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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era Lucida

Roland Barthes

by 노용헌

PART ONE

1. Specialty of the photograph

1852년 나폴레옹(Napoleon)의 막내 동생 사진을 본, 바르트(Barthes)는 자신이 ‘...황제를 바라보는 눈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p.3). 아무도 그의 놀라움을 공유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는 사진을 다른 이미지와 분리시키는 ‘근본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영화(Cinema)와 반대되는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The photograph unclassifiable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전문가/아마추어, 주제 또는 움직임으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실패한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 주제의 표면(external)에 있고 다른 오래된 이미지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기계적으로 한 번만 일어난 무한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반복될 수 없다. 게다가, 사진은 시청자를 다른 곳으로 이끌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그 주제로 돌아간다. 다른 이미지와 달리, 사진은 항상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보여주고, 그것은 ‘... 무중력의 투명한 덮개(envelope)’(p.5)로, 그것이 나타내는 것, 즉 ‘지시 대상(referent)’과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적어도 그 즉시는 아니다).

사진의 시니피앙(signifier)을 보려면 두 번째 단계의 숙고가 필요하고 왜냐하면 사진에는 무언가 동어반복(tautological)이 있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으로서 사진은 그것의 지시 대상(referent)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두 부분 모두 파괴하지 않고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적층(laminated) 대상’의 한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우선 ‘... 대상(object)의 큰 혼란(disorder) 속에서 사진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어떤 것이 없으면 사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특정 순간이나 대상이 촬영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일 사진이 기호(sign)가 되려면 자국(mark)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자국(mark)이 없고, 항상 눈에 보이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지시 대상(주제)의 지속성 때문에, 사진을 이해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매우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기술적인 측면을 가까이서 보는 것부터 역사적 또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사진의 전체성을 멀리서 보는 것까지 시도한다. 바르트(Barthes)는 어느 집단(集團)도 ‘... 나에게 흥미로운 사진들을 정확히 논의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나에게 기쁨이나 감정을 준다 ... 나는 오직 지시 대상물, 원하던 대상(object), 사랑하는 몸만 보았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학적 비평을 멀리한, 그는 ‘... 문화(culture)가 없이, 본원적’이 되고 싶었다.


3. Emotion as departure

바르트(Barthes)는 사진에 대한 딜레마가 표현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를 반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는 어떤 형태의 환원주의(reductionism)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사진을 뒷받침하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을 찾기 위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몇 장의 사진들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4. Operator, spectum and spectator

사진은 ‘해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 봐야 할 것’이라는 세 가지 것들을 필요로 한다. 사진가는 조작자(operator), 보는 사람, 관찰자(spectator)이고, 촬영된 것은 스펙텀(spectum)이고, 이것은 ‘광경(spectacle)’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용어로, 모든 사진에는 ‘죽은 자의 귀환’이 있기 때문에 적절하다. 바르트(Barthes)는 아마추어로서도 조작자로서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감정을 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5. He who is photographed

바르트(Barthes)는 자신도 모르게 찍혀진 사진을 다루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내키는 대로 하고 싶었고 그래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경험을 다루었다. 그는 사진이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포즈를 취하며, 적극적으로 그 자신이 이미지로 바뀌었고, 그 사진이 자신의 몸을 창조하거나 죽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지적한다. 비록 은유적으로만 사진가에게 그의 존재를 빚지고 있었지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서 그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고귀한 표현을 원했지만, ‘미묘한 도덕적 질감(texture)’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기술(skill)은 오직 위대한 사진가들에게서만 발견되며 일반적인 사진에서는 미묘하지 않다. 그는 게임을 하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시청자가 알기를 원했고, 그는 자신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자신의 개성의 ‘귀중한 본질’을 바꾸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상황이나 나이에도, 그의 사진들은 항상 무겁고 정지되어 있고, 그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게 가볍고 분산되어 있었다.

사진 이전에는, 초상화가 일반적으로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부(富)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켰지만, 바라봄(looking)의 역사는 없다. ‘... 사진은 나 자신과 같은 타인의 출현이다: 정체성(identity)으로부터 의식의 교묘한 분리이다’(p.12).

자신의 존재가 소유자임(ownership)에 기반한 문화에서, 사진은 피사체를 대상(object)으로 바꾸어 문제를 발생시키고, 바르트(Barthes)는 ‘경관(landscape)은 단지 지형의 소유자가 빌려준 일종의 대차물(loan)일 뿐인가?’라고 묻는다(p.13).

초상(portrait) 사진에는, 네 가지 상반되고 상호 관련된 힘이 있다; ‘... 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것, 사진가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데 그가 사용하는 것’(p.13). 그 결과, 바르트(Barthes)가 사진에 찍힐 때마다 그는 자신을 모방했고 ‘진정성 없는 기분’을 느꼈다. 바르트(Barthes)에게, 사진은 그가 주체도 객체도 아닌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변화하는 순간을 나타내며, 그는 관찰자(spectator)가 되면서, 미시적(micro-version) 죽음을 경험한다. 사진가가 사진을 살아 있는 것처럼 하려는 일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일한 얼굴로 읽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르트(Barthes)는 사회가 그 사진을 어떻게 읽을지 알지 못했다. 그는 ‘전체-이미지(Total-Image)가 ...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Death); 다른 사람들은 ... 나를 변화시켰고... 한 대상(object)으로 ... 한 파일(file)로 분류되었고, 아주 미묘한 가짜(deception)에 대해 준비된 ...’것이 되었다(p.14). 바르트(Barthes)는 최근 사별의 아픔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만족스러웠던 사진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누군가가 그 사진을 사용하여 팸플릿에 넣었고, 인쇄를 통해 그는 이제 불길해 보였다. 그는 ‘(‘사생활’은 단지 그 공간의 영역에 불과하다 ... 내가 이미지나 대상(object)이 아닌 곳에서. 내가 보호해야 할 주체(subject)가 되는 것은 나의 정치적 권리이다.)’라고 결론지었다(p.15).

바르트(Barthes)는 사진에서 죽음을 찾고 있고, 왜냐하면 그는 죽음이 사진의 ‘형상(eidos)’,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진의 죽음 같은 본질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셔터 소리뿐이다.


6. The spectator: chaos of tastes

관찰자(spectator)로서, 바르트(Barthes)는 모든 실행과 주제(subject)가 뒤섞인, 사진의 무질서를 재발견했다. 사진들은 어디에나 있으며(도처에나 있는) 초대받지 않고 그의 삶에 들어왔다. 그는 ‘문화(culture)’가 좋다고 여겨지는 사진들에 대해서도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앗제(Atget)의 나무, 피에르 부셰(Pierre Boucher)의 누드, 제르맨 크륄(Germaine Krull)의 이중 노출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어떤 한 사람의 사진가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좋아했던 유일한 스티글리츠 사진은 ‘마차 터미널’이었다. 뉴욕, 1893). 역사에서 매우 유용한, 예술가의 스타일과 미학은 사진이 ‘불확실한’ 예술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르트(Barthes)는 자신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호불호가 불분명하다고 느꼈다.


7. Photography as adventure

바르트(Barthes)는 여러 장의 사진들에 매료되었다는 확신이 들었고, 이를 분석의 지침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력의 종류는 —매혹, 흥미, 놀라움, 감탄 등— 다양했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특정 사진이 그에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유를 여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매력을 명명하기 위해 그는 ‘편의성(advenience)’과 ‘진귀한 경험(adventur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강력한 그림(picture)은 ‘출현(advene)’이 될 것이다.

바르트(Barthes)는 사르트르(Sartre)의 말을 인용하여 많은 신문 사진들에 냉담할 수 있는지를, ‘... 인식의 해안 사이, 기호와 이미지 사이, 어느 쪽에도 접근하지 않고 표류하는지’를 설명한다(p.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바르트(Barthes)는 여전히 자신에게 생기를 주는 사진을 찾아서 그것들의 생기(animate)를 주고, 그래서 그는 그 매력을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고 명명한다.


