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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11. 2024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

영화 <자기 앞의 생>  2020년

마담 로사(La vie devant soi, 1977) - 모세 미즈라히

자기 앞의 생(La vita davanti a sé, 2020) - 에도아르도 폰티 연출, 소피아 로렌 주연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은 창녀의 아들로 아랍인인 열 살(실제로는 열네살)짜리 꼬마 모모(마호메드)와 전직 창녀로 아우슈비츠까지 갔다가 살아온 유태인이며 창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으로 먹고 사는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이다. 이 책 뒷부분에 붙어있는, 로맹 가리 사후에 발간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에밀 아자르가 본인임을 밝힌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Yâfiî, Raoudh al rayâhîn          (P7)   

  

집에 돌아와보니, 사람들이 뚜쟁이라고 부르는 포주, 은다 아메데 씨가 와 있었다. 이곳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이름만 들어도 우리집을 찾아오는 흑인들이 모두 아프리카 원주민들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파리 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탓에 아주 기본적인 위생시설이나 난방시설조차 되어 있지 않은 빈민촌에 살았다. 심지어는 한방에 여덟 명씩 백이십 명이 한집에 살기도 했는데, 변소는 아래층에 하나뿐이고, 그런 일은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보니, 사방 아무데나 싸대는 일이 허다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거리였는데, 프랑스 정부가 미관상 좋지 않다 하여 다 헐어버렸다고 한다. 로자 아줌마 얘기로는 오베르빌리에의 어떤 집에서는 한방에 꾸역꾸역 모여든 세네갈 사람들이 창문을 닫은 채 석탄난로를 피워놓고 잠을 자는 바람에 다음날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고 했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동안 난로에서 새어나온 가스에 질식사한 것이다. 나는 비송 거리로 세네갈 사람들을 보러 가곤 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들 대부분이 나처럼 회교도이긴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내가 아직 아무런 생각도 없는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나이든 사람들은 항상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법이다. 예컨대, 흑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 따위.           (P38-39)     


로자 아줌마는 그 낡은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교활한, 심지어는 정복자 같은 미소였다. 마치, 아주 치밀하면서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해낸 사람 같았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한쪽 구석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그것은 할 짓이 못 되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그녀의 천식에 먼지처럼 나쁜 건 없었으니까. 금세 호흡 곤란을 일으켰는지 그녀의 목에서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해서 비질을 했다. 말릴 사람은 나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물론 나를 돌봐주는 대가로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있긴 했지만, 로자 아줌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아무튼 천식에 먼지만큼 해로운 것은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빗자루를 놓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그 뚱뚱한 몸에는 촛불 하나 끌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촛불을 껐다. 나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할 일을 마쳤으니 이제 그녀가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더 늘었다는 사실 외에는, 로자 아줌마는 왜 한밤중에 지하실까지 기어내려가 먼지를 풀썩이며 비질을 하고 교활한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 있어야 했을까.                     (P44-45)     

다시 칠층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겁을 내고 있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분은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워 편안하게 정의로운 사람의 잠에 빠져 들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했던 말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틀린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늘, “내 오랜 경험에 비추어볼 때”라든가 “삼가 말하건대”라는 어려운 말을 했고, 그 외에도 나를 기분좋게 해주는 표현들을 아주 많이 썼다. 지금도 그런 말을 들으몀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내 조상의 언어’를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조상’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 이유는 나의 부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가 코란은 아랍인들에게 좋은 책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내게 코란을 읽게 했다. 언젠가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고 나를 증명해줄 서류 하나 없는데 어떻게 내 이름이 모하메드이고 아랍인인지 아느냐고 로자 아줌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P46)     


은다 아메데 씨는 침대에 한쪽 발을 얹어놓고 입에는 굵은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 아무데나 담뱃재를 떨어대면서 편지에 쓸 내용을 지껄여댔다. 그는 머지않아 나이지리아로 돌아가서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쓰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이란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믿게 되고, 또 살아가는 데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철학자 흉내를 내느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P63)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이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

아무튼 내가 지쳐 나자빠져 있을 때 그 사람들은 가버렸고, 로자 아줌마는 당장에 나를 카츠 선생님에게 데려갔다. 그녀는 파랗게 질려서 나에게 유전병이 있는 게 분명하고, 자는 동안 자기를 칼로 찔러 죽일지도 모른다고 횡설수설했다. 로자 아줌마는 왜 항상 자는 동안 누가 자길 죽일까봐 무서워했던 것일까, 마치 그 생각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아줌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양처럼 순한 아이를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그는 아줌마에게 서랍 안에 있던 신경안정제를 꺼내 처방해주었고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로자 아줌마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고 나서 나한테 괜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P65-66)    

 

