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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6. 2024

메그 월리처의 <더 와이프>

영화 <더 와이프>  2017년

<더 와이프>(The Wife)는 2017년 제작된 드라마 영화이다. 비에른 룽에가 감독을, 제인 앤더슨이 각본을 맡았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를 ‘어울리는’ 부부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라스코의 거친 벽들에 처음 동굴 벽화를 그렸던 옛날. 지구가 미지의 땅이자 모든 것이 희망에 차 보였던 옛날만큼 아주아주 오래전을 생각해보면, 그건 진실이었다. 그러나 곧 우리는 찬란함과 자기애를 가진 젊은 부부에서 녹조 습지 같은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노년기 인생’이 되어버렸다. 비록 내 나이 지금 예순넷이고 티끌과 먼지의 소용돌이처럼 남자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도 한때는 수줍음을 타는 날씬하고 가슴이 큰 금발 아가씨였다. 그런 나에게 조는 최면에 걸린 닭처럼 끌려왔다.                  (P14)     


온 세상의 남편과 아내들은 일상적으로, 그리고 다소는 의미도 없이 서로에게 묻는다. “당신 괜찮아?”라고 묻는 것, 그것은 계약의 일부이다. (P35)     

소설가, 작가, 시인들 모두 상을 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상이 하나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는 그것을 타고자 하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다 큰 어른들은 집안을 서성거리며 상을 얻어낼 방법을 궁리하고 아이들은 손글씨 쓰기로, 수영으로, 그저 명랑한 것만으로도 금도금한 트로피를 탈 기대에 마냥 들떠서 호흡마저 가빠진다. 아마 다른 생명체들도 상을 주고받고 있는데,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둥근 편형동물 상 또는 가장 유익한 까마귀 상 등.

조의 친구 여러 명이 헬싱키상에 대해 몇 달째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 해리 재클린이 말했다. “올해엔 자네가 그걸 받게 될 걸세. 이제 노년으로 접어드는 중이잖나. 조, 바지를 걷어붙여야 해. 그 사람들이 자네를 못 본 척하지는 않을 거야. 자기네들 체면이 구겨질 테니 말이야.”

“내 체면도 구겨진다는 말이군.” 조가 말했다. 

“아니, 그 사람들 체면이지.” 해리가 우겼다.             (P37)   

  

“같이 점프하자니까.” 그가 다시 졸랐다.    

“안 할 거야.” 내가 말했다. “하고 싶지 않아.”

“제발, 이리 와, 조애니.”

조애니, 그건 조가 아주 오래전에 나를 부를 때 사용하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조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사이렌의 노래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다. 효과가 있었다. 그 단어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일깨웠다. 나는 그에게 속고 또 속아 넘어가는 바보였다. 아닌가? 하지만 그를 축하하기 위한, 그를 찬양하기 위한 다른 방법이 내 안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이긴 했지만, 나는 어쩔 수없이 침대위에서 비틀거리며 서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이건 진짜 낯설다, 너무 불안해.” 내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가볍게 뛰었다.          (P58-59)     

캐슬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아이를 가지면 문학적인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들에게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가 말했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배터리의 산성처럼 여러분을 조금씩 부식시킵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여러분들이 한때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그것들을 발견했을 때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 그것들을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죠?” 우리는 몰랐지만 숙연한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내 아기에게 패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 모두가 몇 년 후 아기 만드는 기계가 되기 시작하면, 그때 여러분의 작은 아가씨들에게도 패니라는 이름을 지어주기 바랍니다.”     

불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P70)     


나는 아직도 우리 둘 중에서 그가 더 중요한 사람이고 나는 아직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나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내가 실질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나에게 줄 수 있으니까. (P107)     

그 안에는 조가 나에게 준 호두가 있었다. 증거. 노스롭 하우스의 다른 여학생들은 저녁 식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온 요크셔 푸딩의 냄새가 건물 안에 진동했으니까. 달걀이 많이 들어 있고 진하며 영양가도 풍부한 음식, 그것은 집에서의 이전 삶, 자궁에서의 삶, 사람들이 우리를 돌봐주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삶의 복사판이었다. 지금 당장, 나는 위안이 되어줄 그 음식을 먹고 싶었다. 예일대 남학생들과의 거지같은 데이트에 대한 수다를 들으며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 접시에 코를 박고서, 하지만 그 대신 나는 여기에서, 손에 호두를 쥐고 맹렬한 분노에 휩싸인 조의 아내와 대면하고 있다. 

