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라는 단어와 그것의 개념만큼 불확실하고 무책임한 것은 없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것을 궁금해하고 추적하고 그것에 다가가려 하는 일이 예술가들이 하는 일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약간의 통찰력만 가지고 사물이나 상황을 주시하면 그것의 본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본질을 찾으려 하면 안개에 싸인 듯 더욱 불확실해지고 몽롱해진다.
예를 들어서 의자의 본질, 필기도구의 본질, 의복의 본질, 광고의 본질 등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사람들마다의 의견 차이가 거의 없다. 답의 개수가 복수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무의 본질, 사랑의 본질, 세상의 본질, 예술의 본질 등은 쉽게 알 수가 없고 정의 내리기도 힘들다. 정의 내린다고 해도 사람들마다 생각의 차이가 크고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미술은 후자의 경우를 소재로 삼는다. 모호하고 알려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들 말이다.
본질은 이것이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은 사물의 본질이 순간적인 색채에 있다고 생각했다. 동터오는 새벽녘에 보는 성당과 노을빛 낀 저녁에 보는 성당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나이트 조명 아래에서 보는 그녀의 얼굴과 햇빛 아래 드러난 얼굴이 완전히 딴 사람인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클로드 모네 (1840-1926)
인상주의자들과 어울리던 사과 덕후 세잔은 계속해서 사과의 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사과는 먹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 또는 그리는 것이라면서 (그냥 내가 한 말이니 어디 가서 세잔이 그랬다고 하지는 마시길.) 입체주의의 다시점 그림을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림이 꼭 소재의 묘사에 그쳐야 할 이유는 없다며 조형성만으로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추상 미술로 가는 트리거 역할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대상의 본질에 닿겠다면서 근원적이고 기하학적 형태인 구, 원뿔, 원통 등으로의 환원에 도착했다. 얼굴은 달걀이고 팔, 다리는 원통이고, 산은 원뿔이라는 것이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구조화시키면서 본질에 닿고 있다고 세잔은 생각한 것이다.
폴 세잔 (1839-1906)
쉽게 이야기하면 세잔은 인간의 본질이 졸라맨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을 단순화시키면 졸라맨이 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가 몰랐던 것인가?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술은 이렇게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새롭게 환기시키는 일이다. 봤던 영화를 너무 잘 기억하면 또 볼 필요가 없지만, 무슨 내용인지 까먹었다면 결국 처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새로운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는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이겠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고 깊은 깨달음이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서 다른 기준과 토대 위에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기에 그 시대의 기준과 패러다임으로 보려 하면 더욱 그 미술에 대해 가까이 가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주의자들은 2차원 평면에다가 3차원 공간을 점하고 있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실험 끝에, 육면체를 펼쳐서 전개도로 보여주듯이 입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면들을 각각의 시점에서 본 것처럼 펼쳐서 그렸다. 컨셉은 그런데 정교하게 그것을 실행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그냥 막 그린 것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것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우겼다.)
조르주 브라크 (1882-1963) 피카소와 함께 활동했던 입체주의자
칸딘스키는 미술의 본질은 점, 선, 면, 색채에 있으며 그것들만으로도 미술은 충분히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
몬드리안은 사물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개념과 외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과 면, 삼색이라는 근원적인 조형요소를 통해 세상의 본질을 담을 수 있다는 신조형주의를 주창했다.
피트 몬드리안 (1872-1944)
말레비치는 입체주의는 2차원 캔버스에다가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3차원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언인가 계속해서 고민했다. 마침내 그는 사각형과 검은색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는 위대한 결론을 내렸다.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
미니멀리스트들은 사물의 본질이 ‘그냥’에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절제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냥’을 추구한 것이다.
도날드 저드(1928-1994) 미니멀리즘 대표 작가
이렇듯 미술에서 추구하는 ‘본질’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며, 정답이 없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는 것이다. 정확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럴듯한 논리와 설득력이 있으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