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의 『건투를 빈다』책에서, 배낭여행 중 미술관에 들어가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_1937>를 보고 기대에 못 미쳐 실망했다는 경험담을 본 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_1503>처럼 가장 유명한 대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 그 이미지는 이미 책이나 인터넷 등에서 많이 본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책자의 인쇄물이나 모니터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대작 원본의 감동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런 감동이 없었고, 실망한 그는 그 원인을 이미 지나가버린 감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작품을 보고 그득하게 느낄 수 있는 때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떤 시점으로 한정돼 있고 그래서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접해야 하는 적합한 타이밍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때 굉장히 감동스럽고 재미있게 봤던 영화가,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전혀 그때의 느낌이 안 살아날 때가 있다. “왜 내가 이걸 재미있게 봤었나?” 내가 수준이 높아진 건지 아니면 세상에 찌들어 닳고 닳아서 그러는 것인지, 그때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대사와 장면들이 이제는 너무나 유치하고 진부하며 허공의 외침처럼 들리는 때가 있다. 그런 경험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어준의 그런 생각도 충분히 일리는 있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원래 그저 감동이 안 오는 작품일 뿐이다. 그것은 감동을 강요하고, 그런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적당히 그런 척해주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감성의 예민함이 최고조일 때 그 작품을 봤다면 울면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더 열받아서.
피카소의 작품은 원래 감동이라는 기준으로 감상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감상 방식과 감동의 기대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이라는 것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개척해 내는 것이며, 피카소라는 이름의 무게는 전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것이니, 이해가 안 가고 불만이 좀 생겨도 적당히 이해하는 척 고개 끄덕이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극장의 우상’(권위에의 호소)에 반대하고 솔직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장난치는 것 아니냐고 했다가는, 개망신당하고 미술도 모르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니 그냥 적당히 고개 끄덕거리는 액션 정도 취해주면 무난하다. 혼란스럽다면 나와서 실망스럽고 복잡한 마음 달래며 담배 한 대 피워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책 없이 불평하고 비판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미술 엄숙주의와 신비주의 등에서 빠져나와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다. 원래 감동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작품인데 감동의 요소를 찾고 있는 것은, 일식집에 가서 짜장면 주문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엄청 대단한 무엇이 숨겨져 있을 것 같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것은 없다.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데 술래가 열심히 진지하게 구석구석 숨은 피카소를 찾아봐도, 피카소는 이미 한참 전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러서 집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순진하게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다.
포장지는 예쁜데 내용물이 별거 없는 경우는 많다
세상에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처럼 포장돼 있지만 알고 보면 별거 없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다. 반대로 별거 없을 것 같은 데 무언가가 있는 반전의 경우도 있지만, 전자의 경우가 더 많다.
예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서, 공부를 꽤 많이 한 지식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며 자신 없어하고 겸손하게 미술품 감상 경험담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다. 그만큼 미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막연한 경외감과 권위 부여의 대상이다.
아무튼 얘기인즉슨 대략 400억 정도 하는 국보급 미술품을 봤는데, 이런 대작을 봤는데도 자신의 교양과 안목이 얕아서인지 뭐가 좋은 것인지 모르겠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저열한 안목을 가진 자신을 책망하며, 나중에 미술 공부를 더 하고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안목을 키운 후에 다시 그 작품을 다시 한번 꼭 감상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공부라는 것은 별거 없다. 그 작품이 왜 위대한 작품인지 현학적 단어들로 작품에 펌프질 하는 비문 표현을 반복해서 읽으며, 당연히 이해가 갈 수 없으니 표현 자체를 그냥 외워버리는 것이다.
미술 감상을 보물찾기 놀이에 비유하자면, 보물찾기 쪽지가 원래부터 없는데, 숨겨놨으니 찾으라고 해서 매우 최선을 다해서 찾고 있는 것이다. 답이 있을 리 만무한 아무렇게나 찌끄린 무책임한 문제를 받고, 정답을 도출하기 위해 영혼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아 이 게임은 그냥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그냥 문제를 막 던지는 재미로 그 맛에 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아 이것은 그냥 막 던진 문제이니 답을 찾아봐야 별 소용이 없겠구나!” 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진지한 사람들은, “그럼 사기잖아?”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속여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게임의 룰을 오픈하고 서로 인지한 상태에서 지적인 유희로서 그것을 하고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들이고 행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하다.
문제는 그 게임의 룰을 잘 모르고 진지한 답변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진지하고 기대에 찬 얼굴들과 질문들에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어서 기대에 부응하는 답변을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서 제시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