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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an 09. 2020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7. 아우라에서 푼크툼을 거쳐 시뮬라크르로

아우라(Aura)에서 사진은 시작한다. 분위기 있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아우라를 느낄때가 많다. 그때 어김없이 카메라에 손이 간다. 멋진 일출 장면이나 분위기 있는 상황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흥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도 느껴진다. 그 사람의 후광은 누구에게나서 느끼는 아우라인 것이다. 또는 보여준 사진에서도, 당신의 사진에선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진에서 아우라는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아우라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진의 역사에서 1936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가장 영향을 끼친 비평이다. 그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상실되고 사진의 등장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이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기존의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고, 인터넷과 디지털의 혁명은 수많은 사진이미지로 넘쳐난다. 원본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는 디지털 시대에서 복제에 복제, 수많은 복제는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사본이라는 개념조차 무의미해져 있다. 복제의 대중화는 원판 사진의 아우라는 이미 상실된지 오래이다. 디지털 비트는 일회적인 현존성조차 어김없이 무너져 있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다예술적 수련을 위해 도제들에 의해 행해졌고작품의 보급을 위해 예술의 대가들에 의해 행해졌으며돈벌이에 혈안이 된 제3자에 의해 행해졌다그러나 이때는 청동제품주화 정도의 복제로 모두 일회적인 것이었고기술적 복제는 불가능했다그러나 석판인쇄의 등장과 함께 복제기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이는 판화술로 이어졌고다시 사진술의 영상복제기술로 이어진다이로 인해 영상의 복제과정은 말할 수 없이 촉진되었고, 1900년 이후에는 전래적인 예술작품 전체를 복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있다시간과 공간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즉 일회적 현존성이다원작 Original의 시간적 공간적 현존성은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예를 들어 청동작품은그 녹청을 분석함으로서 진품성 여부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일반적으로 진품성은 위조품이라는 낙인이 찍힌 손으로 만든 제품의 복제에 대해 그 권위를 백퍼센트 유지할 수 있지만기술적 복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1)


1)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pp.197-231


1917년 미술관에 등장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유명한 작품 샘(Fountain)은 작품에 대한 현존성, 진품성에 물음을 던진다. 진품에 대한 완벽한 복제품이라도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의 유일무이한 현존성,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일회적 만남”으로 말한 벤야민의 아우라는 뒤샹의 작품에선 느낄 수 없다. 이것을 뒤샹은 의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복제성을 띄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복제인지 그 구별 또한 알 수 없다. 뒤샹의 변기는 사진의 속성을 닮아있다. 뒤샹의 행위는 일상속에 있는 변기를 제술적인 공간 미술관으로 옮겨옴으로써 일회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제 아무리 매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가장 세속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의 세속화된 의식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예술작품은 마술적 의식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고숭배의 대상이었다그러나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지금까지의 종교적 의식 속에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그리고 그 빈자리에 정치적 기능을 포함한 다른 사회적 기능들이 대신 들어서고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은 역점을 달리하면서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 역점이 의식적이고두 번째 역점은 전시가능성이다예술작품이 밀실에서 마법적 도구로 마치 신령들을 위해 바쳐졌던 예전에 비해오늘날에는 복제로 인해 전시가능성이 훨씬 커짐으로써 새로운 기능을 가진 형상체가 되었다. 2)


2)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pp.197-231


작품이 가지는 숭배가치는 현대에 들어서 달라지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는 제의적 기능의 미술관에서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으로 수용자층과의 확대소통되고 있다. 벤야민이 말한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변화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대중성, 복제성으로 인해 가능성은 엄청나게 커졌고, 예술작품의 질적변화를 낳았다.     


사진의 재현성은 현실과 유사하게 닮아 있을 뿐 현실 그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사진에 기록된 정보를 사실 그 자체로 인식한다. 사진속의 현실은 찍는 순간 돌이킬수 없는 그 때 그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고, 과거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찍는 순간 그 현실은 사라진다. 카메라라는 기계적 수단으로 촬영된 남겨진 흔적이다. 복제의 복제, 재현의 재현은 사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무한히 재현하는 것은 단 한 번만 일어났다. 그것은 실존적으로 결코 더 이상 재생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사진의 이미지에 대해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 이미지-텍스트-수사학의 관계를 설명한다. 특히 사진을 통해 어머니의 존재, 영혼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전개했다.                                                                     

