 일련의 성찰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사진 제스처는 사진의 주제가 아니다. 화가의 붓놀림이나, 잭슨 폴록의 "드립drip"과 달리, 비록 보는 사람이 파노라마 같은 산 풍경이나 소름끼치는 전시wartime 장면의 클로즈업 사진을 보면서,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동안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지만, 사진 제스처는 보통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러한 묵상musing에 대한 반응으로, 사진가들의 영웅적인 묘사는 때때로 절벽 끝에서 천으로 덮인(cloth-covered) 뷰 카메라 뒤에서 균형을 잡거나 전투 장비를 착용하고 연기로 가득 찬 공기 속에서 라이카를 조작하는 사진가를 보여준다. 일부 사진 제스처만이 프린트에 기록되며, 일반적으로 시점(point of view), 암실에서 수행된 조작하는 제스처, 또는 마우스의 널빤지(Ouija-board) 서행creep을 나타낸다. 사진가에 대한 반응은 또한, 낯선 사람의 카메라에 대한 동료 관광객의 무의식적인 미소, 생일 파티에서 어머니의 카메라에 대한 "치즈cheese"를 외치는 입, 또는 사진가를 피하는 모자나 손과 같이, 기록될 수 있다. 그런 반응들은 아무리 엄격하게 읽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밖의 다른 사람들 중에, 루시아 모홀리(Lucia Moholy)와 소피 칼(Sophie Calle)은, 익살스러운 효과를 위해 그런 관습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사진 제스처는 사진 작업이 단순히 세상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스처는 사진을 사람들처럼 세상을 살고 있는 존재로 바꾸고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그 안에서 행동한다. 사진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집중된, 전문 사진가들은, 종종 영화 감독들처럼, 팀team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화가처럼, 스스로 작업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 사진가들도, 사회community에 달려 있다. 종종 사회community 자체가 사진으로 표현된다. 대니 시모어(Danny Seymour)에서 래리 클라크(Larry Clark) 또는 난 골딘(Nan Goldin)에 이르는 예술 사진가들은 사진적 실행을 사진 일기나 친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언급하는 공동의 행위(communal act)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사진가들의 작품이나 사진이 어떻게 사회를 표현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대신에, 사진이 어떻게 관계와 커뮤니티community에 참여하고 만들어지는지를 조사하고, 커뮤니티가 사진을 중심으로 어떻게 모이는 지를 탐구한다. 스냅샷 사진가들도, 최소한 사진을 찍으면서, 어느 정도는 그들 스스로 작업을 하고, 그들이 포함된 사회에서 생산되는 사진 작업에 관여한다. 사진 활동은 "관광객" 또는 "가족" 나들이의 "사진촬영 기회"에서부터, 진지한 취미 활동가나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심한 준비, 보험 대리인과 형사에 의해 찍힌 스냅샷, 박물관 벽에 있는 큐레이터에 의해 만들어진 전시물, 또는 기록 보관함에서의 수집가에 의해 만들어진 준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적으로 인정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나는 사진을 찍거나, 포즈를 취하거나, 잡지, 벽, 또는 Flickr.com와 같은 웹사이트에서 사진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들은 사람들이 사진에 대해 갖는 기대, 사진을 찍거나 포즈를 취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진이 그 의미를 획득하거나 그들의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진적 관습이다.

사진을 둘러싼 이러한 행동들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그들의 "아비투스habitu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의 "실천 이론의 개요"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그 개념은 사회학자가 습관의 중요성을 획일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검토할 수 있게 한다: 특정한 배우들은 그들의 문화 안에서 대가virtuoso가 되면서, 침착하게 특정한 종류의 습관적인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가는 거장일 수도 있지만, 사진의 습관(habitus)은 일반적인 사진을 둘러싼 행동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사회적 기능을 중심으로 관계된다.

10대의 소녀가 핸드폰을 팔을 뻗고 들고 화면에 자신을 담고 남자친구에게 이미지를 전달할 때,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에게 선물로 자신을 순간이동시키면서, 받아들여지는 구애courtship 행동의 장르를 공연enact하는 것이다. 그 이미지 자체가 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이미지를 손에 쥐고 있으면, 그는 그것을 지우는 것을 꺼릴 수도 있고, 간절히 원할 수도 있다. 문맥context에 의해 가능해진, 사진은 문맥 그 이상이다: 그것들은 서로와 보는 사람을 만진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대신한다. 그것들은 다뤄질 수 있고, 심지어 요구할 수도 있다. 많이 다루었던 사진이 희미해질 때, 그것을 갖다 버릴 용기를 내기가 어려울 수 있다. 사진은 우리 사회community의 일부이다.


