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로드> 2009년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는 2006년에 출간된 뒤에 퓰리처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상을 수상하였다. 매카시가 자신의 어린 아들과 자기가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다는 가정 하에 아들을 생각하며 쓴 소설이라고 한다. 전쟁인지, 뭔지 모를 이유로 지구가 황폐화되고,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은 남쪽 바닷가를 향해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들을 해치는 사람들인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불신을 가지면서 그들은 좋은 사람들일까, 그들은 불을 운반하는 자일까 질문을 던진다. 그들에게 불은 희망을 상징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달해준 불일 수도 있고, 불은 추위와 어둠을 밝혀주는 것일 수도 있고, 문명의 이기일수도 있고, 인간의 도덕적 양심일수도 있다.
남자는 소년의 손을 잡고 가지와 잔가지들을 발로 걷어차 모은 다음 불을 피웠다. 나무는 축축했지만 남자는 칼로 죽은 껍질을 벗겨내고 열에 마르도록 잔가지와 다음은 가지를 사방에 쌓았다. 이어 바닥에 비닐을 깔고 카트에서 양복과 담요를 꺼냈다. 남자는 진흙이 묻은 축축한 신발을 벗었다. 그들은 불길에 두 손을 뻗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뭔가 할 말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의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긴 신성한 관용구. 모든 것이 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깜빡하고 영원히 꺼져버리는 어떤 것처럼.
<코맥 매카시, 로드, P102-103>
그는 회색 빛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p149)
영화 <더 로드>는 2009년 호주 출신의 존 힐코트 감독이 영화화했다. 영화는 황폐화된 세상만큼 회색빛으로 보여지고, 세상은 모두 황톳빛이다. 부자가 먹을 것이 가득한 지하 창고를 발견했을 때에만 유일하게 칼라 빛이 돈다. 서로를 의지하는 아들과 아빠의 클로즈업은 그들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불씨이다.
모든 게 사라졌어. 시계는 새벽 1시 17분에 멈췄다.
“내 아이에게 이런 삶을 주기 싫어.”
그녀는 떠났다. 이따금 나는 아이에게 오래전 얘길 했다. 용기와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그걸 기억하는 게 어려움이다. 내가 아는 모든 건 아이가 나의 가망성이란 거다.
“두 발이 남았구나. 너 한 발, 나 한 발.”
“그걸 입에 넣고, 이렇게 향하게 해.”
총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고, 두 발이 남은 총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영화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들어 봐, 우린 얘길 해야 해. 그 사람들이 뒤에 있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그게 다지. 나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해. 우린 단지 불씨를 옮기는 거야.”
“무슨 불씨요?”
“네 마음 속의 불씨.”
주인공은 어느 날부터 누군가 자신들을 쫓는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게 되고 어느 폐허가 된 마을에서 약탈자로 오해받아 다리에 화살을 맞는다. 이에 주인공은 자신을 공격한 남자에게 어느 폐선에서 주은 조명탄을 쏘아 죽이고 살아남은 여자에게 왜 우리를 따라다녔느냐! 라고 추궁하지만 그 여자는 쫓긴 뭘 쫓아 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자신들을 추격하는 자들을 해치운 게 아니란 걸 안 주인공은 아들을 데리고 걸음을 재촉하지만 부상당한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사망한다. 주인공의 아들은 좋은(묘사를 보면 조금 무뚝뚝하나 친절하고 착한) 여행자들을 만나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동안 주인공을 쫓았던 사람들은 바로 그 여행자들이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뭐.
아저씨는 불을 운반하세요?
뭐라고?
불을 운반하냐고요.
너 좀 불안한 거 아니냐?
아니에요.
조금은 그런 것 같은데.
맞아요.
뭐 괜찮아.
그래서 운반하세요?
뭐, 불을 운반하냐고?
네.
그래 운반하지.
아이들은 있나요?
있지.
작은 남자애가 있나요?
작은 남자애도 있고 작은 여자애도 있어.
남자애가 몇 살이죠?
네 나이쯤인데, 어쩌면 조금 많을까.
그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죠.
안 잡아먹어.
사람을 잡아먹진 않죠.
안 먹어, 우린 사람 안 먹는다.
내가 함께 가도 되나요?
그래, 가도 돼.
그럼 좋아요.
그래.
<코맥 매카시, 로드, P319-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