8. A casual phenomenology

[현상학자에게 물질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는 진술은 감각을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의 본질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에서, 바르트(Barthes)는 현상학과 그 언어를 차용했지만, 그는 ‘... 사진의 예상되는 본질이, 언뜻 보기에, ‘파토스(pathos)’와 분리될 수 없도록... 그것이 이루어져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이 작업을 수행했다(p.21). 그는 감정적이었고 질문이 아니라, 상처로서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


9. Duality

사진이 있는 잡지를 살펴보던 중, 1979년 니카라과(Nicaragua) 내전 당시 코엔 웨싱(Koen Wessing)이 찍은 사진을 보고 바르트(Barthes)는 잠시 눈길을 멈췄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진귀한 경험(adventure)’이라는 것이 사진에 담긴 이중성(duality)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명의 군인이 잔해가 쌓인 거리를 순찰하고, 그 뒤에는 두 명의 수녀가 길을 건너간다. 수녀와 군인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두 가지 ‘불연속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그에게 구조적 규칙을 제안했고, 그는 웨싱(Wessing)의 다른 이미지들을 살펴보며 이중성이 그를 다른 사진들로 끌어들이는지를 확인했다. 그는 폭동(rebellion)이 사진적으로 진부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유형의 이중성이 그를 몇몇 사진들에 매료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분오열하는 거리에 누워 있는 시트(sheet)로 덮인, 아이의 시신 사진에 대해, 그는 ‘... 몇 가지 간섭(interference)들을 지적했다: 시신의 한쪽 맨발, 눈물을 흘리는 엄마가 들고 있는 시트(이 시트는 왜?), 배경에 있는 여자, 아마도 친구가, 손수건을 그녀의 코에 대고 있는 것 등’(pp.23, 24). 다른 사진들은 ‘... 폭동의 존엄과 공포...’를 표현했지만, 그에게 그것들은 아무런 특징(mark)이나 기호(sign)가 없었고, 그것들의 동질성(homogeneity)은 문화적이었다.


10. Studium and punctum

그는 이 사진들에 끌리게 된 두 가지 요소를 명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문화, 폭동과 니카라과의 개념, 그리고 그 기호들, 폐허가 된 거리, 시체, 태양 등과 관련된 일련의 지식을 언급했다. 이 분야의 수천 장의 사진 중에서 바르트(Barthes)는 그 자신에게 흥미를 가지게 했던 것이 ‘...감정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화의 합리적인 매개(intermediary)를 필요로 한다’고 느낀다(p.26). 그는 이 일반적인 효과를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문화적 함의(connotation)를 가지며 ‘숙고하다(study)’라는 간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studium)을 부러뜨리거나 중단시킨다. 바르트(Barthes)는 이 요소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것은 화살처럼 그를 찔렀다. 그가 이것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단어는 ‘푼크툼(punctum)’이다. 이 라틴어 단어는 상처나 찌름을 나타내지만, 구두점(punctuation)을 가리키기도 하므로 바르트(Barthes)에게 매우 적합하다. 그는 ‘사진의 푼크툼(punctum)은 나를 찌르는 상해(하지만 나를 멍이 들게 하기도 하고, 가슴 아프게도 한다)’라고 결론지었다(p.27).


11. Studium

바르트(Barthes)는 대부분의 사진이 그에게 ‘비활성(inert)’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관심 있는 사진조차도 대부분 ‘고상한(polite)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 그것들은 푼크툼(punctum)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괜찮다(all right)’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상태(order)인, 스투디움(studium) 영역에 속해 있었다.

스투디움(studium)을 인식할 때, 관찰자(spectator)는 사진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창작자와 소비자 간의 문화적 계약의 일부이며, 그것은 관찰자가 조작자(사진가)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바르트(Barthes)는 사진가의 의도를 ‘... 사진과 사회를 조화시키는 것 ...’을 목표로 한 신화(myth)라고 설명한다(p.28). 사진의 기능(그리고 바르트는 그것들을 사진가의 구실로 간주한다)은: ‘... 알리고, 표현하고, 놀라게 하고, 영향을 끼치는 원인이 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p.28). 관찰자는 그것들에 스투디움(studium)을 투자하지만, 푼크툼(punctum)은 투자하지 않는다.


12. To inform

텍스트가 한 단어만 바꾸면 묘사에서 반영으로 바뀔 수 있는 것과 달리, 사진은 항상 그것이 나타내는 것에 의존하며, 민족지학적(ethnographical) 지식의 자료인, 디테일들을 항상 보여준다. 바르트(Barthes)는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1959년 모스크바 노동절 사진을 언급하면서,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옷을 입는지에 대해 그에게 어떻게 알려주는지를 지적한다. 사진은 이러한 작은 디테일을 회화보다 훨씬 더 잘 보여주며, 바르트(Barthes)는 특히 이러한 종류의 지식을 좋아했다.


13. To paint

회화는 사진의 절대적인 외연(reference)으로, ‘... 회화의 유령에 의해 고통 받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p.30). 바르트(Barthes)는 메이플소프(Mapplethorpe)가 식물(iris) 줄기를 나타내는 방식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동양 화가처럼, 그리고 그의 연구 시점에서, 바르트(Barthes)는 회화와 사진 사이에 명확한 시각적 구별이 없다.

하지만 바르트(Barthes)는 극장(Theatre)을 통해 사진이 예술과 관련이 있다고 느낀다. 그는 사진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다게르(Daguerre)가 파노라마 극장을 운영했으며,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가 원근법 회화, 사진, 디오라마(diorama) 등, 무대 예술을 담당했다고 지적한다. 바르트(Barthes)는 가장 중요한 연관성을 죽음(Death)과의 관계로 인식한다. 바르트(Barthes)는 여러 문화권에서 죽음과 극장 사이의 관계를 나열한다. 그는 사진 속에서 동일한 관계를 보고 사진 속 ‘살아 있는 듯한(lifelike) 것’을 보려고 노력하며, ‘... 죽음의 불안에 대한 우리의 신화적 부정 ... 사진은 일종의 본원적인 극장이고 ... 우리가 죽은 자를 보는 이면에 움직이지 않고 화장된 얼굴의 형상’으로 본다(p.32).


14. To surprise

바르트(Barthes)는 조작자의 핵심 제스처가 깜짝 놀라거나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느낀다(이것은 푼크툼과는 다르다). 이것은 다섯 가지 방식 중 하나로 이루어진다. 첫째, 지시 대상물(referent), 예를 들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 주체(subject)의 희귀성(rarity)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아마도 제스처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셋째, 바르트(Barthes)는 ‘훌륭한 솜씨(prowess)’라고 부르며 해롤드 에저튼(Harold Edgerton)이 백만 분의 일 초에 우유 한 방울을 촬영하는 데 보낸 50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넷째 놀라움은 ‘기술의 왜곡’ 흐릿함(blurring), 현혹시키는 시각 등이다. 다섯째는 ‘행운의 발견’이고, 예를 들어,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에서 창문을 찍고 창유리 뒤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장면은, 두 개의 고전적인 파열(busts)이다.

이러한 놀라움은 개연성(probability)의 법칙에 도전한다; 그것들은 저항의 원칙을 따른다. 사진가가 흥미로운 것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놀라운 것은 그 사진이 왜 찍혔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놀랍게도, 주목할 만한 사진이 찍혔지만, 이는 역전되었고 곧 사진에 찍힌 어느 것이든 주목받게 되었다.


15. To signify

모든 사진은 불확실한 상황(우연적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미 밖’이고 그것들은 ‘가면(mask)을 가정하지 않고는 (보편성을 겨냥한) 것을 의미화(signify)할 수 없다’(p.34). 만일 얼굴이 ‘... 사회와 그 역사의 산물’로 변한다면, 그것은 가면이다. 바르트(Barthes)는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의 사진인, 노예로 태어난, 윌리엄 캐스비(William Casby)의 1963년 사진을 사용하여, 그의 주장을 설명한다. 그는 ‘... 노예제도의 본질은 여기서 드러난다: 가면은 (고대 극장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순수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초상 사진가들은 위대한 신화학자(mythologist)이다: 나다르(프랑스 부르주아지), 잔더(나치 이전 독일의 독일인), 아베돈(뉴욕의 ‘상류 사회’)’라고 말한다. (p.34) (For Sander see Fig.1).

사회는 그 가면이 순수한 의미이기 때문에 불신하고 ‘... 의미가 소음에 둘러싸여 ... 덜 날카로워질 것’이라는 것을 원한다. 만일 그 의미(그 효과가 아닌)가 너무 인상적이라면, 이 영향은 ‘... 정치적으로가 아닌 미학적으로 그것의 소비’를 통해 줄어든다. 비록 그 가면의 사진이 ‘혼란시킬 정도로 비판적이다’ (나치가 잔더의 작업을 검열했다)라고 해도, 과학이 얼굴 특징(골상학)에 기반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실패한다.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실패하고, 비록 잔더(Sander)의 서기(書記, Notary)가 딱딱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는 사진 속 기호(sign)들을 결코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찰은 ‘미묘한 미학’의 매개체가 된다. 이미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만 그 비판을 볼 수 있다.