“그래, 한 번 말해봐.” 캐롤 캐슬먼이 말했다. 

“못해요.” 라고 내가 말하고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울게 놔두고, 계속 지켜보더니, 짜증을 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말해.”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캐슬먼 부인.” 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저 아직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였다. 

“이 못된 계집애.”라고 캐롤 캐슬먼이 말했다. “글깨나 쓴다는 너 스미스 잡년. 나도 그 글들 읽어봤지, 근데 이거 알아? 그것들 그렇게 대단하지 않더라. 나는 도대체 그 인간이 무엇 때문에 그것들을 계속 붙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어. 넌 그 글들을 빌어먹을 제임스 조이스가 쓴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P120-121)      

그도 한때는 천사 같은 어린 소년이었고, 야심 있는 젊고 잘생긴 글쓰기 교수였으며, 예민하고 유명한 소설가였다는 걸 회상했다. 밤새껏 깨어 있으면서 온 세상을 가득 들이마시고 그것을 내뱉기 전까지 가슴에 담아두려고 했던 사람. 그런데 지금 그는 늙었고, 가슴을 가르고 생체 이식한 돼지 판막이 쐐기처럼 그의 심장에 박혀 있다. (P134)     


나는 그가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정신이 산만해질 거라고 생각한다는 걸 느꼈다. 정말로 그가 걱정하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조는 헬싱키상을 받았고, 그 사실을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 느낌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음미하고 싶었고, 그걸 방해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두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느 집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P137)   

  

조는, 그녀의 아빠 조는 딸을 실망시켰다. 수재너는 미술 수업을 듣는 몇 년 동안 조를 위해 찰흙으로 그릇을 빚었고, 아빠의 관심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도자기 세례를 퍼부었다. 딸은 이미 아빠의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쉬웠다. 하지만 관심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P140)   

  

하지만 재능은 있으나 완벽한 광대뼈가 없고 이 우주에서 안락하게 지낸 여성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강력한 힘을 가진 남성들에 대해 아무런 애착도 보이지 않던 여자들 말이다. 

“여성 작가들은 폭풍처럼 세상을 흔들진 못해도, 확실히 인생을 좀 더 밝게 해주죠.” 새뮤얼이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웬만큼 괜찮은 사람들은 그래요. 어찌됐든 말이죠.”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러브조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동안 조용히 갈고닦아온 이론을 꺼내보려는 듯싶었다. “그들 가운데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자 장수처럼 미쳐버렸다는 걸?”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몰고 갔겠죠.”라고 조가 말했다. “그게 이유일 겁니다.”

“맞아요, 우리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죠.”라고 러브조이가 쾌활하게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조안?”                       (P179)    

 

내가 그를 필요로 했고, 여기에 그가 있고, 그는 내 것이었다. <호두>가 교정 중일 때 그는 전처와 이혼했고, 우리는 책이 출간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 가을, <라이프> 잡지가 신예작가 대거 진출을 특집기사로 다뤘을 때, 그들이 주목하고 전면을 할애했던 작가는 조였다. 흐루시초프,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 복숭아를 따는 남부 어린이들, 그리고 잠시 유행했던 댄스 열풍에 휘말린 십대 커플들의 사진들과 함께 담배를 손에 쥐고 깊이 사색 중임을 시사하는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조의 모습이 실렸다. 거기에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예술가들의 성지 화이트 호스태번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어떤 작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조의 모습도 찍혀있었다. 

<호두>는 조에게 첫 번째 소설인 셈이었다. 절대 반복할 수 없는 열기를 뿜어내고, 아무리 힘들다 해도 작가는 그 레시피를 재창조해야 하고, 잠들지 못하는 신경, 단어의 증발 같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하는 첫 소설 말이다.              (P202)     


“아무것도 아니야.” 내 대답은 늘 같았고, 이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계속될 말이었다. 가끔 심각하게 그의 배신행위를 비난하고 울부짖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경우 “아무것도”라는 말이 내게는 만트라mantra가 되어주었다. (P202)  

   

나도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조처럼 될 수도 있었다. 나도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나도 호전적이고, 서정적이며,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고, 번쩍이는 네온사인처럼 으스댈 수 있었다. 나는 여자 버전의 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랬으면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런 관심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나를 겁먹게 하고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스포트라이트의 둥근 불빛이 조에게로 향한 것을 보고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가.

