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1955년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이 1952년 9월 발표한 소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농부와 두 아들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다룬 서사적인 작품으로,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서사 구조에 기반했으며,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창세기 4장 16절)에서 제목을 따 왔다. 타락과 죄악, 자기 파괴와 자유,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에덴의 동쪽>의 주된 배경은 20세기 초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살리나스 계곡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인 애덤 트래크스의 인생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남북전쟁 시기까지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애덤 트래크스가 캐시와 결혼 생활을 위해 정착한 살리나스 계곡에서 자란 쌍둥이 아들의 성장기이다. 애덤은 두 아들의 이름을 칼렙과 아론으로 지었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을 상징하는 것이다. 1955년 엘리아 카잔(Elia Kazan) 감독, 제임스 딘(James Byron Dean)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다.
반항하는 인간은 무엇인가, 카뮈는 말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아니다(non)’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거부는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살인과 부정과 폭력의 연속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된 테러와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며, 반기를 드는 인간이다. 폭력은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한계가 없다면 정의는 없고 오직 허무주의만 있을 것이다. 폭력과 테러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테러가 법칙인 세계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세계 앞에 대처하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는 반항이다.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여러 번 생각해 보아도 애덤 같은 사람이 군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는 처음부터 전투를 싫어했는데, 동료들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기는커녕 폭력에 대한 반감만 커져 갔다. 장교들은 그가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닌지 유심히 살폈지만 그 일로 기합을 주지는 않았다. 애덤은 오 년 군대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특수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도 만약 그가 적을 죽였다면 그것은 탄알이 빗나간 탓이었으리라. 저격병인 그는 명사수였는데도 일부러 목표물을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무렵 인디언 소탕 작전은 위험한 소몰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인디언은 극한 상황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멸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불모의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일은 아니었으나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군 조직에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애덤은 미래에 대한 설계는 고사하고 사람들이 생죽음으로 내몰리는 광경만 보며 나날을 보내게 되자 혐오감이 쌓였다. 총을 일부러 빗맞히는 것은 군에 대한 반역 행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폭력에 대한 반감은 이미 단단하게 굳은 편견이 되어 그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점점 확고해지면서 그의 마음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1, P67-68>
세상에는 인간에게서 태어난 괴물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는 외모가 기형적이고 무섭게 생겨서 유난히 큰 머리에 비해 체구는 작거나, 팔다리가 없거나, 팔이 세 개나 달려 있거나, 꼬리가 달려 있거나, 입이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일들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옛날만 해도 이런 기형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에 대해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같은 외형적인 괴물이 있듯이 정신적 혹은 심리적인 괴물도 있는 건 아닐까? 얼굴과 몸은 멀쩡한데 뒤틀린 정자나 일그러진 난자가 육체적인 괴물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이 기형적인 영혼도 만들 수 있을 것 아닌가.
괴물은 크거나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상에서 벗어난 변종이다. 팔 없는 아기가 태어나듯이 인정머리 없거나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기도 태어날 수 있다. 사고로 두 팔을 잃은 사람은 온갖 노력을 다해 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쓰지만 원래부터 두 팔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팔이 없었으므로 없는 팔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날개가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지만 그건 새가 자기 날개에 대해 갖는 느낌과는 다르다. 괴물에게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정신적인 괴물은 정상적인 사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으므로 이런 현상들이 훨씬 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양심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고 번뇌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습게 볼 것이며, 범죄자는 정직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괴물은 변종이라서 정상적인 것을 기형으로 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1, P134-135>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체험한 영광의 질과 양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켜 준다. 그것은 모든 창조의 어머니로서, 우리들 각자를 타인과 구별시켜 준다.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지금 세상에는 기이한 변화가 일고 있고, 어떤 힘이 알 수 없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힘들 중에는 우리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없애 버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더 큰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다. 한 사람보다 하나의 조직이 자동차를 더 신속하게 잘 조립할 수 있다. 거대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빵이 더 싸고 품질도 믿을 수 있다. 우리의 의식주가 복잡한 대량생산을 통해 만들어지면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통제하고 다른 감각을 모두 마비시킨다. 우리 시대에는 대량생산 혹은 공동생산이 정치, 종교, 경제에 파고들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신의 개념을 집단의 개념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우리 시대가 겪는 이러한 변화는 위험하다. 오늘날의 세계는 팽팽한 긴장 속에 있으며, 이 긴장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할 때 사람들은 불행해지고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우리가 자문해 봐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가?’
