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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5. 2024

엘레나 페란테의 <잃어버린 사랑>

영화 <로스트 도터>  2021년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는 2021년 개봉한 심리 드라마 영화이다. 배우 매기 질런홀의 감독 데뷔작으로,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화했다. 2021 베네치아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자 황금사자상 경쟁후보작이다. <나쁜 사랑 3부작>의 마지막이다. <성가신 사랑>은 모녀간의 가질 수 있는 딸의 어머니에 대한 질투심이 주된 내용이고, <버려진 사랑>은 15년의 결혼 생활 끝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의 삶이 처참하게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사랑>은 자의식이 강한 여자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가 되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고통은 운전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시작되었다. 옆구리에 타는 듯한 고통이 재발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운전대를 잡을 힘조차 없고 나서야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곧이어 머리가 무거워지고 신호등 불빛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운전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차 안이 아니라 대낮에 해변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문 해변이었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해안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꽂혀 있는 깃대의 빨간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레다, 얘야. 빨간 깃발이 있을 때 수영을 하면 안 된단다. 바다가 거칠어서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이런 말로 내게 겁을 주곤 했다. 그때의 두려움은 수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 이순간 수면이 지평선 반대편에서 누군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반투명 종이처럼 잔잔한데도 나는 불안한 마음에 감히 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P7-8)     


나는 니나의 억양에 빠져들었다. 언어는 은밀한 독을 품고 있어서 이따금씩 부글부글 거품이 일곤 한다. 그럴 때는 해독제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사투리에서 부드러운 억양이 사라지고 불만에 가득 차서 우리에게 악을 써대던 그때를 기억한다.

“도저히 못 참겠다. 너희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머니는 명령을 내리고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의 삶이 어머니가 쓰는 언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서 약간의 자극에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제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우리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자기는 떠나고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때마다 어머니가 사라졌을까봐 두려워하곤 했다. 어머니는 실제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지만 말로는 계속해서 집을 떠났다. 그런 내 어머니에 비해 젊은 아이 엄마 니나는 평온해 보였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부러움을 느꼈다.             (P28-29) 

비앙카는 내가 원해서 낳은 아이였다. 눈먼 동물적인 본능에 일반적인 신념이 더해지면 자식을 낳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나는 비앙카를 바로 임신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이었고 남편과 나는 둘 다 대학에 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잔니는 해냈지만 나는 해내지 못했다. 여자는 수천 가지 일을 해낸다. 힘겹게 일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러다 지쳐 쓰러진다. 그러는 동안 가슴은 커지고 질은 부풀어 오른다. 몸 안에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생명체 때문에 온 몸이 욱신거린다. 그 생명체는 나의 것이고 나의 인생이지만 끊임없이 내 몸에서 뛰쳐나가려 한다. 내 뱃속에서 살지만 정작 내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 묵직하고 유쾌한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지만 때로는 그 생명체가 혈관 속에 주입된 벌레의 독처럼 혐오스럽기도 하다. 

내가 만든 생명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비앙카는 내 몸에서 추방당했다. 아니 스스로 내 몸에서 뛰쳐나갔다. 비앙카를 혼자 자라게 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고 우리 부부도 그랬다. 혼자 자란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었다. 친구가 되어줄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 순응해 비앙카 다음에 마르타를 낳기로 계획했다. 그렇다. 나는 흔히 말하듯 출산을 ‘계획’했다.

이렇게 해서 25세에 내 인생은 끝났다. 아이들 아빠는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해외 출장이 잦아서 남편은 아이들이 자신의 어떤 점을 닮았는지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번식의 결과물이 어떤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잔니는 두 딸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지만 대신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두 아이가 나를 똑 닮았다고 말해주곤 했다.                (P58-59)     

내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던 시절이었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아이의 상처에 뽀뽀해주기 싫다고 했다. 아픔을 사라지게 하는 뽀뽀 말이다. 나는 비앙카에게 아이는 과일을 깎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그런 일은 엄마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이기 때문에.

내 배에서 태어난 불쌍한 내 새끼들, 그 아이들이 지금은 자기들끼리 지구 반대편으로 가버린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어쩌려고 인형을 가지고 온 걸까. 인형은 니나와 엘레나의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들 모녀의 서로에 대한 열정과 구속력을 품고 있었다. 인형은 평온한 모성의 눈부신 증거였다.                       (P109)     


딸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을 한 내가 어리석었다. 딸들이 적어도 오십은 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나를 엄마라는 역할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봐달라고 요구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나는 너희들의 역사이자 기원이라고. 그러니 내 말을 들으면 도움이 될 것라고 말하기에는 때가 너무 일렀다. 하지만 니나에게만큼은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역사가 아니었다. 니나라면 내게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타인인 니나를 딸처럼 대하며 외로움을 달래고 싶었다. 니나를 찾고 싶었다. 니나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P144)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거다.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고 모든 일이 뻔하게 느껴져서 감각이 무뎌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거다. 내 자신의 본모습을 유지한 상태. 어지러이 뒤얽힌 욕망과 꿈의 타래 이외의 그 어떤 번뇌도 나의 사유를 방해하지 않는 그런 상태. 탯줄이 끊어진 이래로 누구에게도 속박당한 적이 없는 그런 상태로. (P149) 

    

삶이란 구조적으로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열서너 살 때부터 나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과 훌륭한 표준어와 교양 있고 분별력 있는 수준 높은 삶을 갈망했다. 내게 나폴리는 언제나 거친 파도와 같았다. 그 파도에 휩쓸려 익사할까봐 두려웠다. 나는 나폴리에 사는 이상 어린 시절 보고 배운 삶 외에는 그 어떤 형태의 삶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포악하거나 감각적으로 무디거나 감성적으로 천박한 삶. 나락에 빠진 비참한 인생일망정 지켜보겠다고 고집스레 방어막을 쌓은 그런 종류의 삶이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는 그런 삶을 원치 않았다. 나는 불에 탄 피부를 벗겨내야만 나을 수 있다고 믿고 비명을 지르면서 화상을 입은 피부를 뜯어내는 화상환자처럼 나폴리를 떠났다. 