“네가 직접 글은 쓰는 건 어때?” 몇몇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진심을 담아 물을 때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대학생 시절에 아주 괜찮은 글들을 썼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고, 조와 내가 사실은 조의 수업에서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 난 더 이상 안 써.” 내가 말했다. 

“조안은 아주 바빠.” 조가 덧붙였다. “내 자존심을 돌봐줘야 되거든.” 사람들이 웃었고, 그러고 난 후 조는 내가 일정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봉사활동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그것은 RSA라 불리는 난민 지원 기구였는데, 나는 그곳에 1970년대 후반에 참여했다. 누군가가 --대개 다른 아내들 가운데 하나-- 내가 대학교 때 쓴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고 강하게 요청하면, 나는 “오, 아니에요. 더 발전시켜야 했던 글인데,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지금 그 글들은 내가 다시 봐도 완전 창피할 거 같아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P228-229)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재능을 과시하는 여성 작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부류의 남자가 그런 여자 곁에 머물면서 그녀의 과함, 그녀의 분노, 그녀의 영혼, 그리고 그녀의 능력에 위협 받지 않을까? 여전히 매력적이고 강인해서 전혀 위협 받지 않는 남편, 이런 환상 속 존재 같은 남자는 누구일까? 바위 아래 어딘가에 살면서, 눈부신 아내의 빛나는 아이디어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따금씩 슬그머니 등장했다가,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는 남자. (P230)     

“애들은 괜찮을 거야.” 조가 말했다. 재난의 가능성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다는 전제하에, 아버지들이 후렴구처럼 읊조리는 말이었다. (P232)     

나는 세상 끝 이곳에 있고, 그리고 당신은 세상 끝 이곳에 있네, 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우리 함께 건배를.

나는 그 누구도 너새니얼 본과 술을 안 마셔줄 것이기에, 내가 마셔주겠다고 말했다.              (P260) 

    

나는 늘 캐롤이 좀 이상한 여자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는 단지 화가 났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라고 캐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미안해, 라고 패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인생을 망쳐서 미안합니다.

“캐롤이 당신에게 호두 던진 얘기를 조가 실제로 책에 쓴 것 때문에 그녀는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캐롤은 그 책이 아주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걸요. 그녀에게 감명을 줬다면서 말이죠.” 라고 너새니얼이 말했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너새니얼이 말했다. “이 문제로 내 태도가 너무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조안, 여기서 나눈 이야기들이 조에게 알려질까 봐 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 있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273-274) 

    

나는 몇 년 동안이나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레브를 탓했다. 레브에게만 비난을 퍼붓는 게 공평한 처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토샤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와, 침대 위에 등을 맞대고 앉아 옷을 벗으며 내가 조에게 말했다. “레브가 좀 더 알았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를 두고 시카고로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녀가 그런 짓을 할 줄 몰랐잖아. 그가 어떻게 알았겠어? 맙소사. 레브 가슴이 찢어졌을 거야.”

“그 모든 거 전부 다.” 내가 말했다. “토샤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애정에 굶주려 있었어. 그녀가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을 봐. 그녀의 가족 전부가 살해당했다고. 자매들, 부모님, 그리고 조부모님 모두. 게다가 나중에는 레브의 여자 문제들까지. 도대체 여자가 몇 명이나 있었던 거야?”

“난 모르지.” 조가 냉담하게 말했다. 

“토샤는 더 이상 붙잡을 게 없었어.” 내가 말했다. 

“뭐가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 당신은 몰라.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모르잖아.” 조가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런 일들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말이야.”                  (P297)     


“핀란드 사람들을 만나보니 인상이 어떤가요?” 그녀는 알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조용한 자부심, 그들의 감각적인 안목, 그들의 우아한 멋, 모두들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기뻐하는 듯 보였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크리스티안 부인?” 내가 물었다. “여기 헬싱키에서 지내는 삶이 어떠세요?”