광고 외에도, ‘... 사진의 기호학은 따라서 여러 초상화가의 훌륭한 수행으로 한정된다’라는 제작물을 팔기 위한 명확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p.38). 나머지 좋은 사진들은 우리가 생각하도록 ‘이야기를 하고(speaks)’ 막연하게 격려한다. 이마저도 미심쩍지만, 바르트(Barthes)는 1937년에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이 ‘너무 많이 말했다’는 이유로 거절한 라이프 편집자들의 사례를 인용한다. 사진은 충격을 줄 때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우리를 성찰하게 만들 때 파괴적이다.


16. To waken desire

바르트(Barthes)는 찰스 클리포드(Charles Clifford)의 사진 1854-1856, <알람브라 궁전>(그레나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햇볕이 잘 드는 빈 거리, 아랍 장식이 있는 오래된 건물, 지중해 나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살고 싶어하는 곳은 그곳이지만, 왜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할 수 없으며, 따뜻한 기후, 지중해의 신화, 그리고 타인들 사이에서의 익명성 등,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는 풍경 사진이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관광 여행(tourist) 사진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단지 ‘구경할 만한(visitable)’ 것일 뿐이다. 그가 거주하고 싶은 갈망은 꿈꾸는 듯한 것(꿈)도 아니고 실용적이지도 않으며(그는 집을 사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어떤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바라거나 자신의 어딘가로 데려가는 두 번째 광경인, ‘환상적(fantasmatic)’이다. 그가 이 풍경들을 볼 때, 그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거나 그곳에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17. The unary photograph

이 스투디움(studium)은, 푼크툼(punctum)의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진에서 생성되며, 바르트(Barthes)는 이를 ‘단일체(unary)의 사진’이라고 부른다. 그런 사진은 ‘... ‘현실(reality)’을 강하게 변화시킨다 ... 불안정하게 만들지 않고 ... 이중성, 간접성, 방해 없이’(p.41). 이것들은 진부한 사진들이며 철저히 구성되어 있다.

뉴스 사진들은 충격적일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단일체(unary)일 수 있고, ‘큰 소리로 외칠(shout) 수는 있지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즉시 인식되지만, 바르트(Barthes)는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포르노(Pornographic) 사진들(에로틱 사진과는 달리)도 단일체(unary)이다. 그것들은 자연 그대로(naïve)이며 ‘... 단 한 가지의 표현(presentation)으로 완전히 구성되어 있다: 섹스: 어떤 부차적이고, 미숙한(untimely) 대상도 결코 반쯤 숨기거나, 지연시키거나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다 ...’(p.41).

포르노에서 에로틱으로 작업이 전환된 사진가는 속옷 천(fabric)을 클로즈업한 것을 포함하여 작품의 단일체(unary) 성격을 깨는 메이플소프(Mapplethorpe)이며, 바르트(Barthes)는 재료(material)의 질감에 관심이 많았다.


18. Co-presence of the studium and the punctum

사진들은 보통 단일체(unary)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바르트(Barthes)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디테일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 디테일, 푼크툼(punctum)은, 사진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사이의 연결에 대한 어떤 규칙은 없으며, 그것은 단지 공존감(co-presence)일 뿐이다. 조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수녀(nuns)들이 왜 니카라과 군인들의 웨싱(Wessing)의 사진 배경에 있었는지 설명하는 인과관계(causality)가 있다; 그러나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디테일은 구성 이면에 창의적인 논리가 없는 우연한 사건(occurrence)이다. 사진에는 이중성이 있지만 푼크툼(punctum)을 인식하는 데는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때때로 기억이 필요할 수도 있을지라도).


19. Punctum: partial feature

종종 푼크툼(punctum)은 부분적인 객체(object)이며, 그 예시를 통해 바르트(Barthes)는 그 자신을 드러낸다. 1926년에 촬영된 제임스 반 데르 지(James Van der Zee)의 가족 초상사진을 예로 들어, 그는 이 사진이 ‘... 존경할 만함, 가족 생활... 백인의 속성을 가정하기 위한 사회적 출세의 노력 ...’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speaks)’는 점에서 좋은 사진이라고 말한다(p.43). 그 이미지는 그를 흥미롭게 하지만, 그를 ‘찌르는(prick)’ 것은 낮게 착용하고 서 있는 여성의 벨트, 특히 그녀의 ‘가죽끈을 붙들어 맨 신발(pumps)’이다. 바르트(Barthes)는 이 구식의 패션이 왜 자신에게 어필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찍힌 날짜는 언제인지 궁금해한다? 비록 이 푼크툼(punctum)이 그에게 큰 동정심(sympathy)을 불러일으키지만, 푼크툼(punctum)은 도덕성이나 좋은 취향과 관련이 없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1954년 뉴욕에서 촬영된 <리틀 이탈리아> 사진을 사용한다. 비록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이미지이지만, 바르트(Barthes)는 ‘... 하지만 내가 고집스럽게 보는 것은 한 아이의 기분이 나쁜 이빨이다’라고 말한다. 1926년 케르테츠(Kertész)의 차라(Tzara)의 초상사진처럼, 푼크툼(punctum)은 차라(Tzara)의 큰 손의 더러운 손톱에 있다.

푼크툼(punctum)은 종종 [전체를 지칭하는 무언가의 한 측면, 예를 들어, 군주제의 왕관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환유(換喩, metonymy)로 확장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케르테츠(Kertész)의 이미지 <바이올린의 곡조>은, 1921년 헝가리의 어보니(Abony)에서,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진흙 길을 건너고 있다. 바르트(Barthes)의 ‘사고하는 눈’은 사진에 더해지고, 진흙 길과 그 질감을 보고, 그가 중앙 유럽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는 ‘...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 오래 전 여행하면서 지나쳤던 험난한 마을들을, 온몸으로’ 인지한다(p.45). 그에게 이것은 그 예술의 유일한 증거(proof)이다. 그는 지시 대상(referent)을 보고, 사진은 ‘... 더 이상 기호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 매체로서의 그 자체’를 무효화함으로써 그 자체를 초월한다(p.45).

비록 푼크툼(punctum)은 디테일이지만, 그것은 전체 이미지에 충만할 수 있다.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초상사진을 만들었는데, 워홀은 그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푼크툼(punctum)은 제스처가 아니라 ‘... 즉시 부드럽고 날카로운, 주걱모양의 손톱의 약간 혐오감을 주는 물질’이다(p.45).


20. Involuntary feature

바르트(Barthes)는 디테일이 그를 ‘찌르는 것(prick)’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도 사진가가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은 독특한 카메라 각도를 사용하여 그의 이미지인 <Shinohiera, Fighter Painter>(1961)에서 캐릭터에게 ‘괴물 같은(monstrous)’ 머리를 보여주지만, 그 결과 바르트(Barthes)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군인들 뒤에 있는 수녀들은 바르트(Barthes)에게 푼크툼(punctum)을 주지만, 브루스 길든(Bruce Gilden)이 드래그 퀸(drag queens)과 함께 한 수녀를 의도적으로 촬영한 것은 그를 짜증나게 할 뿐이다. 바르트(Barthes)는 자신에게 흥미로운 디테일이 아마도 의도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사진가의 예술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그곳에 있었고, 피사체를 촬영할 때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고 말할 뿐이다: 케르테츠(Kertész)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촬영하기 위해 그 도로에서 촬영해야 했다.


21. Satori

바르트(Barthes)는 푼크툼(punctum)을 ‘고결한 제스처’, ‘득도(得道, satori) 공허의 통과’라고 설명한다. 사진을 현상하는 화학 물질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푼크툼(punctum)은 계발(啓發)할 수 없지만, ‘... 눈에 띄는 응시 ...의 사례에서만 재경험된다...’. 이것은 하이쿠(Haiku)와 비슷한 사진들을 만든다. 모든 것은 ‘... 수사학적 확장의 가능성’ 없이 주어진다. 그것들은 ‘... 강렬한 부동성(immobility): 디테일과 연결되어 ...’ 있으며, 둘 다 우리를 ‘꿈’으로 만들 수 없다(p.49). 루이스 하인(Lewis Hine)의 사진 <시설에서의 백치 아이들, 뉴저지>(1924)에서, 그는 애처로운 인물들을 보지 못하지만 대신 소년의 당통 칼라(Danton collar)와 소녀들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다고 말한다. ‘... 나는 미숙아이고, 어린이—또는 미치광이이다; 나는 모든 지식과, 모든 문화를 잊어버렸고, 내 눈이 아닌 다른 눈에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으려 한다.’(p.51).


