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통> 1982년
뷔히너는 희곡 세 편을 남겼다. 첫 번째 희곡 <당통의 죽음>은 짙은 염세주의로 가득 찬 작품으로서 프랑스 혁명을 다룬다. 1792년 9월 학살 때문에 심한 정신적 고뇌에 시달리는 인물로 그려졌다. 두 번째 희곡 <레옹스와 레나>은 낭만주의 사상의 불문명한 성격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희곡 <보이체크>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냄으로써 1890년대에 등장할 사회극의 시작을 알렸다. <보이체크>는 1879년에 상연되었고, 후에 알반 베르크(Alban Berg)의 오페라 <보체크>(Wozzeck)(1925)의 대본으로 쓰였다.
<당통의 죽음>을 이해하려면 프랑스 대혁명(1789년 7월14일~1794년 7월28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1789년 5월 베르사유에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 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반대하고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국왕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파리 시민들은 무력 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부조리의 타파를 갈구하면서 1789년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했다. 같은 해 10월 초 서민 여인들이 빵을 요구하면서 베르사유로 행진했고,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791년 9월14일 국민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입헌 군주제가 규정된 새 헌법을 제정했다.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1792년 1월 루이 16세를 처형했다.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체포하여 10월 30일 처형했다.
1794년 3월 24일 초과격파인 에베르파가, 4월 5일에는 온건파인 당통파가 처형됐다. 하지만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친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공포 정치를 이끈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 내부 반대파에 의해 1794년 7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1795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유산계급이 주축이 된 총재 다섯 명이 주도하는 총재 정부를 규정했다.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에베르파가 처형된 후 당통마저 처형당할 때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2막에서 당통의 심정, 양심에 대한 당통의 생각을 엿볼수 있다. 4막과 31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당통의 죽음>은 1902년 베를린 자유 민중무대(Freie Volksbuhne)에서 초연되었다.
“우리가 혁명을 만든게 아니라, 혁명이 우리를 만들었어. 그리고 일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난 남을 단두대로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겠어. 이제 신물이 나. 왜 우리 인간들이 서로 싸워야 하지?” (p129-130)
당통이 계획하고 추진해 온 혁명의 결과에도, 민중의 삶은 혁명 전이나 후나 그다지 차이가 없다. 민중은 여전히 가난하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가 주장하는 덕이 위선이라고 반박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도덕적 태도는 순전히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싶어 하는 한심한 만족감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추구하는 쾌락을 그가 부도덕하고 타락한 혁명가, 죽어야 할 인물이라는 증거로 내세운다.
1792년 여름의 위기 때 혁명을 잘 이끌 수 있었다. 물론 가난에 시달리던 민중이 볼 때 당통파의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 외에 어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모두 민중의 궁핍 해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공포를 이용해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뷔히너도 생쥐스트처럼 폭력을 통한 혁명의 필연성에 공감하는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민중의 궁핍 해결을 혁명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보았다.
“양심이란 원숭이가 자기 앞에 놓고 보면서 고민하는 거울 같은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치장하지. 그러면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거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격하게 싸울 만한 보람이 있는 일이야. 만일 다른 누군가가 그 즐거움을 망치려고 한다면, 누구나 저항할 거야. 자네가 언제나 깨끗하게 솔질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단두대를 다른 사람의 불결한 세탁물을 헹굴 빨래 통으로 만들고, 그들의 잘린 머리로 더러운 옷의 얼룩을 뺄 비누를 만들 권리가 자네에게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 만약 그들이 자네 옷에 침을 뱉거나 옷을 찢어 구멍을 내려고 한다면, 자넨 방어해야겠지. 하지만 그들이 자네를 가만히 놓아두는데, 자네가 상관할 게 뭐 있겠는가? 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자네에게 그들을 무덤에 처넣을 권리가 있단 말인가? 자네가 하늘에서 내려 보낸 헌병이라도 된단 말인가? 자네의 자애로운 하느님처럼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다면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든가 하게.”
<게오르크 뷔히너, 당통의 죽음, P117-118>
홉스(1588-1679)는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군주제가 필요하다고 한 반면 루소(1712-1778)는 인간은 본래 선하고 직접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사회계약에 관한 부분은 일치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자연권이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수 있는 권리’라고 말한다.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1762)에서 ‘우리의 고유한 생명과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홉스와 루소는 타인이란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그의 자유를 위해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권리이다라고 말한다. 과연 인간은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과연 사회계약이 필요한 것인가. 사회계약은 인간의 자족성을 타인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시회계약에서 인간은 점점 더 타인의 지배에 맞설 힘은 줄어들지는 않는가. 연대를 하지만 과연 인간 개개인의 자유는 점점 소외되고, 건조한 계약은 물리적 화합일 뿐이다.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당통>(1983)은 프랑스 정치적 혁명의 시기의 인간 당통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루소의 추종자 로베스 피에르(1758-1794)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같은 급박한 혁명정국에서, 생존과 자유를 위해 개인은 공안위원회에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로베스 피에르에 대립하여 당통(1759-1794)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계약은 지속될 수 없다’며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