보여지기 위하여관찰 욕망을(부분적으로만족시키기 위하여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면 이미지는 특수한 타입의 쾌락을 야기함에 분명하다이러한 통찰에 롤랑 바르트의 중요한 텍스트인 <밝은 방>(1980)은 관객이 사진이미지와 갖는 관계를 이론화하면서 대답하고 있다바르트는 같은 사진을 파악하는데 두가지 반대 방식을 제시한다그가 명명하길사진가의 사진과 관객의 사진이다전자에서는 사진안에 담긴 정보객관적 기호(signes), 의도적으로 약호화된 부분 등 그가 스투디움(studium)이라 부르는 것에 속하는 제반 사항들에 초점이 맞추어진다후자에서는 우연주관적 연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사진 안에서 약호화된지 않고 의도적이지 않은욕망의 부분적 대상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푼크툼(punctum)이다. ‘사진가의 사진은 상당한 미장센을 함축하여관객은 인지적 방식으로 그것을 해독하게 된다그러나 관객의 사진은 이러한 첫 번째 관계에 전적으로 주관적인 관계를 첨가한다바르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논점은 나를 찌르는 것(ce qui me point)이기도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푼크툼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3)


3) 자크 오몽의 이마주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의 논쟁을 떠나 사진의 발명으로 파생되어진 예술의 가치, 사진의 기능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들었고 바르트의 푼크툼은 이미지로서의 사진이 가지는 의미,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을 자문한다. 푼크툼은 흔적이자 상처자국이다. 이미지의 실재, 재현, 노에마(Noema: 그것은-존재-했음)를 설명한다.   

   

 사진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며 거부의 침해의 시대파열의 시대간단히 말해서 초조함의 시대모든 성숙을 거부하는 시대이다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이 존재했다는 놀라움도 역시 사라질 것이다그것은 이미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목격한 최후의 증인(반 시대성의 증인)중의 한 사람이며 이 책은 그것에 관한 고풍스런 흔적이다” 4)


4) 카메라 루시다, 롤랑바르트, 열화당 (P94)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는 언젠가 그가 파이프를 그린 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Leci n'est pas une pipe)라는 텍스트를 적어 놓았다. 파이프를 그려 놓았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파이프는 아니다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실재를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존재했던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며, 사진의 존재했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회화에서는 Reality없이 상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다. 존재하는 피사체가 있어야만 사진이라는 매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존재해야만 사진이 존재하는 속성, 이것이 노에마이다. 비록 사물자체 의미에 관해서는 거짓말이 가능하지만, 사진 안에 있는 노에마는 존재했음이다.     


아우라와 푼크툼을 거쳐 우리는 사라짐에 대해 연장선상으로 시뮬라크르로 논점을 확장한다. 정착이 안 된 사진이 전시장에서 사진이 변해가는 과정을 전시한 토마스 바로우(Thomas F. Barrow)의 사진처럼, 시뮬라크르는 사라짐에 대해 말한다. 보드리야르는 재현의 종말을 말하면서 “순수하게 기능적이 되어서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재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능한 재현도 더 이상 없다.”5), “인류는 기술을 이용하여 진화를 인위적으로 실행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빨리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될 것이고, 진실과 허위의 모든 구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6)고 사라짐을 정의한다.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 그것은 위장이고, 가장假裝이다.


5)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민음사, P19

6)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민음사, P23~25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우리말로는 <가장假裝>으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근사하겠지만 다른 유사어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이와 유사한 어휘로 <위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이는 불어의 dissimulation, 즉 실제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감추는 행위를 지칭하기에 전혀 반대의 뜻이 된다또한 많은 사람들이 시뮬라크르를 imitation, 즉 <흉내모방>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혀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 번역이기에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흉내를 내기 위하여는 반드시 흉내낼 원대상이 있고이 실제 원대상을 베끼게 되면 그것이 바로 흉내이다이러한 흉내나 모방으로의 번역은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제 혹은 제 2열에 속하는 시뮬라크르전통적인 재현 체계 속의 이미지에나 속하지여기즉 보드리야르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현대의 제 3열의 시뮬라크르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가장>은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다가장 쉽게는 우리가 시뮬라크르를 생각할 때현대의 전재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미사일 발사는 화면이라는 컴퓨터로 보면서 하지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면서 하지 않는다이때 시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치도 않게 되어버렸다결국 시뮬라크르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이 시뮬라크르는 아울러 어떤 기왕의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독자적인 하나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오히려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바로 이 비현실성이라고 하였던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오게 된다상황이 완전히 전도되었다흉내내거나 모방할 때는 이미지란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한다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를 하기>이다. 7)