22. After-the-fact and silence

스투디움(studium)은 코드화되어 있지만 푼크툼(punctum)은 그렇지 않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바르트(Barthes)는 프랑스 선원 복장을 한 두 흑인 소년 사이에 앉아 있는 나다르(Nadar)의 사보르냥 드 브라자(Savorgnan de Brazza) 초상사진을 언급한다. 한 명은 브라자(Brazza)의 넓적다리에 손을 얹고 있다. 이 행위의 부조화(incongruity)는 푼크툼(punctum)을 시사하지만, 바르트(Barthes)가 즉시 동작을 ‘비정상(aberrant)’으로 코드화(code)하기 때문은 아니다(푼크툼은 다른 소년들이 팔짱을 낀 것이다). 바르트(Barthes)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찌르는 것은 그가 지적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푼크툼(punctum)이다. 예를 들어,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과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의 메이플소프(Mapplethorpe) 초상사진을 들 수 있고, ‘윌슨(Wilson)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즉, 어떤 점에서 말한다; 그 눈과 피부가 있고... 그 인상은 확실하지만 찾을 수 없고, 그것의 기호(sign)를 찾지 못한다 ...’(p.51).

때때로 사진이 보이지 않으면 푼크툼(punctum)이 드러나기도 한다. 반 데르 지(van der Zee) 사진의 경우, 바르트(Barthes)는 나중에서야 진짜 푼크툼(punctum)이 서 있던 여성이 착용한 금 목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바르트(Barthes)의 이모가 노처녀로 돌아가신 것과 동일했었다. 푼크툼(punctum)에는 잠복기(latency)가 있다. ‘이미지에 필요한 조건은 시각(sight)이다.’라고, 야누흐(Janouch)가 카프카(Kafka)에게 말했다; 그리고 카프카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내 이야기는 나의 눈을 감는 방식이다.’(p.53). 절대적인 주관성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눈을 감고 사진을 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며, ‘디테일이 자연히 감정적 의식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p.55).


23. Blind field

푼크툼(punctum)을 일으키는 것이든 아니든 사진과 바르트(Barthes)가 추가한 것 모두에 있다. 하인(Hine) 사진에서 그는 프로필(profile)에 아무것도 추가할 수 없고, 코드(code)는 말할 수 있지만 칼라와 붕대는 추가할 수 있다. 영화에서 그는 감수성(pensiveness)을 가질 시간이 없어서, 그는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영화에는 ‘블라인드 필드(blind field)’도 있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나타나고 계속 살 수 있다.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나타나거나 떠날 수 없다. 그러나, 푼크툼(punctum)은 ‘블라인드 필드’를 만들고, 목걸이는 여성에게 초상화 외면의 생명을 부여하며, 바르트(Barthes)는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는 사진 외부의 생명을 얻게 된다.

윌슨(G.W. Wilson)의 엘리자베스 여왕 초상사진(1863)에도 푼크툼(punctum)으로 인해 만들어진 ‘블라인드 필드’가 있다. 그녀는 말 위에 앉아 거대한 치마로 동물을 감싸고 있다. 스코틀랜드 남자가 말의 재갈(bit)을 잡고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는데, 이것이 바로 푼크툼(punctum)이다. 만약 그것이 그녀의 치마 뒤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녀의 장엄함(magestry)’의 푼크툼(punctum)은 ‘빅토리아시대의 본성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p.57).

에로틱 사진에는 ‘블라인드 필드’가 있으며, 이는 포르노와 구별된다. 포르노그래피는 에로틱(erotica)과 달리, 성기(sexual organ)에 집중하고 푼크툼(punctum)이 없으며, 에로틱한 이미지는 성기를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 그것은 관찰자를 프레임 밖으로 데려가고, 내가 이 사진을 생기를 주는 것과 그것이 나를 생기를 주는 것이다 ... 그 이미지는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이상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 벌거벗은 상태의 ‘나머지’를 향해 ... 습관(praxis)의 환상 ... 존재, 몸, 영혼의 절대적인 탁월함을 향해 ...’ (p.59). 바르트(Barthes)는 메이플소프(Mapplethorpe)가 <팔을 뻗은 청년>에게서 적절한 순간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 몸이 반쯤 프레임 밖으로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을 뻗고 있고, ‘밝은(radiant)’ 미소, 판에 박히지 않은 아름다움과 적당한 정도로 열린 손은 ‘신성한(divined)’ 몸을 자애롭게 제공한다. 포르노적인 신체는 그 자체를 보여주어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관대하지 않는다.


24. Palinode

바르트(Barthes)는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확립하려고 했지만 사진의 본질, ‘형상(eidos)’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너무 주관적이어서 사진을 다른 이미지와 구별할 수 있는 보편성을 찾기 위해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했다. ‘나는 나의 철회(recantation)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취소(palinode)를’(p.60). [‘개영시(改詠詩, palinode)’는 이전 시의 생각과 감정을 철회하는 시이다.]


PART TWO

25. ‘One evening ...’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바르트(Barthes)는 어머니의 사진 몇 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특징을 적절히 보여주는 것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가 거의 없었다. 그는 프루스트(Proust)가 사진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단순히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 이상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인용한다. 랑드(Les Landes) 해변에서 젊은 여성으로 찍힌,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그녀의 걸음걸이, 건강, (볼의) 홍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 그는 어떤 사진이라도 그의 친구들에게 ‘이야기(speak)’할 수 있을지 미심쩍게 여긴다.


26. History as separation

바르트(Barthes)는 자신에게 역사는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를 많은 사진들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개념이다. 그는 어머니가 다르게 옷을 입는 것을 보고 ‘멍함(stupification)'의 감정을 느낀다. ‘매력 있는(chic)’ 복장을 한 어머니의 사진은 그가 어머니를 ‘... (취향, 패션, 직물 등) 역사 속에 만나’ 본 유일한 시간이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상하기 쉬운 옷이라는 사실에 갈피를 못 잡았고 ‘... 사랑하는 사람에게 두 번째 무덤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p.64). 그러나, 그는 그의 어머니 사진을 비유적으로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익숙한 물건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뚜껑이 있는 화장 상자(powder box)와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의자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보다 앞선, 그녀의 삶은 역사의 긴장과 분열을 잘 보여준다.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만 ‘구성된’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무시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이 역사에 반한다고 느끼며 그 자신의 역사를 위해 그것을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역사의 증인(witness)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를 껴안고 찍은 사진은, ‘... 그녀의 크레이프드신(crepe de Chine)의 구겨진 부드러움과 쌀가루(rice powder)의 향기’를 일깨울 수 있다(p.65).


27. To recognise

바르트(Barthes)에게 사진의 본질적인 질문은 ‘... 내가 그녀를 알아봤나요?’이다. 그는 단편적으로만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존재가 없어서 적적해했고 그녀를 완전히 그리워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녀도 아니었고, 다른 누구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를 ‘본질적으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에게 그 이미지들은 ‘... 부분적으로 진실이었고, 따라서 완전히 거짓’이었다(p.66). 이로 인해 그는 그녀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탐색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진이 어머니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줄 뻔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고민케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거의 보여준다’는 이런 개념을 그녀(그가 꿈꾸던 유일한 사람)를 꿈꾸며 항상 그녀에게 빠져 있는 무언가에 비유했다. 그는 ‘... 나는 그녀를 꿈꾸지 않는다 ...’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본질적인 정체성을 ... 이 사진들 각각은 그녀가 자신이 사진을 찍게 ‘허락(let)’할 때마다 경험했을 바로 그 감정을 나타냈다: 나의 어머니는 그 사진에 자신을 ‘빌려줬다(lent)’...’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연극적이거나 부루퉁해 보이지 않고 ‘신중하게’ 렌즈 앞에 앉아 사진을 찍히는 시련을 극복했고, 그 사진에서 ‘시민(civic)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미지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기대하지 않았다’(p.67).


28. The Winter Garden Photograph

어머니의 사진을 통해 되돌아보며, 바르트(Barthes)는 마침내 ‘... 내가 사랑했던 그 얼굴의 진실’을 보여주는 사진을 깨달았다. 낡고, 희미해진 사진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보였고, 다섯 살이었던, <겨울 정원(Winter Garden)>(온실)의 다리에서 형 옆에 서서, ‘부모님의 불화로 ... 하나가 된’ 모습이 담겨 있다(p.69). 그녀는 한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잡고 약간 어색하게 뒤로 물러서 있다. ‘그녀의 얼굴의 뚜렷함, 그녀의 손의 자연 그대로(naïve)의 태도,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않고 다소곳이 취한 장소,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표정... 이 모든 것이 탁월한 순진함의 모습을 구성했다(... 그것은 ‘나는 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p.69). 그녀의 친절함과 온화함에 대한 이 개념은, ‘... 그래서 이미지와 관련하여 추상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사진에 드러난 얼굴에는 여전히 존재했다 ...(p.69). 바르트(Barthes)는 고다르(Godard)의 말을 인용하여,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이미지일 뿐이다”(p.70)라고 말하며, 그러나 바르트는 이것이 단지(just) 이미지라고 느낀다.

