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잎새> 2004년
한국영화 <O헨리의 마지막 잎새>(1978)
워싱턴 광장 서쪽의 한 작은 구역은 도로들이 정신없이 얽히고설켜서 좁고 길쭉한 골목길들로 토막 나 있다. ‘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이 골목길들은 어찌나 기묘한 각도로 희한하게 휘어져 잇는지, 길 하나에 한두 번쯤은 반드시 다시 같은 길과 교차하곤 한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화가가 이 거리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물감이나 종이, 캔버스값에 대한 청구서를 든 수금원이 이 구역에 들어왔다가도, 결국 외상값 한 푼 받지 못한 채, 다시 길을 돌아 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아닌가!
그리하여 화가들은 곧 이 기묘하고 오래된 그리니치빌리지로 몰려들더니 북향 창문과 18세기풍의 박공지붕, 네덜란드식 다락방, 그리고 값싼 셋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6번가에서 풍로가 달린 냄비와 백랍 잔 등을 들여와서 ‘예술인 동네’를 만들었다.
야트막한 3층 벽돌 건물 꼭대기에 수와 존시의 작업실이 있었다. ‘존시’는 조애너의 애칭이었다. 수는 메인에서, 존시는 캘리포니아에서 왔다. 두 사람은 8번가에 있는 델모니코 식당의 공용 식탁에서 만났는데, 예술과 치커리 샐러드, 비숍 소매 등에 관한 그들의 취향이 너무나 잘 맞는 것을 알고는 작업실을 함께 쓰기로 했다.
그때가 지난 5월이었다. 11월이 되자, 의사들이 폐렴이라고 부르는, 차갑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손님이 이 예술인 동네를 배회하며 그 얼음처럼 싸늘한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사람들을 건드리고 다녔다. 이미 저 건너편 이스트사이드에서는 이 약탈자가 마구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여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나마 이 미로 같은 비좁고 이끼 낀 동네에 들어와서는 발걸음이 느려진 편이었다.
이 폐렴 씨로 말하자면, 결코 점잖은 신사는 아니었다. 하물며 캘리포니아의 서풍에 허약해진 작고 어린 아가씨가 어떻게 가쁜 숨을 몰아대며 무자비한 주먹을 휘두르는 이 늙은 떠돌이와 정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존시는 결국 그 작자에게 얻어맞았다. 그리하여 페인트칠을 한 철제 침대에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누워서 조그만 네덜란드식 창문 너머로 밋밋한 옆집 벽돌 담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분주한 의사가 북슬북슬한 회색 눈썹으로 눈짓을 하여 수를 복도로 불러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아가씨가 나을 가망성은 열에 하나 정도요.”
의사가 체온계를 흔들어 수은을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P94-95)
수가 우아한 승마 바지를 입고 외알 안경을 낀, 소설 주인공인 아이다호의 카우보이를 그리고 있는데,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수는 얼른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존시는 두 눈을 활짝 뜨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뭔가를 열심히 세고 있었다. 그것도 숫자를 거꾸로 꼽으면서.
“열둘.”
존시는 이렇게 숫자를 세더니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열하나, 열.”
그러고는 ‘아홉’, 그다음에는 ‘여덟’, ‘일곱’이라고 거의 동시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수는 걱정스럽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세고 있는 걸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헐벗고 쓸쓸한 앞마당과 20야드쯤 떨어져 있는 텅 빈 벽돌담뿐이었다. 그리고 옹이가 지고 뿌리가 말라비틀어진 오래된 담쟁이덩굴 하나가 벽돌담 중간쯤까지 뻗어 올라와 있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덩굴에 붙은 잎사귀들을 거의 다 떨어뜨렸고, 해골처럼 앙상한 가지만이 헐벗은 채 울퉁불퉁한 벽돌에 달라붙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수가 물었다.
“여섯.”
존시가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제 점점 더 빨리 떨어지고 있어. 삼 일 전만 해도 거의 백개쯤 달려 있었는데. 그래서 그걸 세려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쉬워. 저기 또 하나가 떨어지네. 이제 딱 다섯 장밖에 안 남았어.”
“뭐가 다섯 장이라는 거야. 여기 수디에게 말해 봐.”
“나뭇잎 말이야. 담쟁이덩굴에 붙은 나뭇잎.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질 때, 나도 떠나야만 해.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의사 선생님이 너한테 말씀하지 않으시던?”