영부인은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곧바로 내가 무례하고 낯선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면 그녀가 이런 직접적인 관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내 인생은,” 그녀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보며 누군가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은 그의 각료 가운데 한 명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각료는 거대한 금발 수염의 소유자였다. “내 인생은,” 카리타 크리스티안이 조용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굉장히 불행합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대답을 잘못 들은 건가?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굉장히 행복하다는 것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닐까. 내가 무슨 수로 알아내겠는가? 그녀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해 보였다. 바로 그때 조명이 어두워졌고, 귀빈석에 있는 사람들과 청중 모두가 조용해졌다. 핀란드의 영부인은 육중한 커튼이 걷히기 시작하는 무대로 얼굴을 향했다.              (P322-323)     

“저는 제 아내 조안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올려 내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제 아내, 조안.” 조가 반복했다. “그녀는 진정 저보다 나은 반려자입니다.”

하지 마, 나는 생각했다. 나한테 이러지 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는 제게 내면의 정적(靜寂)을 찾을 수 있게 해줬고, 몰론 그러다보면 잡음들을 걸러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제가 소설들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는 확실히 오늘 밤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곳에 오는 대신에 집에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빈 원고지만 쳐다보고 있었겠지요.”

관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는 어쨌든 이곳에 와 섰겠지. 라고 관객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 헬싱키상의 수상자가 자기 아내에게 이토록 관대하다니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오랫동안 쇠사슬에 묶인 죄수처럼 열심히 소설을 써왔던 그가 이 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서서 아내를 이렇게 인정해주는 것 말이다.                   (P325)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토해냈다. 그리고 말했다. “말할 게 있는데, 적당한 시간을 못 찾겠네.”

“어, 말해.” 조가 대답과 함께 일어나 앉았다. 

“그럴게. 우리 뉴욕으로 돌아가면, 헤어지자. 그동안 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야.”

“아하, 알겠다.” 조가 말했다. “그걸 말하려고 내 몸이 백만도까지 올라가기를 기다린 거로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까지, 내 몸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 거야.” 그가 물을 좀 더 끼얹었다. 숯에 물이 튀어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 내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 봐. 내 인생에 다시 한 번 기회가 왔으면 좋겠어.” 내가 말했다. “나 예순네 살이야. 거의 노인네잖아. 어딜 가도 반값밖에 안 들어. 그리고 이젠 나 혼자 가고 싶어. 그렇다고 너무 화를 내지는 마. 가슴 아파 하지도 말고. 충격 받지도 말고. 그것들 중 어느 한 가지도 당신에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한 번 만은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 줘. 내 말을 그냥 듣기만이라도 해 봐.”              (P341)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우리가 항상 묻는 질문이었지만, 이걸 묻는 건 정말로 무의미한 일이었다.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읽었던 19세기 소설가들의 빼곡하게 채워진, 울퉁불퉁하게 굴곡진 뇌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알아냈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책은 작가의 몸과 뇌와 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가들 자신 --혹은 가끔은 숙녀용 모자를 쓴 브론테와 상류 사회 관찰자인 오스틴 같은 여성 작가들-- 은 겉껍질이 벗겨지고 바짝 말라서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가 되었다. 

작가들이 만족했다면 책들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충분히 큰 소리로 말했다면 말이다. 드디어, 누군가가 관심을 보였다. 누가 그 책들을 썼을까? 나는 그것들을 물건처럼, 보석함처럼, 그리고 보석 그 자체로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조의 원고 또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P350)   

  

낯선 나라에서 죽어가는 것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위기의 정점에서 꺼질 듯 말 듯한 생명의 불빛을 발하는 환자를 둘러싼 혼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급박한 움직임, 혼란, 끈기 있고 지칠 줄 모르는 핀란드인들은 조를 위하여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그리고 조의 몸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그에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조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그의 짙은 눈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다시 내 곁으로 끌어오려고 했다. 그를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그를 이곳에 붙잡아두려고 애를 썼다. 

사망선고는 호텔방이 아니라 나중에 로비소 병원(Loviso Hoapital) 인근의 응급실에서 이루어졌다. 입센의 희곡에 나오는 단역 배우처럼 보이는 젊은 의사가 양치식물의 잎처럼 길게 갈라진 청진기를 귀에서 빼더니 내게 말했다. “캐슬먼 부인, 이제 끝났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P378-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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