바르트(Barthes)에게, 이 이미지는 나다르(Nadar)의 어머니(또는 아내) 초상사진과 비슷하며, 바르트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한다. 둘 다 사진의 기술적 특성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사진이다. 이 효과를 얻지 못한 그의 어머니의 사진들은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보통의(ordinary)’ 대상들로, 유사하고, 그녀의 정체성을 ‘... 그녀의 진실(truth)이 아니었다; 하지만 겨울 정원 사진은 정말 본질적이었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유토피아적으로, 독특한 존재의 불가능한 과학을 이루었다’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p.71).


29. The little girl

크게, 바르트(Barthes)는 과거로 돌아간 듯 그의 어머니의 이 사진을 발견했고, 피곤하지만 고귀해 보이는, 그녀의 최근 사진을 시작으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어린 시절 그녀의 이미지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죽음(Death)을 거꾸로 맞이하는 것처럼, 그들 앞에는 그들의 과거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찾지만, 이제는 그녀의 노년과 어린 시절에, 두 번이나 그녀를 잃었다.

그녀의 마지막 병환 동안 그는 그녀를 간호했고, 그녀는 강인했었지만, ‘... 그녀는 나의 작은 딸이 되어, 그녀는 첫 번째 사진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아이와 하나가 되었다.’(p.72). 바르트(Barthes)는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고, 만약 죽음(Death)을 생식(procreation) 중인 개인에 대해 그자신이 초월했던 인종(race)의 승리로 본다면, 이것이 바르트가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었으며, 그녀의 병을 통해 그는 그녀를 ‘불러일으켰다(engendered)’.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 인종(species) ...의 진보에 나 자신을 맞출 이유가 없었다... 내 특이성은 결코 다시는 그자체 보편화될 수 없었다(... 글을 쓰지 않는 한 ...). 이제부터 나는 내 ...죽음을 기다리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었다’(p.72).

이것이 겨울 정원 사진에 대한 그의 이해였다.


30. Ariadne

바르트(Barthes)에게, 사진의 본질은 이 사진에 있었고, 그에게 ‘확실히 존재했던’ 유일한 사진이었다. 만일 모든 사진이 미로(迷路)를 형성한다면, 그는 중심에서 이 사진을 발견하고 그 사진에 무엇이 끌렸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사진을 ‘... 쾌락의 관점이 아니라, ... 사랑과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르트(Barthes)는 <겨울 정원> 사진을 재현하는 것이, 시청자에게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객관성을 확립’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시기, 장소(stadium)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만, 시청자에게는 ‘상처 없음’을 의미한다.


31. The family, the mother

처음부터 바르트(Barthes)는 가족과 어머니라는 제도화된(institutionalised) 개념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어머니, 형제, 최소한으로 구성된, 자신의 가족이 제도화된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는 이 모델(model)이 신의나 억압된 것의 하나이든, 가족에게 적용되며,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의 가족에게는 부적당하다고 느꼈다. 가톨릭은 어머니(Mother)의 ‘이미지 레퍼토리(Repertoire)’를 확립했고, 바르트(Barthes)는 개신교(Protestant) 신자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없는 종교(religion-without-images)’는, 이것에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가 <겨울 정원(Winter Garden)> 사진을 보았을 때, 그것은 ‘성모마리아(Mother-as-Good)’라는 <이미지 레퍼토리>의 일부였지만, 그는 이 일반성에서 벗어났고, 왜냐하면 그 사진 속에는 그의 밝은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Mother)에 더하여 그녀는 ‘... 개인적인 영혼으로서의 은혜를 더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었고, 그는 그녀 없이도 살 수 있었지만, 그녀는 대체할 수 없었고 그의 삶은 본질(quality) 없이 ‘절대적이고 완전히’ 존재할 것이다(p.75).


32. ‘That-has-been’

바르트(Barthes)는 ‘... 모든 사진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지시 대상(referent)과 자연스럽게 공존한다(co-natural)...’고 언급하며 시작했다. 사진의 지시 대상은 다른 재현적인 체계에서의 지시대상과는 다르고, 그 이유는 ‘... 이미지나 기호(sign)가 가리키는 선택적으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에는 없는 외부의 렌즈 앞에 놓인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p.76). 다른 형태의 표현(representation)과 담론과 달리, ‘... 사진 속에서 나는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진의 본질, 즉 ‘노에마(noème)’는 그래서 ‘... 현실(reality)과 과거의’ 것이다(p.76). 사진은 예술이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지시 대상(Reference)이며, 사진은 지시 대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사진의 본질을, 그것의 노에마 ‘거기에-있음(That-has-been)’ 또는 ‘다루기 힘든 것(Intractable)’이라고 명명하고, 라틴어 단어 “인터푸잇(interfuit)”을 사용하여 여기에 있었던 것과 여기에 있었지만 분리된 것이라는 라틴어 단어 인터섬(intérsum, 사이에 있음)의 특성을 설명한다. 비록 노에마가 사소함(indifference) 속에서 경험될 수 있지만, 결코 억누를 수 없다. 무언가가 진실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지만, <겨울 정원> 사진의 경우, 바르트(Barthes)의 경험의 강렬함(intensity)이 그 진실을 확증했다. ‘나는 진실과 현실(reality)을 독특한 감정 속에서 확인했었고, 이후 나는 사진의 본질—천성—을 생각해냈고, 그때까지 어떤 그려진 초상화도, 그것이 나에게 ‘진실(true)’처럼 보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의 지시 대상물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게 만들 수 없었다’(p.77).


33. The pose

그 대신에, 사진의 본질은 포즈(pose)에 기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포즈의 정도(length)는 관계가 없다; 에저튼(Edgerton)이 우유를 한 방울 떨어뜨릴 때 100만 분의 1초면 충분하다. 포즈는 피사체의 태도도 사진가(operator)의 기법도 아니다. 사진을 보는 점에서 바르트(Barthes)는 그가 보고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실제(real)의 것을 인식한다. ‘나는 여기 있는 사진의 부동성(immobility)을 과거 샷에 투영하고, 그 포즈를 구성하는 것이 이 정지(arrest)이다’(p.78). 이것은 사진과 영화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사진에서는 무언가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영원히 그곳에 머무르며, 영화에서는 무언가가 카메라 앞을 지나간다. 영화는 포즈를 부정하고, 비록 사진에서 파생되었지만 그것은 다른 예술이다.

사진 속 사물의 존재는 은유적이지 않다. 시체(corpse) 사진은 ‘... 시체이지만, 살아있는 것 같다; 그것은 죽은 것의 살아있는 이미지’이다(p.79).

사진의 부동성은 실제(Real)와 살아 있는 것(Live)의 개념 사이의 혼동된 결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리얼리티가 ‘...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어쨌든 영원한 가치 ...’라는 ‘망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대상(object)이 실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 사진은 그것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비밀리에 유발한다’(p.79). 리얼리티는 과거의 ‘이것이-있음(this-has-been)’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죽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진의 노에마는 누군가 실물로 그 지시대상을 직접 본 적이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처음에, 사진은 신체의 '형식성(formality)', 그것의 정체성 및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인간(Person)의 예술이었다. 이것은 사진과 영화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후자는 두 가지 포즈를 가지고 있고, 배우의 ‘이것이-있음’과 그의 역할(회화는 이 경험을 만들어낼 수 없다)이다. 바르트(Barthes)는 이제 죽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 우울함을 경험한다(이제 죽은 가수들의 녹음을 들을 때처럼).

‘노예로 태어난’ 윌리엄 캐스비(William Casby)에 대한 아베돈(Avedon)의 초상사진으로 되돌아가서, ‘여기서 노에마는 강렬하다; 여기서 내가 보는 사람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노예제도가 존재했음을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증언이 아니라 새로운, 어쨌든 경험적인 증거의 상태로 이를 증명한다...’, 과거에 대한 증거로, 이는 유도된 것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지고 싶어하는 성 토마스(St. Thomas)의 것과 같다. 어린 시절, 바르트(Barthes)는 잡지에서, 노예 주인과 노예들이 보이고 있는 노예 시장의 사진(그림이 아닌)을 잘라내어 보관했다. 그의 공포와 매혹은 ‘... 이것에서 왔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reality)의 문제였다; 역사가는 더 이상 중재자가 아니었다 ... 그 사실은 방법(method) 없이 확립되었다’(p.80).