약을 먹은 로자 아줌마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초인종 소리였다. 그녀는 독일인들을 아주 무서워했다.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이야기고 각종 신문에도 다 나왔던 얘기니까 내가 여기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아직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특히 한밤중엔 더욱 그랬다. 아줌마는 기억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모두 끝나서 땅속에 묻혀버린 지금까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유태인들은 끈질기다. 특히 몰살당한 사람들은 더욱 끈질겨서 자꾸 망령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줌마가 종종 나치의 친위대원에 대해 말해줄 때마다, 나는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나서, 나치 친위대원들에 대한 이런저런 일들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 유감스러웠다. 좀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왜들 그랬는지 그 이유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알 수가 없다.          (P68-69)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둥지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72)     

성홍열, 천연두, 그 밖의 전염병들은 병원으로 끌고 와서는 안 됐다. 그것들은 자기 집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 병이었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병원에 데려오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나도 거기에서 유행성감기와 백일해에 감염된 적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카츠 선생님이 나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의학은 바로 이런 때 소용 있는 것이다.            (P74)   

  

그녀는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는 엉엉 울었다. “너더러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라고 이때껏 키우진 않았다.” 아줌마는 이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울었다. 나는 다시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뚜쟁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녀에게 다짐해야 했다. 아줌마는 그런 짓들이 다 뚜쟁이 짓이며, 그런 꼴을 다시 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이 열 살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우편함은 여전히 오지 않았고 로자 아줌마는 저축해두었던 돈을 헐어 쓰기 시작했다. 노후를 대비해서 모아둔 돈이었는데 그녀 자신도 그리 오래 버틸 만큼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암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줌마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나의 엄마 아빠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내게도 부모가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 저녁에 나를 맡기러 왔는데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며 도망치듯 떠나버렸다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나에 대해 모하메드라는 이름과 회교도라는 사실을 메모했고, 나의 엄마에게 아이를 잘 돌봐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후에, 그후에는.... 그녀는 한숨을 쉬며 그게 자신이 아는 전부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내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P94-95)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네 엄마에게는 가진 게 좀 있다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 좋은 집안 출신이거든. 자기가 하는 일을 자식인 네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눈물을 머금고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지. 의학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런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네가 깊은 상처를 안게 될까봐 두려워했던 거야.”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창녀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P96-97)    

 

그러던 중 로자 아줌마는 그 아이를 입양할 가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은 아무튼 운이 좋다. 모세는 양자로 들어갈 집에서 잘 먹고 잘 지냈는데, 그 가족은 모세의 성격이 좋은지 혹시 이 아이에게 간질병이나 정신질환이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고 싶어 육 개월째 관찰중이었다. 아이를 입양하려는 가정에서 가장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이 정신질환이다. 입양되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질환이 없어야 한다. 로자 아줌마는 낮 동안 맡고 있는 아이들과 먹고살자면 한 달에 천이백 프랑은 있어야 했다. 그 외에 약값도 필요했고, 이젠 누가 주려고 하지도 않는 외상값까지 갚아야 했다. 아줌마 혼자 배를 곯아가며 빠듯하게 지낸다 해도 하루에 십오 프랑은 필요했다. 그녀에게 덜 먹으려면 살을 빼는 수밖에 없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상에 혼자뿐인 노친네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아줌마에겐 아무도 없는 만큼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다.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다.            (P98-99)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 지는 법이니까. 하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주사를 맞았을까만은 그 따위 생각을 가진 녀석은 정말 바보 천치다..... 아무튼 나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할거다. 빌어먹을, 이제 나는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 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P99-100)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과 머리이며, 그래서 그것들은 아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심장이 멎으면 사람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고, 뇌가 풀려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제힘으로 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된다.           (P101)    

 

나는 단박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그 유태인 할망구가 그렇게 황홀해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무척 놀라는 것 같더니 곧 행복에 빠져들었다. 마치 천국에 있는 듯 보여서 나는 아줌마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하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주사를 맞았을까마는 그따위 생각을 가진 녀석은 정말 바보천치다. 나는 절대로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P103)     


마지막 광대는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분신 하나를 매달고 있었는데,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하나도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 둘은 함께 묶여 있었기 때문에, 서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고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낙타에게조차도 호감이 갔다. 녀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마치 거드름을 피우는 중년 부인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다녔다. 무엇 하나 진짜가 없는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재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 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서커스를 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순간 경찰인가 싶어 뒤돌아봤다. 그런데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다섯 정도로 보였다. 꽤 괜찮은 얼굴에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에게선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너, 왜 울고 있니?”

“울지 않아요.”

그녀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럼 이건 뭐니? 눈물 아니야?”

“아뇨. 그게 어디서 나왔을까요?”

