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과 처음으로 헤어질 생각이 들었던 건, 함께한 첫 여행지인 태국 코펜냥(Koh Phangng)에서였다. 그가 바닷가로 가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나도 좋아”라며 동의했다. ‘이틀 정도 바닷가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일주일 내내 바닷가에서만 시간을 보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나는 이미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얼마 남지 않은 선크림과 씨름 중이었다. 인내해 보려 했지만, 여행의 설렘은 점점 사라져 갔다. 아침 7시부터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수영도 못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잠시 발을 담그거나 조개껍질만 주웠다. 그러다 결국 폭발했다.
“쇼핑은 언제 가냐고? 말린 망고도 좀 먹고, 이 나라 사람들은 뭐 먹고 사는지도 좀 구경하자고. 호텔에서 하루 종일 있는 게 무슨 휴가야?”
“그게 휴가지, 뭐가 휴가야? 꼭 뭐를 사야 해?”
"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잖아. 근데 왜 휴양지에서 읽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덧붙였다.
호텔은 시내까지 무료 셔틀을 운행했지만, 쇼핑을 하자고 하면, “난 쇼핑 싫어”라고 단칼에 거절했다. 혼자 가겠다고 채비하면 나를 맘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며 소 고뿔 꿰러 가는 듯한 표정으로 따라오긴 했다.
런던에서 방콕까지 12시간, 다시 코사무이(Koh samui)까지 비행기로 1시간을 가서 배도 2시간을 탔다. 너무 많은 사람이 매달려있어서 펑크가 날 것 같은 닭장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코팬냥이 었다. 가는 길은 섬으로 팔려 가는 기분이었다. 산을 넘고 물도 건너왔는데 매일 바닷가라니 사춘기 소녀처럼 심술이 나고 속이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위안은 물속에서 흔들리듯이 보이는 하얀색의 산호들이었다. 흰 불가사리 모양이나 나뭇가지 모양 같은, 바다가 만들어낸 흰색의 예술 작품들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물안경도, 물놀이용 신발도 없이 비치 홀리데이를 따라왔다. 수영도 못 하는 내가 바닷가를 즐기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산호를 발로 밟았고, 발바닥에서부터 번지는 붉은색의 피가 바닷물로 퍼져 나갈 때,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깊은 바다에서 유유자적 혼자 수영을 즐기고 있는 그가 야속하고 얄미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에게 이 여행이 맘에 들지 않음을 침묵으로 시위했다.
“말도 없이 혼자 들어와 버리면 어떻게 해? 한참 찾았잖아.”
“……”
다친 발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나의 침묵에 그는 피 묻은 휴지와 다친 나의 발을 보고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소리를 질러야만 큰 싸움이 아니다. 그는 걱정의 말을 해주지 않았고,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무섭게 싸웠다. 비싼 비용을 들였는데, 서로가 즐기지 못하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그와 나의 여행 스타일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 같았다. 나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면 현지 음식, 물건,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궁금했다. 쇼핑도 해야 하고 유명한 유적지도 가보고 야시장에서 기념품도 사야 했다. 바닷가에서는 요트를 빌려 타거나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아했다. 이 남자의 7박 8일간의 여행 일정은 아침부터 밤까지 해변, 수영장, 책, 마사지가 무한 반복된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는 것이 그의 여행 스타일이다. 해변가에 위치한 호텔과 그의 애착 베개만 있으면 휴가는 완성됐다. 동화책 속 작은 완두콩 한 알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공주처럼, 호텔 베개 안에 뭐라도 들어 있는지 자신의 베개가 아니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 ‘베개님’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다. 이안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 4권, 구입한 책 2권, 수영복, 여름용 유니폼이 되어 버린 같은 디자인의 반바지 2벌, 티셔츠 2벌만 챙겼고 베개만 넣으면 가방이 꽉 찼다. 자질구레한 여행용품 챙기기는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이렇듯 여행 스타일도 준비물도 정반대인 우리는 합의점을 찾기 위해 여행 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이 싫었는지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화가 난 이유도 희미해지면서 좋은 추억이 나쁜 기억을 밀어낸다. 여행 당시에 이야기를 나눴다면 합의점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감정만 해치는 불평을 늘어놓았을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것을 3가지 고른다. 공통되는 것이 있으면 최우선으로 두고 공통되지 않더라도 함께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골랐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상대가 혼자 할 수 있게 시간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여행지에서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수영을 할 수 있고 책을 읽으며 머리를 쉬게 해주는 여행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안도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짝꿍을 위해 예쁜 머리핀도 산다.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법도 배웠다. 여행에서 무엇이든 같이 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혼자만의 시간도 함께하는 시간만큼 서로에게 필요했다. 내가 다음 여행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은주베어,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그는 나의 든든한 여행 짝꿍이다.
* 이안은 ‘은주베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