인간은 유일하게 창조적인 동물이며, 창조에 필요한 유일한 도구는 각자의 정신과 마음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것도 두 사람에 의해 창조된 것은 없다. 음악, 미술, 시, 수학, 철학 중에서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것 중에는 신통한 것이 거의 없다. 일단 개인에 의한 창조의 기적이 일어나면 집단이 그것을 재정비하고 확대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낸 일은 없다. 그러므로 정작 값진 것은 인간의 고독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집단의 개념을 호위하는 집단들이 귀중한 인간의 정신을 말살시키겠다고 선포한다. 자유분방한 인간 정신은 비방, 기아, 탄압, 강요, 무자비한 세뇌에 쫓기고 억압당한 결과 무디어지고 마비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자유로운 인간정신이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제한하고 파괴하는 사상, 종교, 또는 정부에 대해 우리는 대항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우리 모습이며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일정한 틀 위에 세워진 제도가 자유로운 정신을 파괴하려는 이유를 나는 안다. 자유로운 정신이야말로 그런 제도를 점검하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제도를 혐오하며 그것과 맞서 싸움으로써 창조 능력이 없는 짐승과 인간을 구별하는 자유로운 정신을 지켜 나가고자 한다. 영광이 말살되면 우리 역시 파멸하고 만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1, P240-241>
소설 <에덴의 동쪽>은 선과 악의 그물처럼 얽혀있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과연 선과 악은 무엇이고, 인간은 자유의지, 의지로써 선과 악을 다스릴수 있는것인가 하고 질문을 하고 있다. 소설속에 답은 애덤이 죽을 때 팀셀(timsel)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팀셀은 히브리어로 ‘Thou mayest’(너는 할수도 있을 것이다)로, 선택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을 하게 되고, 선택의 길은 열려 있다는 말이다.
“교과서나 교회에서 ‘너는 다스려라’라는 말에서 명령조를 느끼고, 그 말에 복종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너는 다스릴 것이다.’라는 글 속에서 신의 애정설을 느끼는 사람들이 또 수백만 명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미래를 좌지우지할 순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너는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하는 말은 다릅니다! 이 말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인간을 신들과 동등한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약한 생동이나 추잡한 행위 혹은 형제를 살상하는 잔인한 일에 있어서 한 선택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인간은 자신의 길을 선택해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 목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2, P65-66>
어린아이는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세상 이야기란 대체 어떤 거에요?”
어른들도 한 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세상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결말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나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이야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유일한 이야기가 우리를 항상 두렵게 하는 동시에 고무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진주 목걸이에 연결된 알처럼 줄곧 생각과 자문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생활과 생각, 욕망과 야심, 탐욕과 잔인함, 친절과 관용, 다시 말해 얽히고설킨 선과 악의 그물에 붙잡혀 있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감성과 지성이 서로 다른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선과 악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인식하는 씨줄과 날줄이며,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도 인식하게 될 직물이다. 강산과 경제와 관습이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 이외에 다른 이야기는 없다. 인간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인 먼지와 찌꺼기를 다 털어 버리고 나면 분명하고 확고한 한 가지 의문만이 남을 것이다. “내 삶은 선한 것이었을까, 악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동안 똑바로 살았을까, 비뚤어지게 살았을까?”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술하면서 크로이소스 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 당대의 왕들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누구에게나 환영받던 크로이소스가 어느 날 아테네의 현인 솔론에게 유도신문을 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걱정하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물었다. 스스로 의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솔론은 고대의 행복했던 사람 세 명을 들어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크로이소스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솔론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지 앉자 왕은 할 수 없이 직접 물었다.
“너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솔론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제가 그걸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생존해 계신데.”
훗날 그의 부와 왕국이 행복과 더불어 사라졌을 때, 이 불길한 대답이 크로이소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화형을 당할 때도 이 현답을 떠올렸을 것이고, 어쩌면 괜한 질문을 해서 답을 들었던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죽음 앞에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죽은 사람이 생전에 부러움의 대상인 부와 영향력, 권력, 명예 등을 갖고 있었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재산과 명성, 업적 등을 자세히 평가하고 난 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선한 것이었을까, 악한 것이었을까? 이 말은 크로이소스의 질문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를 부러워했던 마음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그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오직 ‘그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가, 미움을 받았던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가, 후련하게 생각하는가?’하는 것이다.
나는 세 사람의 죽음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그 부를 쌓기 위해 그는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짓밟았고, 그 후 수년 동안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출세를 위해 저질렀던 많은 죄악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세상을 위해 크게 봉사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항해 중이었다. 게시판에 부음이 나붙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 개자식, 잘 죽었군,’하고 말했다.
두 번째는 사탄처럼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오직 인간의 약점과 사악한 면만을 꿰뚫고 있었다. 결국 그 특별한 재능을 활용하여 사람을 왜곡하고 매수하고 뇌물을 먹이고 위협하고 유혹한 끝에 상당히 높은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미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위장했다. 인간에게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으면 훗날 어떤 선물로도 그의 사랑을 되살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뇌물을 준 사람을 증오할 뿐이다. 이 사람이 죽었을 때 온 나라가 그를 찬양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이 있었다. 비록 실행 과정에서 많은 과오를 범했지만,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추악한 세력이 그 두려움을 악용하려고 할 때,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용감하고 위엄 있고 선량하게 행동했다. 물론 그를 미워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거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불확실성의 세상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한다. 인간이란 연약하기 짝이 없는 허울 밑에서 선량해지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악행들은 사랑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하기 위해 시도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생전의 재능과 영향력과 자질이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만약 사랑받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 삶은 실패작이요 그의 죽음은 싸늘한 두려움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생각과 행동,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미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죽음을 세상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한 가지 이야기밖에 없다. 모든 소설과 시는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선악의 끊임없는 대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악은 끊임없이 또 다른 악을 낳지만, 선, 다시 말해 미덕은 불멸하는 것이다. 악은 항상 새롭고 싱싱한 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미덕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숭고하고 존엄한 얼굴을 하고 있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2, P273-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