“글쎄, 내가 착각한 모양이구나. 이 서커스 정말 멋지지!”

“내가 본 서커스 중 최고예요.”

“근처에 사니?”

“아뇨. 난 프랑스인이 아니에요. 아마 알제리인인 거 같아요. 벨빌에 살아요.”

“이름은?”

“모모.”          (P110-111)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주머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P113-114)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무장강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사람들이 찾아내서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 그러나 세상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보살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떼지어 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굶어 죽기도 한다.     (P141) 

    

“약속해요.”

“카이렘?”

“카이렘.”

삼가 말하건대 카이렘. 유태어로 ‘당신에게 맹세한다’란 뜻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 그러나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내가 아직은 여기에 설명할 수 없는 저 민족적 대재난이 벌어졌다. 그 일로 나는 단번에 몇 살이나 더 나이를 먹게 되어 다른 문제와는 별개로 무척이나 기뻤다.           (P207)     


“아, 마침 우리 모모가 소식을 들으러 오시는군! 좋은 소식이란다. 아무튼 암은 아니거든. 모두들 안심하라고, 하하!”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예리한 심리학자인 왈룸바 씨가 가장 크게 웃었다. 로자 아줌마 역시 만족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자신의 생에서 그래도 뭔가 성공한 것이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지금은 무척 힘든 시기입니다. 이 가엾은 분의 뇌가 혈액순환 문제를 일으킬 때도 있고, 신장과 심장과 예전 같지 않아요. 그러니 잠시 동안이라도 널찍하고 좋은 방이 있는 병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까요!”   (P235)     

“모모...... 모모..... 모모.....”

그녀의 말은 이게 전부였지만, 나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똥오줌을 했는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혹시 내가 자기 때문에 구역질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모모..... 모모......”

“네, 로자 아줌마, 나 여기 있어요. 나만 믿으세요.”

“모모야....... 난 들었다.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어...... 날 데리러 올 거야......”

“아줌마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부아파 씨가 죽었어요.”

“무서워......”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잖아요.”

“구급차는.........”                          (P257)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어보니 겁이 났어. 네가 너무 빨리 큰 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미안하구나.”

나는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 팔로는 마치 여자를 안 듯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얼마 후 롤라 아줌마가 자움 씨네 맏형과 함께 왔다. 그들은 로자 아줌마를 일으켜서 옷을 벗기고 다시 바닥에 누인 뒤 몸을 닦아주었다. 롤라 아줌마는 로자 아줌마의 몸 구석구석에 향수를 뿌려 주었다. 가발을 씌우고 기모노를 입혀서 깨끗한 침대에 누이니 한결 보기가 좋았다.        (P261)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한동안 층계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내가 난쟁이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건 기뻤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언젠가 팔다리가 없는 앉은뱅이 사진을 본 적이 잇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는 걸 느끼기 위해 종종 그 사진을 떠올리곤 했다. 내게 팔다리가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곧이어 로자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도록 운동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도움을 청하려고 왈룸바 씨를 찾아갔지만, 그는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카드 점을 치는 로자 아줌마 옆에 앉아 있었다. 일터에서 돌아온 왈룸바 씨가 친구들과 함께 올라왔다. 그들은 로자 아줌마를 붙잡고 운동을 시켰다. 아직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가 방안을 걷게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부 기관을 움직여야 한다며 로자 아줌마를 침대 시트 위에 누이고 흔들어주었는데, 그러다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로자 아줌마를 커다란 인형처럼 뉘어놓고 무슨 장난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주 즐거워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녀는 거울을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남아 있는 서른두 가닥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안색이 좋아졌다고 축하해주었다. 그녀는 화장을 했다. 아줌마는 여전히 여자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리 못생겼어도 손질을 하면 조금은 나아 보이는 법이다. 로자 아줌마가 미인이 아니라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화장을 잘하니까 아주 예쁜 여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거울을 보고 미소지었다. 그녀가 자기 모습을 보고 끔찍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P274-275)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는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P299-300)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311)

     

우스운 순간들이 있었다. 특히 폴 파블로비치가 내 뜻대로 하지 않고 내게 원고를 요구했을 때, 그리고 나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그에게 초고만, 그것도 복사를 하고서 넘겨줬을 때가 그랬다. 내가 나중에 금고에 보관했던 앞서 말한 원고들을 진 세버그가 포장하는 모습은 정말 웃지 못할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문학세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오촌조카 에밀 아자르를 약간 질투하고 조금은 슬퍼하고 있는 로맹 가리가 불쌍하다는 말들이 사교계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흘러나와 내 귀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에서 나 자신의 쇠퇴를 고백하게 되고.....

그동안 즐거웠다. 안녕. 그리고 감사한다.

1979년 3월 21일 로맹 가리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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