7)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민음사


리얼리즘 예술에 있어서 사실(fact)은 재현성을 바탕으로 정확한 모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이래 회화는 개인적인 관심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였고 현대의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및 추상예술을 거치면서 재현의 진위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20세기 정신적 불안은 위조된 감정들과 인위적인 이미지들로 거짓(가장)을 말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사실(fact)보다는 허구(fiction)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회화는 거짓이다, 혹은 대부분의 회화는 거짓이다."라고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이 말하는 것처럼 회화는 이제 거짓말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또한 『거짓(말하기)Lying』의 저자 시셀라 보크(Sissela Bok)는 회피, 완곡어법, 과장등 동일하게 위장 혹은 미혹으로 이중성(duplicity)을 예술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한다. 사실 예술에서 기만(guile)과 속임수(fakery)를 이용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위한 그들의 예술적 속이기(deception)인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예술은 가상(Schein)이고, '가상'은 곧 '기만'이다. 예술가는 '가상'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 가상의 세계는 꿈의 세계이자, 무의식의 세계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가상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레이션의 세계'로 전환된다. 시뮬레이션으로 전화된 예술작품은 무엇을 표현하고 의도하려고 하는지 수수께기와 같아서 그 파악은 불가능하고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예술적 속이기는 거짓말(fabrication)을 전달한다. 그것은 그럴듯한 포장지에 둘러싸여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꾸며낸 것이라는 것에 있다. 뒤샹의 변기가 천재의 한 제스추어로 여겨지게 되면서 하나의 양식을 만들게 되었고 이러한 마니에리슴(manierismus)은 케이지와 캠벨 수프 깡통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앤디 워홀에 이어졌다. 거짓말은 예술 작품의 위조를 낳는다. 그리고 위조는 무수히 많은 위조를 복제 재생산한다. 그 이면에는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의 차용된 이미지처럼, 작가(주체)는 죽고 무엇이든지 복제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흉내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푸코의 텍스트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유사성(ressemblance)과 상사성(similitude)의 의미를 구별하면서, 원본과 복제의 관계를 규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오리지널인가? 라는 주체의 죽음은 무한히 반복되는 시뮬라르크의 유희만이 남았을 뿐이다. 따라서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를 보여줌으로써 예술적 속이기의 일면을 보여준다.     


가벼운 농담이든, 진지한 농담이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양식을 사용한 농담은 하나의 언어놀이(비트겐슈타인의 언어와 삶의 꼬임관계)를 하고 있으며 유희(흉내놀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흉내놀이'의 허구의 공간은 실상과 허상, 참과 거짓이라는 애매한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풍자는 외관상의 진지함 배후에 농담이 감추어져 있고, 유머는 농담 배후에 진지함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중의 하나인 패스티쉬(pastiche)는 패러디(parody)와 달리 유머 감각을 상실한 공허한 것으로서 유희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가다머는 예술개념의 존재론적 해명을 위한 실마리로 유희개념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예술경험의 해석학적 본질은 곧 예술의 언어적 유희일지도 모른다.      


예술적 속이기는 진의(dissembling)를 숨기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시치미를 뗀다. 끊임없는 가지치기와 합치기를 통해서 예술적 속이기는 계속된다.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아마 가지치기의 한 형태일 것이다. 산산히 쪼개어진 가지치기(離接)와 절충주의의 합치기(統接)를 하면 이상야릇한 분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분재는 들뢰즈의 리좀(rhizome)으로 생겨난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 없는 뿌리를 가진 리좀은 중심을 갖지 않는 상호이질적인 이질성이 결합한 것을 말한다. 또한 맹인과 코끼리의 이야기를 역으로 보면 작가는 코끼리의 실체를 알고 있지만, 마치 맹인과 같이 실체를 보여주기보다는 다리만을 보여줌으로써 무엇이 있을 것만 같은 허위를 도출해낸다. 게슈탈트에 의하며, 전체는 부분들의 총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파편들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진의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작가의 은폐와 기만은 진의를 숨기는 행위일 것이다.      

     

예술적 속이기는 결국 가장(假裝, pretense)이다. 예술은 가장이며, 가면을 쓰고 있다. 따라서 예술은 가면을 꿰뚫어보든지, 가장에 협력하는 것이다. 가면, 흉내, 허위를 전달한다. 광고이미지의 허상처럼, 시각이미지의 껍데기를 만들어내는 공장인 것이다. 이것은 한꺼풀 한꺼풀 벗겨버린 양파의 모습처럼 거짓이라는 실체만이 남을 뿐이다. 신디 셔먼,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의 셀프 포츄레이트 또한 개인적 유희의 시간이며 공간인 것이다. 신디 셔먼의 사진은 위장(disguise)을 특히 잘 보여준다. 작가 스스로 위장한 모습은 영화에서 본 듯한 이미지들을 위장하여 주체의 위장을 드러낸다. 철저히 개인화된 사회는 타인이 내게 다가오고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이것은 로리 시몬즈(L. Simonons), 샌디 스코글랜드, 베르나르 포콩등의 인형을 소재로 한 사진가들의 작품에서처럼, 연출된 모델들의 표정은 허구적인 재연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형을 실재의 인간으로 묘사함으로써 실상과 허상이 뒤엉킨, 참과 거짓이라는 애매한 논리를 주장한다. 본질을 망각하고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마치 내가 무엇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망상에 거짓된 허상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이중적 알레고리는 표면과 내면의 이중적 아이러니이다. 자아에 대한 불신과 회의는 문제의식을 흐리게 하고, '이질성'과 '차이'만을 강조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론은 예술에 있어서 다양한 표현을 시도하였지만, 하버마스가 지적한 대로 '무정부적'인 예술상황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고민도 없는 것 같다. 예술이라는 명분하에 고상한 사기꾼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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