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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17. 2024

막스 프리쉬의 <호모 파버>

영화 <여행자Voyager>  1991년

1991년에 샘 셰퍼드와 줄리 델피 주연의 영화 <여행자Voyager>(국내에서는 ‘사랑과 슬픔의 여로’로 개봉)로 제작되었다.       

나는 숙명이나 운명을 믿지 않는다. 기술자인 나는 확률적 공식들을 가지고 계산하는 데 익숙해 있다. 숙명이란 뭐란 말인가? 나는 인정한다. 타마울리파스에 비상착륙하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헨케라는 젊은이를 알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한나의 소식도 다시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날까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타마올리파스에 비상착륙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달리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자베트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이 그렇게 된 것은 단 하나의 우연이라기보다는 일련의 우연들의 산물이다. 헌데 숙명이 뭐란 말인가? 비개연성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인정하기 위해 신비주의 같은 건 필요 없다. 나에게는 수학이면 족하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개연성과 (일반 주사위를 6,000,000,000번 던질 때 1이란 숫자가 나타날 수 있는 경우는 1,000,000,000번 가량 된다) 비개연성은 (같은 주사위를 6번 던질 때 1이란 숫자가 6번 나온다) 그 본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빈도수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어서 빈도수가 높은 것이 더 믿을 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개연성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더 고차원적인 것도 아니며, 또한 문외한이 그토록 갈망하는 기적이나 그와 유사한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들이 개연성에 관해 말할 때, 거기에는 이미 가능성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는 비개연성도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개연성이 나타난다고 해서 우리 같은 사람이 경탄하거나, 감격하거나, 신비롭게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다.         (P37-38) 

    

사람들은 체험담을 얘기할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물어보곤 한다. 나는 기술자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익숙해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대상을 나는 자세히 관찰한다. 나는 장님이 아니다. 나는 타마울리파스 황야 위에 둥실 떠 있는 달을 바라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선명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지구 주위를 회전하는 계측 가능한 물체이며, 중력의 문제일 때, 비로소 흥미롭다. 그런데 도대체 체험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나는 달빛 아래 시커먼 자태를 드러낸 채, 뽀족뽀족 서 있는 바위들을 바라본다. 마치 원시 동물들의 뾰족한 등껍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것들은 바위이며, 광석이며, 아마도 화산암일는지 모른다. 조사해 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런 동물들을 상상해야 하는가? 유감이지만 나는 화석이 된 천사를 보는 것도 아니며, 악마를 보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눈앞에 있는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침식 작용의 일반적 형태들이나, 모래벌판 위에 길게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지,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유약해져야 하는가? 나는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모래벌판을 보고 있다. 그것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바람결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광경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그 광경이 항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현상일 뿐이다. 저주받을 영혼이란 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혹시나 어두운 저녁 황야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시커먼 용설란 같은 모습은 아닐까? 내 시야에 걸쳐지는 것이라고는 용설란들 뿐. 단 한번 꽃을 피웠다가 죽어버리는 식물이다. 아울러,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지구의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최후의 인간일 거라는 허황된 생각 또한 나를 격동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무엇 때문에 신경질적이 되는가? 달빛 조명 때문에 다르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산맥은 산맥이다. 시에라 마드레 오리엔탈 산맥. 게다가 우리는 저승 세계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멕시코의 타마울리파스 황야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인접한 도로로부터 약 60마일쯤 떨어진 곳에. 약간 끔찍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체험이 문제인가? 비행기는 비행기이다. 나는 멸종된 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엔진 고장을 일으킨 슈퍼-컨스트레이션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달빛은 제멋대로 비행기를 실컷 비추라지. 무엇 때문에 내가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체험해야 하는가? 영원인가 뭔가 하는 얘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지 어떤지 내겐 결심이 서지 않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모래 소리. 그 외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몸이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예닐곱 시간 후면 태양이 또다시 떠오르리라는 사실을. 세상의 종말이라니, 어째서? 단순히 그 무엇인가를 체험해 보기 위해 망상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녹색 밤하늘 아래 하얗게 펼쳐진 모래벌판 끝 지평선을 본다. 이곳으로부터 20마일 가량 떨어진. 그런데 어째서 저기 탐피코 방면으로부터 이승이 시작된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탐피코를 잘 안다. 단순히 환상 때문에 불안감을 갖는 것을 나는 거부한다. 단순히 불안 때문에 환상적이거나 신비적인 체 하는 것을 나는 거부한다.               (P41-42)   

  