34. The luminous ray, colour

바르트(Barthes)에게, 사진을 발명한 것은 화가가 아니라 화학자들이었다; 노에마 ‘거기에-있음(that-has-been)’은 할로겐이 빛에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능하게 되고, ‘... 다양한 조명을 받은 물체에서 방출되는 빛나는 광선을 직접 복구되고 프린트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은 말 그대로 지시 대상물의 발산(emanation)이다. 실제 물체에서, 거기에 있었고, 발광(發光)이 진행되어 결국 나에 미친다. 여기에 있다... 손택(Sontag)의 말처럼, 별의 지연된 광선처럼 나에게 미칠 것이다 ... 빛은 ... 육체의 매개물로 여기에 있다...’(p.81).

바르트(Barthes)는 사진에서 과거의 무언가가 실제로 사진의 표면에 닿아 색(colour)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강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제안한다. 그는 일부 은판사진가(daguerreotypist)들이 사진 위에 그린 것처럼, 컬러도 나중에 추가되는 것, 즉 화장품(cosmetic)이라고 느낀다. 바르트(Barthes)는 사진의 ‘생명(life)’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 사진에 찍힌 것이 몸에 덧붙여진 빛이 아닌 그 자체의 광선으로 나에게 닿을 것이라는 확신’한다(p.81).


35. Amazement

사진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보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르트(Barthes)는 사진이 부활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사진을 보는 자신의 놀람(astonishment)이 부분적으로는 종교적 배경일 때문일 수 있다고 느낀다.

1915년 폴란드 군인들이 들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에서, 바르트(Barthes)는 ‘그들이 거기에 있다... 과거와 현실 동시에’는 사실을 그에게 느끼게 하고, 사실주의 회화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 장의 사진, 1910년 익명의 영국 결혼식 사진, 1931년 비아리츠(Biarritz) 해변의 라르티그(Lartigue)의 사진과 1932년 퐁 데 자르(Pont des Arts)의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을 예로 들었다. 웨딩 사진을 보면서, 그는 누가 아직 살아있을지 알아내려고 한다: 두 명의 어린 소녀와 한 명의 아기, 이제 모두 노인이 됐을 것이다. 라르티그(Lartigue)와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 중에서, 그는 사진 속 사람들 중에 자신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의 날짜는 스타일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 삶, 죽음, 세대의 냉혹한 소멸을 계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의 관심을 끌었다(p.84). 1931년 케르테츠(Kertész)의 남학생 어니스트(Ernest) 사진을 볼 때, 그가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해하며 ‘... 하지만 어디? 어떻게? 소설이네’라고 말하며 반응한다. 바르트(Barthes)는 모든 사진의 외연(外延)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질문을 자신에게 한다, ‘... 왜 지금 여기서 내가 살아있는 걸까?’ 사진이 세상에 제공하는 즉각적인 존재감은 정치적(‘현대 사건에 이미지로 참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p.84),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36. Authentication

사진은 무엇이 있었는지 확실히 말해주고, 무엇이 더 이상 아닌지를 말해줄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특징이다.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반드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진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 사진의 본질은 그것이 나타내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p.85). 바르트(Barthes)는 사진가로부터 자신의 사진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요점을 설명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트(Barthes)는 사진이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 나는 사진가의 전시회(show)에 가서 ... 더 이상 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을 ... 알 수 있게 되었다.’(p.85).

언어는 그에게 이러한 확신을 줄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를 인증할 수 없는 반면, 사진은 ‘인증(authentication) 그 자체’이다. 사진은 거짓일 때만 힘들고, 심지어 그 존재가 아닌 주제(subject)의 의미에 대해서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현실을 확증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그것은 ‘너무 많이, 더 이상 없다’는 우연한 현실(reality)이다.

첫 번째 사진(1823년경, 니에프스(Niépce), 식탁) 이후, 인간은 새로운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이미지도 현실도 아닌...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현실(reality)’. 과거를 믿으려는 우리의 저항은, 역사에서 사진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분리했다. 사진은 인류학적으로 새로운 오브제(object)이기 때문에, 바르트(Barthes)는 다른 이미지와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진에 대한 사회학적 및 기호학적 논평가들 사이에서 '의미론의 상대성'을 포착하고, 리얼리티를 부정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자연(Physis)이 아니라, 논제(Thesis)’. 그들은 사진이 세상과 유사하지 않으며, 역사적인 우연성(accident)을 통해 알베르티안(Albertian) 관점의 대상이 되고, 제목이나 캡션이 3차원의 물체를, ‘2차원의 상(像, effigy)’ 사진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Barthes)는 이를 무익한 주장으로 간주한다. 다른 형태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사진이 유추(類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 노에마는 유사(analogy)가 아니다. 사실주의자들(바르트는 사진이 코드가 없는 이미지라고 주장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명백히 코드가 우리의 사진 판독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은 사진을 현실(reality)의 복제물이 아니라 과거 현실의 방출물로 본다. 좋은 분석은 사진이 유사한지 코딩되었는지 묻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진이 ‘증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증명은 물체(object)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제때에... 인증의 힘이 표현의 힘을 능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p.89).


37. Stasis

사르트르(Sartre)와 다른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 생성되는 이미지의 불완전에 대해 언급했다. 사진은 이에 상응하는 ‘이미지의 전체성(Totality-of-Image)’이 있다; 둘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특별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 그것은 완전한 '전체(integral)는 ... 아무것도 추가할 수 없다'이다(p.89). 영화의 원재료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러한 완전함(completeness)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현실처럼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유동적인 상태에 있고, 사진은 지시 대상물(referent)이 이동하기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전의 존재의 실체(reality)를 정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통상적(normal)’이며, 경험이 ‘구성적 스타일’로 흘러나오지만 사진은 ‘... 미래가 없다(이것이 그것의 파토스, 우울함이다) ... 사진은 표현에서 보존(retention)로 되돌아 흘러간다’는 가정에 의해 삶은 확증되었다(p.90).

<겨울 정원> 사진을 볼 때 바르트(Barthes)는 닫힌 원(closed circle) 안에 있다.

그는 슬픔을 애도로 바꿀 수 없다. 그의 사진은 문화가 없기 때문에 문화는 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고 그는 ‘... 전적으로 이미지의 유한성(有限性) 수준에서 경험한다(이것이 그것의 코드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을 읽을 수 없는 이유이다...)’(p.90). 만일 변증법적 사고가 부패와 죽음을 다루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이를 작업의 힘으로 변환하는 것 다음에 사진은 ‘... 비변증법적(undialectical)이다: 죽음이 ‘관조할 수 없는’ 변성된 극장이며, 반영되고 내면화된다 ... 그것은 모든 정화(purification)와 모든 카타르시스를 배제한다...’(p.90).

사진 속에서 시간의 고정(immobilisation)은 ‘충혈되어(engorged)’ 있으며,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어리둥절케 하는 정지(arrest)와 구식의(inactual) 느낌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기억이 아니며 실제로는 ‘기억을 차단’한다. 바르트(Barthes)는 친구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사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릴케(Rilke)의 말을 인용하며, ‘기억처럼 달콤하고, 미모사(mimosa)가 침실을 뒤덮는다’고 말한다.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 터무니없는 것 ... 우격다짐으로 시야를 채운다 ... 어떤 것도 거부하거나 변형시킬 수 없다 ...’(p.91).


38. Flat death

모든 사진가들이 살아 있는 것(live)을 다루지만, 바르트(Barthes)는 그것들을 죽음의 대리인(agent)으로 본다.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서 연구하는 것과 함께,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조사하는, 인류학적 맥락에서 연구하기를 원했다. 사회에서, 죽음은 이제 종교에서 덜 강하게 발견되며, 그는 사진 이미지가 ‘... 생명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죽음을 낳는다’고 제안한다.

의식의 쇠퇴와 동시에, 사진은 ‘반상징적인(asymbolic)’ 비종교적 민감한 죽음의 유형일 수 있다. ‘삶/죽음: 패러다임은 단순한 클릭으로 축소되며, 초기 태도(pose)와 최종 프린트를 분리한다.’(p.92).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평면적인(flat) 죽음’이라고 묘사하며, 그에게 죽음의 공포는 ‘단조로움(platitude)’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나 그녀의 사진에 대해 할 말이 없지만, 그는 그것을 변형할 수는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첫 번째 죽음의 끝에 자신의 죽음이 새겨져 있고 그 둘 사이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다. 말할 것도 없고, 할 말도 없는 아이러니가 있을 뿐이다.