이 10대의 휴대폰 사진은 그녀의 애정에 대한 증거일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의 대리 동료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진은 증언witnessing의 언어와 지표의 언어를 결합한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사진이 증언의 담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장했다. 저항의 행위로서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스실 사진 4장을 쓰면서, 역사학자들이 그것들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고 그는 주장한다. 증언의 존재론에서, 사진이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진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그것의 디테일의 부족을 폄하하거나, 또는 그것의 증언testimony을 완전히 거부하는, 너무 적은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진의 지표성(indexicality)을 고려할 때, 사진이 실제로 그것이 묘사하는 것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유혹적이지만, 사진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간주하는 것 또한 유혹적이다. 디디 위베르만(Didi-Huberman)의 설명에 따르면,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 두 극단 사이를 중재하며, 사진에 어느 정도 진정성(authenticity)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야곱이 야곱의 아내들인, 레아Leah와 라헬Rachel의 아버지 라반Laban과의 약속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위 더미와 사진이 같다고 주장하면서, 사진 관행이 증언으로서 어떤 행동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야곱이 그 장소를 갈르엣Galeed, 또는 "증거의 더미heap"라고 이름 짓게 한 바위들은, 성경적인 계약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배치하는 행위가 있은 후, 그것들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고, 단지 장소를 표시할 뿐이었다. 스냅샷처럼, 그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필수적일 뿐이었다. 이 바위 더미는 때때로 "나무 조각이나 가공되지 않은 조약돌"로만 구성되는 추링가churinga, 돌 또는 나무 조령상(祖靈像, ancestor figure)과 유사하며, 클로드 레비-스트라우스(Claude Lévi-Strauss)는 “우리가 귀중품 상자(strongbox)에 비밀로 숨기거나 변호사의 보관에 맡긴 기록 보관소와 비교하여 신성한 것으로 인해 때때로 주의를 기울여 조사하는 것이다.” 사진은, 기록 보관소의 물건object들처럼, "역사에 물질적 존재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 계약pact의 닮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로서 그것의 자격에서, 더미나 조약돌과 같은 것이다. 내가 보여드릴 것처럼, 우리는 사진을 그들의 표현, 닮음, 묘사 능력뿐만 아니라, 지표적으로 가리키는 능력을 기대하기 위해 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진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는 방법보다 그들의 아비투스habitus에 덜 중심적일 수 있다. 또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거부하거나, 실망하거나, 단순히 보지 않는 지이다. 일단 사진이 찍히면, 우리 세계에서 시각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진을 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사진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들은 시각적인 존재, 환상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심상(心象, visuality)을 가진, 물질적인 대상object이기도 하다. 사진 작업의 이러한 "터치한다는 것touching"의 특성은 개인, 대인 관계 및 커뮤니티 전반에 걸쳐 있다.

plan of the book

사진 작업은 사진가, 그들의 피사체, 사진을 수집하는 단체와 사람들, 그리고 사진 기관을 포함한다. 이 책은 이러한 "대리인agent"들 사이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장(章, chapter)은 다른 장들과 다르게 읽힌다. 여기서는 사진의 존재론이나 사진이나 사진사적 방법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시도되지 않지만, 오히려 사진이 재현적인 역할을 넘어, 커뮤니티와 관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다양한 방식으로의 일련의 침해inroad가 시도된다. 때로는 워커 에반스(Walker Evans)나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W. G. Sebald)의 허구적인 사진가, 자크 아우스터리츠(Jacques Austerlitz)와 같이, 텍스트의 초점을 맞춘, 사회적 배우나 에이전트가, 사진가인 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에이전트agent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처럼, 보는 사람(viewer)이다. 때때로 에이전시agency는 제임스 반데르지(James VanDerZee)의 할렘에 대한, 4장에서와 같이, 사진가에서 고객으로 기관이나 학술 시청자로 이동한다. 에이전시는 항상 독립성과 통제를 수반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에이전시를 위한 고투struggle는 다른 것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어떤 장들과 관련이 있다. 사진가 워커 에반스의 기획사(agency)는 주제subject에 대한 통제를 줄이는 반면, 다양한 기관, 저자, 시청자의 기획사는 사진가 제임스 반데르지가 그의 사진들을 수용reception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한다. 아마도 놀랄 것도 없이, 사진 권한 부여(empowerment)의 다양성에 관한 5장은, "사진 권한 부여"라는 표현 자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권력 관계의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모든 연구는 대인관계 분야에서, 사진이 어떻게 표현하기보다는 행동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집중한다.