나는, 앞서 말했듯이, 결혼을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원인을 모르겠다. 그 후 한나는 자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톡톡 튀는 통에 파악하기 힘들었다. 요아힘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조울증이라고 했다. 요아힘은 그녀를 한 번인가,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 한나가 독일인이라면 무조건 상대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맹세코 요아힘은 나치가 아니라고 내가 그녀에게 말해 주었으나, 허사였다. 그녀의 불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그녀를 몽상가, 또는 예술의 요정이라 불렀다. 대신 그녀는 나를 ‘호모 파버’라 불렀다. 종종 우리는 정식으로 말다툼도 벌였다. 예를 들면, 그녀의 강권에 따라 연극을 관람하고 나올 때면 으레 그랬다. 한나에게는 한편으로 공산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못마땅했다. 다른 한편으론, 신비적 성향에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히스테릭한 성향 또한 지니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두 발을 땅 위에 붙이고 서 있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우리는 서로가 매우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 당시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을 난 지금도 모르겠다. 까닭을 모르겠으나, 그냥 그렇게 성사되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그걸 확신한다. 단지 서른 살 미만 나이 또래의 사내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는 아빠가 되기에는 너무도 젊었고, 또한 너무도 준비가 덜 되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이미 말했듯이, 박사 학위 논문에 매달려 있었다. 내가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걸 한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항상 그녀의 하숙방에서 만났다. 그 당시 에셔 — 비스 회사로부터 취업 제의가 왔다. 그것은 젊은 엔지니어에게는 특별한 기회였다. 그 당시 나의 걱정거리는 바그다드의 기후가 아니라, 취리히에 있는 한나였다. 그녀는 임신중이었다.           (P80-81)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우연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조그만 전기 면도기 속에 나일론 줄 하나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CGT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우리가 아직도 집을 나서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우연이었다. 아마도 한 시간 전에 벨소리가 울렸을 때 받지 않았던 바로 그 전화일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결정적인 전화였다. 지금 당장, 늦어도 오후 10시 이전까지, 여권을 소지하고 본인이 직접 내방해야만 유럽행 선박의 좌석을 예약할 수 있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면도기를 분해하지 않았더라면 그 전화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자베트가 탑승한 그 배에 내가 동승할 수 없었을 것이며, 결국 나의 딸과 나는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P110)     


나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이 나의 무지의 소치임을 증명해 보인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내 아이의 인생을 망쳐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원상 복귀시킬 수도 없다. 그런데 더 이상의 보고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그 붉은 말총머리 처녀에게 반해 버린 것이 아니다. 그녀가 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었으며, 한나가 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또한 전혀 알지 못했다. 어째서 숙명이란 말인가?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녀는 오히려 다른 처녀들보다도 더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내 딸 아이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 역시 우연일 뿐이었다. 우리가 서로 지나쳐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도대체 어째서 숙명이란 말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될 수도 있었는데.          (P125)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계에게는 체험의 기능이 없으며, 공포나 희망의 감정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것은 방해가 될 뿐이다. 결과에 대한 소망도 없다. 기계는 개연성의 논리에 따라 작업할 뿐이다. 그러므로 로봇의 인식력은 인간보다 더 정확하며, 인간보다 미래를 더 잘 진단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로봇은 미래를 계산함에 있어 질투를 한다거나,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얻은 해답으로 결론을 도출하며, 실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봇에게는 예감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까.            (P129-130)     

내 마음이 울적하니까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 같다는 그녀의 추측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나는 혼자서 여행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다. 진정한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일 속에 파묻혀 산다. 나는 내 생활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 혼자 사는 것으로 행복하다. 내 판단으로는, 그런 생활이 남자들에게 합당한 유일한 상황이다. 혼자서 일어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때문에 나는 즐겁다. 그런 것을 이해해 줄 여자가 어디 있을까? ‘잘 잤어요’하는 물음부터가 나를 짜증나게 한다. 과거지사가 아니라, 앞일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 익숙해져 있는 나의 사고는 이미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저녁에 애정을 나누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아침부터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삼사일 이상 여자와 함께 보내는 것은,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늘 위선의 시작이다. 아침부터 감정을 표현해야 하다니. 그런 걸 어떤 남자가 참을 수 있으랴. 차라리 설거지를 하는 편이 낫겠다.           (P157)     