“세상에 이런 황당한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본다.”
수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대체 저 늙어빠진 담쟁이덩굴이 네 병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더구나 넌 저 담쟁이덩굴을 무척이나 좋아했잖니. 멍청하게 좀 굴지 마. 오늘 아침에 의사 선생님 말씀이, 네가 곧 완전히 회복할 가망이...... 그러니까 정확히 선생님 표현대로 하자면, 열에 하나라고 하셨어. 우리가 뉴욕에서 전철을 타고 다니거나 새로 짓는 건물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무사할 가망성과 비슷한 확률이지. 그러니 이제 이 죽을 좀 먹어봐. 그리고 수디는 다시 그림 그리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줘. 그래야만 편집장에게 이 그림을 팔아서 아픈 아이에게는 포도주를 사주고 탐욕스러운 자기 자신에게는 폭찹을 사줄 수 있지.”
“이젠 더 이상 포도주를 사지 않아도 돼.”
존시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 중얼거렸다.
“또 하나가 떨어졌네. 싫어. 죽도 먹고 싶지 않아. 이제 나뭇잎은 딱 네 장 남았어. 나는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럼 나도 떠날 거야.” (P97-98)
수는 어두침침한 아래층 골방에서 노간주나무 열매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베어먼 노인을 찾아냈다. 방 한구석에는 텅 빈 캔버스가 이젤 위에 놓인 채로 걸작의 첫 획이 그어지기를 25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수는 노인에게 존시의 엉뚱한 생각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는 세상과의 끈이 점점 더 약해져서, 정말로 나뭇잎처럼 가볍고 연약하게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베어먼 노인은 붉게 충혈된 눈에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그런 얼빠진 상상에 대해서 욕설과 조롱을 마구 퍼부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말라비틀어진 담쟁이덩굴에서 잎사귀 좀 떨어진다고 자기도 죽겠다고 하는 그런 멍청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말은 나 태어나고 생전 첨 들어보는구먼. 싫네. 아가씨처럼 바보 멍충이 같은 친구의 모델 노릇은 절대 안 할 테니까 그런 줄 알게나. 어쩌자고 자네는 친구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아이고, 불쌍한 존시 양.”
“존시는 몹시 아프고 몸이 허약해졌어요.”
수가 말했다. (P100)
“마지막 잎새야.”
존시가 말했다.
“분명히 밤사이에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람 소리를 들었거든. 어쨌든 오늘은 떨어질 거야. 그럼 나도 함께 죽을 거야.”
“존시, 존시!”
수가 지친 얼굴을 베개 쪽으로 숙이며 말했다.
“네 자신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 날 생각해 줘. 난 어떻게 하라고?”
그러나 존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온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고독한 존재가 바로 이 신비스럽고 머나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한 영혼인 것이다. 우정과 이 땅에 그녀를 연결하고 있는 끈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이런 망상이 점점 더 강력하게 그녀를 사로잡는 것 같았다.
그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러나 어스름한 땅거미 속에서도 홀로 남은 담쟁이덩굴 이파리가 담벼락 위의 줄기에 딱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밤이 되었고, 사나운 북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한편 빗줄기가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며 나직한 네덜란드식 처마 밑으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날이 밝아오자, 존시는 가차 없이 창문 가리개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담쟁이덩굴 잎새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P102)
“우리 생쥐 아가씨, 할 말이 있어.”
수가 입을 열었다.
“오늘 베어먼 씨가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어. 겨우 이틀 앓다가 돌아가셨대. 첫날 아침에 관리인이 아래층 그분 방에서 꼼짝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베어먼 씨를 발견했대. 신발이랑 옷이 몽땅 젖어서 얼음처럼 차가웠다는 거야. 대체 날씨가 그렇게 험악한 밤에 어디를 나갔다 왔는지 다들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 그런데 여전히 불이 밝혀져 있는 등잔을 발견했지.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끌고 나온 사다리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붓들, 초록색과 노란색 물감을 섞어놓은 팔레트도 발견되었어. 수, 저 창밖을 좀 봐. 담벼락에 붙어 있는 저 마지막 잎새 말이야. 바람이 부는데도 전혀 펄럭거리지도 않고 미동도 하지 않는게 이상하지 않았니? 아, 사랑하는 존시, 저게 바로 베어먼 씨의 걸작이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그날 밤, 저 자리에 저걸 그려놓으셨던 거야.”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