내가 마르타와 비앙카를 버려두고 떠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잔니가 아이들이 귀찮거나 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또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아이들을 나폴리로 데리고 가 내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나는 너무 불안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P158-159)     

나는 오렌지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비앙카와 마르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를 길들이려는 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내게는 딸들의 염원보다 딸들이 없는 바깥세상에서 비훠드는 삶의 광채가 더 밝게 느껴졌다. 새로운 색상, 새로운 육체, 새로운 지식, 드디어 나만의 진정한 언어로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언어의 광채가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중에서 딸들이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 공간과 어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들을 보아서는 안 된다. 내 육체의 욕구보다 더 강렬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딸들의 육체에서 분출되는 요구에 귀를 닫아야 한다. 오렌지 껍질을 다 벗긴 후 나는 집을 떠났다. 그 후 3년 동안 한 번도 딸들을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P187-188)     


딸들의 자그마한 육체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품 안의 기억으로만 남는다. 아이들은 자란다. 엄마 키만큼 자라서 어느새 엄마 키를 훌쩍 넘어선다. 마르타는 열여섯에 벌써 나보다 더 컸다. 비앙카는 키가 자라지 않았다. 지금도 머리가 내 귀에 닿는다. 딸들은 어렸을 때처럼 가끔 내 무릎에 앉아서 둘이 동시에 말을 하고 내 몸을 쓰다듬고 내게 키스를 한다.

나는 마르타가 나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자랐을까봐 걱정됐다. 엄마인 내가 자기보가 더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늘 억울해하고 자기가 매사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생각에 확신이 없다. 예컨대 비앙카는 제 아빠를 닮아서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비앙카조차 가끔은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쌀쌀맞고 무뚝뚝한 말로 내 안위를 위해 나를 재교육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식들은 원래 그렇다. 엄마를 사랑한다면서 품에 안기다가도 어느 순간 엄마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바꾸려고 하거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엄마인 내가 제대로 못 배워서 자기들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딸들은 내가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고 무슨 영화를 봐야 하는지 가르쳐줘야 한다고 믿는다. 너무 고리타분해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표현은 무엇이고 사용해도 되는 표현은 무엇인지 자기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은 자기들이 부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요.”

조반니도 동의했다.

“가끔은 정말 그래요.”

내가 말했다.

“우리가 가르쳐준 것에 바깥세상에서 스스로 터득한 바를 더하니까요.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자기들 시대를 살아가면서 배운 것들 말이에요.”                  (P195-196)  

   

“그렇게 잘 지냈으면서 왜 돌아갔어?”

나는 어휘 선택에 신중을 기울였다.

“내가 창조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딸들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니나는 갑자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딸들을 사랑해서 돌아간 거네.”

“아니, 내가 딸들에게 돌아간 이유는 내가 딸들을 떠났던 이유와 똑같아.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야.”

니나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내 자신이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더 절망적이었다는 뜻이지.”                       (P215)     

욕조에 얼굴을 처박고 모래 섞인 진흙물을 토해내는 니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 임신했을 때의 나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앙카 때는 입덧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입덧 기간도 짧았다. 

나는 다시 마르타를 낳았다. 마르타는 내 몸을 공격해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마르타는 비앙카와는 달리 처음부터 마르타가 아니었다. 뱃속에 살아 있는 철 조각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임신 기간 내내 몸 전체가 피로만 구성된 액체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그 안에 끈적끈적한 침전물이 있고 그 침전물 속에 난폭한 강장동물 같은 것이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과는 거리가 먼 그 물질은 자기가 영양분을 취하고 팽창하기 위해서라면 나를 생명 없는 썩은 시체로 만들어놓을 기세였다. 시꺼먼 침을 뱉어내는 니나의 모습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내 모습 같았다.                      (P225)     

니나는 내가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이고 섬세하고 용감하고 그늘이 없는 여인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작 나는 니나가 절박한 심정으로 내게 건넨 질문에 답을 회피하며 계산된 대답을 내놓았다. 대체 왜, 무슨 권리로 그랬던 걸까.

우리의 유사성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니나는 20년 전의 나보다 감내해야 할 위험이 더 컸다. 소녀 시절부터 나는 자존감이 높고 욕심이 많았다. 매달리는 사람을 뿌리치듯 내 스스로의 의지로 가족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내게 그럴 권리가 있고 적합한 때라고 판단했을 때 나는 내 남편과 딸들 곁을 떠났다. 잔니는 당연히 절망에 빠졌지만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잔니는 타인의 사정에 관심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없이 지낸 3년 동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곁에는 언제나 하디가 있었다. 나는 명망 높은 하디 교수의 사랑을 받았다. 성별에 상관없이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들로 구성된 작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논쟁을 벌일 때조차 나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나의 야망과 우울한 감정을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나를 억누르는 무게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비앙카와 마르타 곁으로 돌아왔다. 그후 내 친구들 중 몇몇은 조용히 내 삶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몇몇 기회를 영원히 잃었으며 내 전남편은 이제는 자기가 도망갈 차례라고 결정하고 캐나다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나를 상종 못 할 사람으로 낙인찍고 쫓아내려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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