주제는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사진의 사용에서 사진이 더 큰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고, 사진 그룹 자체가 그러한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생각으로 대략 이동한다. 나는 사회적, 공동체적, 더 큰 역사적 힘이 모든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략(槪略)적"이라고 쓰지만, 여기서 논의되는 알려져 있지 않은 사회적 힘은 개인들이 가지고 있거나 영향을 가지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렌즈를 제스처, 터치, 그리고 그것들의 은유를 포함하는 사진 작업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는 이제 더 가까이, 더 멀리 이동한다. 1장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와 제임스 에이지(James Agee)의 사진-텍스트 '이제 유명인들을 찬양하자Let Us Now Praise Famous Men'에 대해서, 시청자viewer와 사진의 일대일 관계를 통해 사회적 실천주의와 미학적 모더니즘을 융합하기 위해 텍스트와 이미지에 사용된 시선gaze의 개념을 조사한다. 그것은 이 작업을 미학적 자율성과 예술과 삶의 결합이라는, 두 모더니즘 담론 사이의 노력의 중요한 예로 검토한다. 2장은 사진으로 식별하는 것과 식별하는 것 사이의 우려되는 관계를 검토하면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수행적 지표performative index'라는 개념을 도입해, 사진과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가 왜 그것들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들의 지표성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오스트리아 문학의 학자인,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W. G. Sebald)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시인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로부터 이미지의 힘에 대한 사진 사상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살펴본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의 소설이 인식론적 개념과 사진에 대한 동반적companionable 개념 사이의 차이를 가지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려준다.


4장에서는, 초점focus이 더 큰 커뮤니티 내 또는 주변의 상호작용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전유(專有, appropriation)에 대한 반데르지(VanDerZee)의 유효성이 어떻게 그의 작품이 다양한 시리즈의 방문자visitor들을 위해 상상된 할렘의 심상(心象, visualization)의 원천과 지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5장은 카메라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고 공유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접근access을 제공하며, 사진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알아봄으로써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empower"하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6장의 주제인, 2001년 9월 11일 뉴욕시의 테러리스트 공격 이후 사진 관행은, 의식ritual과 사진의 개념이 실로 가공할 만한 사건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사람들이 사진을 사용하여 시도하는 방법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보다 복잡한 최근의 예들 중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이전 5장의 아이디어에서 끌어낸다. 새로운 상황은 이용할 수 있는 사진 작업에 압력을 가했고 새로운 것의 도입을 요구했다. 아마추어와 전문가 모두에 의한 사진 활동들과, 유포에 대한 이미지들의 세 번의 간단한 토론 후, 이러한 사건event들의 두 가지 주요 "이야기들stories"은 그 사건 직후 혁신적인 사진 전시회로 착수된다. 그것들 중 하나는 <할렘 온 마이 마인드Harlem on My Mind>와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회의 아이디어와 사진 권한 부여의 개념을 결합한다. 그것의 축적된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사진에서 "배킹basking"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한다. 또 다른 '스토리story'는, '행방불명자들missing'의 자발적인 전시의 전단flyer지에 대한 논의로, 이러한 전단지를 전시하고 보존해야 했던 사람들이 겪는 딜레마를 파헤친다. 이러한 딜레마들은 사진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핵심에 주어진다.


나는 책에서 논의된 많은 사진 작업들이 커뮤니티를 결속시키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필로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도취감euphoria을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우리가 혐오나 적의를 일으키는 예쁘지 않은 사진의 불필요한 관심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이 학대받는 소작농, 제3세계 고아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고문의 가해자일 때 사진과의 공감(identification)은 어떻게 작용할까?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가 사진에 확대경을 가져갔을 때, 그는 그 순간의 현실reality에 대한 증거, 예를 들어, "그 뷰view가 찍힌 그날의 시간"을,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다수의 지나치게 세세한 디테일"을 찾았다. 향후 몇 년간, 사진은, 인식론적 도구에서 동반자와 목격자로 점점 더 바뀌면서, 사용자와 제작자들은 그것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고, 더 다른, 더 관계적인 현실reality을 요구했다. 그런 종류의 현실reality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실제real 또는 은유적으로, 확대경(magnifying glass)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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