사진은 폐기물(refuse)로 변환해야만 바뀔 수 있다. 종이처럼 썩어 없어지고,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것은 ‘... 분출되는 은 입자에서 ... 태어난다 ...’ 그것은 잠시 성장한 다음 빛과 습도로 노화되어, 색이 바래고, 그 후 버려진다. 기억은 생명의 대체물이며, 이전 사회들은 기념비(Monument)를 통해 기억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현대 사회는 기념비를 거부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진을 ‘무엇이 있었던 일(what has been)’의 증인으로 삼았다. 역사와 사진은 모두 같은 세기에 발명되었다. 역사는 지적인 논쟁이며, ‘... 신화적인 시간(Time)을 없애는...’이라는 긍정적인 방식에 기반한 조작된 기억이고 반면에 사진은 확실한 증거(testament)이지만, 영구적이지는 않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 정서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지속 기간(duration)을 상상할 수...’ 없다(p.93). 사진의 시대는 혼란, 초조, 그리고 성숙의 부정 중 하나이다. ‘거기에 있음(that-has-been)’에 대한 놀라움은 이미 사라졌고, 바르트(Barthes)는 그의 책을 마지막 증인 중 한 명에 의해 낡은 흔적으로 여긴다.

사진이 희미해져가고 버려질 때, ‘삶’도 같이 간다; 즉, 사진의 피사체가 살아 있고 렌즈 앞에 있었다는 확인. 바르트(Barthes)는 또한 사랑도 떠나간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모님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볼 수 있으며, 그는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진이 사라지고 그가 죽으면, 이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은 것은 ‘무관심한 본성’뿐일 것이다.


39. Time as punctum

그가 이 책을 시작할 때 바르트(Barthes)는 스투디움(문화적 맥락)을 푼크툼과 분리했다. 또 다른 푼크툼이 있는데, 이는 디테일의 결과가 아니며 ‘... 시간, 노에마(‘거기에 있음(that-has-been)’)의 괴롭히고 있는 강조점, 그 순수한 표현이다.’(p.96).

1865년,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는 루이스 페인(Lewis Payne)이 국무장관 시워트(W.H. Sewart)를 암살하려다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다(see Fig.2). 페인(Payne)의 그 사진을 ‘잘생겼다’고 묘사하며, 바르트(Barthes)는 이것이 사진의 스투디움이라고 말하지만, 그 푼크툼은 ‘그가 죽었고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p.95). 바르트가 ‘찌른다는’ 것은 이 ‘전(anterior)의 미래’의 발견이며, 사진은 ‘절대적인 과거’를 제공하고 미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1850년, 아우구스트 살츠만(August Salzmann)은 베들레헴(Bethlehem)으로 가는 길을 사진으로 찍었지만, 바위투성이의 땅과 올리브 나무이지만 조금 보여주었고, 세 가지 시제(tenses)가 섞여 있어 바르트(Barthes)를 어지럽게 했다; 그의 시대, 예수의 시대, 그리고 살츠만(Salzmann)의 시대, ‘... 이 모든 것은 ‘현실(reality)’의 사례 아래서 — 그리고 더 이상 텍스트의 노작(勞作)을 통해 ...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p.97).


40. Private/public

개인적으로, 모든 사진이 우리 자신의 미래의 죽음에 대한 까다로운 기호(sign)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진은 우리 각자에게 도전을 한다. 사진은 또한 (일반적으로) 사적으로 보여졌다. 중세 후기의 일부 종교 신자들이 집단 기도에서 사적 기도로 전환한 것처럼,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읽는 것이 결국 사적인 일이라고 느낀다. 이것은 우리의 젊은 시절과 동시대의 오래된 사진이나 우리의 혈통(부모 등)과 관련된 사진의 경우에 분명해 보이지만, 예를 들면 저널리즘과 같이, 명확한 연관성이 없는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각각 사진은 그 지시대상(referent)의 사적인 모습으로 읽힌다 ...’(p.98). 사진과 사적인 것은 공적으로 일치하며 바르트(Barthes)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사적인 것은 소유권의 관례에 해당하므로 우리 소유물 중 하나이다; 그것은 그의 이미지가 자유롭게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현장(site)이다; 그리고 그것은 ‘... 내 진실과 동일시되어 있다고 믿는 내면성 ...’과 연결되어 있다(p.98). 그는 사진의 세계를 두 가지로 나눈다; 그는 이미지를 없어도 되는 소음으로 묘사하는 것과 ‘내 사진들은 ... 불타는 듯하고, 상처를 입은 것’이라고 설명한다(p.98).

다른 예술 형식과 달리, 사진에서는 아마추어가 사진의 노에마에 더 가깝기 때문에 전문가라기보다는 직업에 숙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41. To scrutinise

만일 사진이 바르트(Barthes)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거나 그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면, 그는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면밀히 조사한다. 그가 <겨울 정원> 사진을 본 첫 번째 충격은 (이미지가 희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를 찾았다고 외친 것이었다. 그러나, 관찰자로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는 마레이(Marey)와 머이브리지(Muybridge) 조작자처럼, 그의 어머니의 ‘바로 그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 단계적으로(각각의 연속적인 샷의 작은 디테일을 확대할 때마다) 확대하여, 분해시켰다. 이 욕망은 왜냐하면 사진의 노에마는 거기에 있음(that-has-been)이지만,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정당화되었다. 확대하는 것은 오직 입자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가 가진 유일한 지식은 그가 본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사진이 숨기지는 않지만, ‘...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게 한 것을 말할 수는 없다’(p.100).


42. Resemblance

바르트(Barthes)는 사진이 ‘유사성(likeness)’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강하게 반응하지만, 닮음(resemblance)은 정체성에 부합하고 ‘... 정체성은 부정확하고, 심지어 가상적이고 ... 나는 ... 어쨌든 그 모델을 본 적이 없어도 ‘유사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는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많은 초상사진들(주로 나다르, 아베돈의 초상사진)과 이 사람들이 초상화와 잘 닮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특징을 꼽는다: 기조(Guizot)—엄격; 뒤마(Dumas)—과장한, 잘난 체하는; 오펜바흐(Offenbach)—재치 있는 음악; 로시니(Rossini)—가장된; 마르셀 데보르데스-발모어(Marcelle Desbordes-Valmore)—약간 어리석은 미덕; 크로포트킨(Kropotkin)—아나키즘 이상주의. 그것들은 그의 기대에 부합하기 때문에 ‘유사성(초상들, likenesses)’이다. 이 사진들에 반대하여, 그는 자신의 사진에 대해 묻는다; 그가 아는 누군가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른 내 사진들뿐이야...’, 실제(real)적 또는 정신적 사본(copies)의 사본들. 기껏해야, 바르트(Barthes)는 자신에게 주고 싶은 이미지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그 이미지를 인정한다. 하지만, 가끔 그가 알고 있었던 누군가의 사진을 보여주면, 그 사람이 그 사진과 닮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결국 사진은 그것이 표현하는 그 사람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와 닮았다’(p.102). 닮음은 순전히 법적인 개념을 언급하며, 바르트(Barthes)는 회의적이고 불만족스러웠다—그의 어머니가 그녀와 닮지 않았고 그가 알지 못하는 아이였던 때의 유일하고 진실한 사진이었다.


43. Lineage

사진은 때때로 우리가 실제 얼굴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들은 유전학적 특징을 드러내는 혈통(lineage)의 진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바르트(Barthes)는 마치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큰 메달(medallion)을 보여주지만, 알고 보니 그의 할머니와 그의 삼촌이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 종(種)의 일정한 지속성 ... 그 사진은 노년기와 같다: 그것의 화려함(splendor) 속에서도, 그 얼굴을 비물질화시키고(disincarnate), 유전학적 본질을 나타낸다.’(p.105). 이 선형(線形) 정체성은 우리의 기원을 재보증하면서 법적 지위보다 더 강하게 확신을 갖게 한다; 그것은 혼란시키게 되는 미래이다. 그러나, 그것이 영속성을 통해 안심시키지만, 동일한 가족에게서 오는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실망스럽다.


44. Camera Lucida

바르트(Barthes)는 사진이 편평(flat)해서 통과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의 전조(前兆)인,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통과)와 연관짓는 것은, 실수이다. 그것은 프리즘을 사용한 초기 드로잉 보조 도구인,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와 더 비슷하다. 사진을 눈(eye)의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 바르트(Barthes)는, ‘이미지의 본질은 친밀함 없이, 대체적으로 밖에 있는 것이며, 더욱더 ...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생각보다 더 신비롭다; 의미(signification) 없이도, 그럼에도 어떤 가능한 의미의 깊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라는 블랑쇼(Blanchot)의 말을 인용한다(p.106).