우리가 퇴치하려는 것은 우상으로서의 자연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에겐 필연적으로 페니실린, 피뢰침, 안경, DDT, 레이더,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들도 필요 없어야 된다. 우리는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자이고, 엔지니어다. 이 말에 이의가 있는 자는 다리조차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자연이 산물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는 비로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며, 그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낙태 수술도 반대할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맹장염에 걸려 죽어도 된다. 운명일 테니까 말이다. 전등도, 엔진도, 핵에너지도, 계산기도, 마취도 필요 없다. 그러니 정글로 들어가라.            (P185-186)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된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당시, 즉 우리가 비아 아피아에서 대화를 나눈 직후에 내가 모든 것을 즉각 눈치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처녀가 되돌아 올 때까지 걸린 10분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일종이 결산이라 할까. 내가 아는 사실은 차라리 비행장으로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뿐. 아마도 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단순한 확신일 뿐이다. 확신을 갖는 것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녀가 거기 있다면, 그녀는 분명히 나를 즐겁게 해줄 텐데. 자메트, 그녀가 한나의 딸이라니! 그러면서도 나는 자베트가 나의 친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단 한순간도 가정해 보지 않았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우리 아이의 문제를 비롯하여, 한나와 헤어지기 전까지의 모든 사연들, 한나가 의사 요아힘을 찾아가 보기로 했던 우리의 결정 등을. 물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해 보긴 했으나, 그런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 분묘(墳墓)를 기어오르던 그 처녀가 내 친딸일 줄이야.       (P206-207)   

    

통계에 관한 한 한나는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운명론자이니까. 한나가 그렇게 표현한 적은 없으나, 난 그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모든 여자들은 미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나는 최고의 지성인이다. 그래서 더더욱 놀랄 일이다. 한나는 신화를 얘기한다. 반면에 우리 같은 사람은 열량(熱量) 정량(定量) 수치 같은 것에 관해 말하는 법이다. 말하자면 일일이 경험을 통해서만 증명되는 물리학적 법칙을 말이다. 그것도 무심한 어조로. 아무런 감동도 없이. 깨어진 도자기에 유치하게 새겨져 있는 오이디푸스, 스핑크스, 아테네, 복수의 여신 에린네와 오이메니데. 그런 신들의 얘기는 한나에게는 기정 사실들이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화제를 그쪽으로 돌릴 수 있다. 내가 신화나 문학 같은 분야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나는 언쟁을 원치 않았다. 그러기에는 사실 걱정거리가 너무도 많다.                     (P249-250)    

 

한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한나의 말에 의하면 기술이란 경험할 필요가 없도록 세상을 정리하는 기교라는 것이다. 창조를 파트너로 인정할 수 없고, 창조와 더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창조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 기술자의 기벽이란다. 기술이란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는 기교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할 필요를 느낄 수 없도록 템포를 조절함으로써 세상을 희석시키는 거죠. 한나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기술자에게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나는 내게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는다. 내가 자베트에게 한 행동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란다. 한나가 말하기를 나 나름대로는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고, 또한 사랑을 구실 삼아 스스로 다짐함으로써 곡해하고 있던 모종의 연관성을 경험한 셈이라는 거다. 그녀는 그건 결코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나다운 실수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그러하고, 나의 삶 전체가 그러했으니까. 나의 실수란, 우리 같은 기술자는 죽음을 무시한 채 인생을 살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란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은 인생을 하나의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덧셈으로 간주하고 있어요. 죽음과의 연관성이 단절될 때, 결과적으로 시간과의 연관성도 단절될 수밖에요. 인생이란 시간이라는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자신이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힘들다는 걸 한나도 인정한다. 인생은 재료가 아니며, 인생은 기술로 제어할 성질의 것이 아니거든요. 돌이켜보면, 내가 마치 나이를 잊은 듯 행동했기 때문에 자베트에게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 자연의 섭리를 거역할 수밖에요. 우리가 제 아무리 덧셈을 계속해도, 우리가 제 아무리 우리의 자식들과 결혼하려 해도, 우리는 우리의 나이를 잊을 수 없는 거예요.             (P302-303)    

 

이곳 사람들에 비하면 미국인들은 혐오스럽다. 구운 소시지 같은 그들의 붉은 피부, 끔찍스럽다. 페니실린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그들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런 주제에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저함이 없는 성격만으로, 행복한 척 살아가는 그들이다. 게다가 데퉁스럽고, 시끄럽다. 내가 하나의 모범으로 삼고 있던 다크라는 친구만 보더라도 그 점은 확연하다. 그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이라니.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오른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다. 아무런 강박감도 없이. 인류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타인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있는 한 낙관적이다. 그러다가 자지러질 듯 통곡한다. 백인종 재고 정리 바겐세일이라도 했으면 싶다. 움푹 들어간 그들의 사타구니. 나 자신에게 분노가 치민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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