그것이 관통하는 것을 막는 증거로서가 사진의 힘이다. 바르트(Barthes)는 사르트르(Sartre)의 말을 인용하여 오브제(object)가 이미지 속에서 완전히 그 자체를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45. The ‘air’

한 대상(object)의 사진은 단지 현실(reality)만을 다루고 그 존재를 입증한다. 얼굴 사진은 ‘특정 존재의 실존을 인증’하며, 이것은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경우, 바르트(Barthes)가 ‘단순한 닮음을 넘어’ 그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이것은 사진으로 찍혔기 때문에 분명하지만, 있을 법 하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이나 표정을 바르트(Barthes)는 분위기(air)라고 부른다. 그 분위기는 분석에 의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으며, 이는 현실(nature)의 증거인, 사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분위기는 우리를 몸에서 영혼으로, 좋든 나쁘든 간에, 그 사람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준다. 바르트(Barthes)는 그의 어머니의 생경한 법적 정체성을 ‘개인적인 표현’을 읽을 수 있는 사진에서 마지막으로 <겨울 정원> 사진까지 그를 보여주었던 사진들로 시작하고, ‘그것에서 나는 그녀를 발견한다: ‘유사성(likeness)’의 외면, 갑작스러운 인식(awakening)...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귀하고, 아마도 독특한 증거...’(p.109).

분위기는 진실(truth)의 표현이며, 주체를 표현하는 정체성의 보충(supplement)이다. 그의 어머니의 진실한 사진에서, 그녀는 가면(mask)처럼 보였던 그녀의 다른 사진들과 달리, ‘늙지 않는, 영혼은 있었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는 그녀 자신과 분리되지 않았다. 분위기는 도덕적인 ‘... 얼굴에 생명 가치를 반영하는 데 기여하는 ...’것일 수 있다. 바르트(Barthes)는 아베돈(Avedon)의 미국 노동당 지도자 필립 랜돌프(Philip Randolph) 초상사진에 대해 선함과 확실히 ‘권력의 충동이 없다’고 말한다. 분위기, 즉 몸의 ‘빛나는 그림자’는 그 몸에 대한 상상력이 결핍되는 것을 막아주며, 나다르(Nadar)와 아베돈(Avedon) 같은 몇몇 사진가들이 그들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피사체(subject)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포착하는 것이 바로 이 분위기이다. <겨울 정원> 사진을 촬영한 그 지방의 사진가는 운 좋게도 바르트(Barthes)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그의 어머니의 분위기를 포착하였다.


46. The look

최근 기록(reportage) 사진들은 그것들이 보여준 죽음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바르트(Barthes)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를 바라보는 주체가 부족하고 정면 포즈가 덜 유행하게 되면서 사진이 ‘눈에 똑바로(straight in the eye)’ 보이는 힘을 잃고 있다. 사진 속에는 그것들을 보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것과 비슷한 역설이 있다. ‘... 사진은 인식에서 주의(attention)를 분리하고, 이전의 모습만을 드러내고, 그 후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더라도 ... 생각 없이 사고하는 행동 ... 그리고 이 수치스러운 움직임이 분위기의 가장 희귀한 특성(quality)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역설이다: 지적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도 어떻게 지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의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바르트(Barthes)는 케르테츠(Kertész)의 사진 <강아지>(파리, 1928년)를 예로 들었다. 그 소년은 ‘... 슬프고 질투심 많고 두려운 눈으로 렌즈를 들여다본다: 참으로 가련하고, 깊은 상처를 입히는 감수성(pensiveness)이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랑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바라봄(Look)이다’(p.113).

만일 그 바라봄(시선)이 시간이 지나도 지속된다면, 진실과 광기(狂氣)의 영향으로 미쳐버릴 수 있다. 골턴(Galton)과 모하메드(Mohamed)는 1881년에 사람들의 얼굴 특징과 질병을 만들어내는 것(골상학)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일련의 사진들을 제작했다. 그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거의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환자(patient)들은 바르트(Barthes)를 바라보며 ‘당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누구라도 미쳐 있다’는 생각을 남긴다(p.113).

그 사진은 그가 ‘... 칼비노(Calvino)가 “진정한 총체적인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을 찾았고’, ‘... 리얼리티(“거기에 있음(that-has-been)”)와 진실(“거기에 그녀가 있음(there-she-is)”)을 결합한 것(p.113), ‘소리치는 것(exclaimative)’의 증거가 되는 것을 믿게 만든다. 그 이미지는 감정적인 감정이 그 존재(Being)를 보증하기 위해서 멀리서 촬영되었다.


47. Madness, pity

바르트(Barthes)에게, 사진(그것의 ‘노에마’)은 진부하고 깊이가 없으며, 그것은 단순히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확장된 증거이기도 하고, ‘마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의 형상(figure)을 희화화한 것이 아니라 ... 그것의 존재 자체’이다(p.115). 현상학은 이미지를 무(無)자체(object-as-nothing)로 설명한다. 사진에서 물체(object)는 부재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힘으로, 존재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바르트(Barthes)는 이것을 광기(狂氣)로 본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이미지는 한 사물의 과거를 확인하기 위해 중개자가 필요했으며, 사진은 ‘... 확실성이 즉각적이다’. 이것은 그것을 기괴한 매체로 만들고, 공유된 환상은 ‘... 현실(reality)에 의해 쓸려서 벗겨지게 한, 미친 이미지’로 만든다(p.115). 펠리니(Fellini)의 <카사노바(Casanova)>에서 카사노바가 새로운 자동인형(automaton)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 바르트(Barthes)는 사진을 접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가졌다. ‘... 내가 보고 있던 각 디테일을 정확히, 그것을 음미하며 ... 마지막 증거까지, 나를 압도했었다 ...’(p.116). 그때 바르트(Barthes)는 사진, 광기, 그리고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동인형(automaton)과 프루스트(Proustian)적 세계의 사람들(줄리아 바르테(Julia Bartet), 귀히(Guich) 공작)의 사진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었다. 그가 자신을 ‘찔렀던’ 모든 사진을 생각했을 때, 그는 ‘... 표현된 것의 비현실성(unreality)을 넘어 통과되었고 ... 내 품에 무엇이 죽었는지, 무엇이 죽을지,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 그는 채찍을 때린 말의 목에 눈물을 흘리며 그 자신을 던졌다: 불쌍해서 미쳐버린 것’이다(p.117).


48. The photograph tamed

사회는 사진을 길들이기를 원하며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수행한다. 우선 첫째로, 그것을 예술로 바꾸는 것에 의해, 예술은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 사진가가 예술가와의 경쟁을 고집하는 것, ...’ (p.117), 회화의 언어이자 그것의 숭고한 전시(exhibiting) 방식.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광기(狂氣)를 느끼지 않고 그 노에마(그리고 바르트에 미치는 영향)를 잃을 때만 이다. 바르트(Barthes)는 허구의 영화가 이러한 사진의 길들이기(domestication)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서만 미쳐있을 수 있다). 사진을 길들이는 두 번째 방식은 일반화하여 진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사진이 다른 모든 이미지들을 그 폭정(tyranny)에 의해 짓밟고 있다’(p.118).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이 이미지로만 존재하고, 변하고, 생산되고, 소비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는 포르노 사진들을 위해 그들 자신을 묶어두고 때리는 (배우가 아닌)사람들을 예로 들며(메이플소프는 이러한 종류의 이미지에서 자신의 사진 중 일부를 끌어내었다), 그들은 그들의 쾌락을 ‘... 이 쾌락이 진부한 ... 가학-피학주의자(sado-masochist)의 이미지와 결합할 때만: 쾌락이 그 이미지를 통과한다: 여기에 큰 변화(mutation)가 있다’라고 지적한다. 이 반전(反轉)은 윤리적 질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사진이 일반화될 때 ‘... 인간의 갈등과 욕망의 세계를 완전히 비실현(de-realize)하며, 그것을 예증(例證)하는 것으로 위장하기 때문이다(p.118). 오늘날의 ‘진보적인(advanced)’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처럼 아이디어를 소비하는 대신 그들은 이미지를 소비하여 더 자유롭고, 덜 광신(狂信)적이지만 더 ‘거짓(false)’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 마치 보편화된 이미지가 차이가 없는(무관심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라는 지루한 것의 인상을 주고, 이는 때때로 무정부적이거나 이차적이거나 개인적인 외침을 가능하게 하고, ‘...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즉각적인 욕망(중재 없는 욕구)을 남겨둔다.’(p.119).

길들여진 사진은 상대적인 사실주의(realism)를 가지고 있으며 치과(dentist)에서 잡지를 볼 때처럼, 미적 또는 경험적 습관에 얽매여 있다; 미친다(mad)면, 그 사실주의는 절대적으로 ‘.. 사랑스럽고 무서워하는 의식을 시간(Time)의 글자(letter)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을 반전시키며 ‘사진적 황홀’이다. 그 선택은 ‘... 완벽한 환영(幻影)의 문명화된 코드, 아니면 ... 다루기 힘든 현실(reality)의 눈뜸(wakening)’ 사이에 있다(p.119).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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