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에서 만난 사람들

노르웨이 피오르 크루즈

by 은주

밤이 되면 크루즈는 색을 입는다. 연한 보라색에서 연두색, 때로는 노란색으로 바뀌며, 6층 중앙의 메인 홀이 빛난다. 그곳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결혼식에서나 흘러나올법한 노래를 부르는 남자 가수는 연인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달달한 연인들의 노래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주로 밤 10시 이후엔 라임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다. 작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5인조 라이브 밴드 공연은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했다. 드럼, 키보드, 베이스, 전자기타가 어우러진 사운드는 클럽 전체를 흥으로 가득 채웠다. 콜드플레이의 히트곡부터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퀸의 노래가 나오면, 모두가 하나 되어 후렴을 따라 불렀다.

무대용 조명이 알록달록하게 켜지면, 리듬을 주체하지 못한 여성 두 명이 무대로 뛰어 나와 춤을 추곤 했다. 흥은 넘쳤지만 박자를 자꾸 놓쳐서 보는 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게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아바의 ‘Dancing Queen’이 나오면 나도 엉덩이에 용수철이라도 단 듯 무대로 달려 나가 신나게 춤을 췄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원을 그리며 손뼉을 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오른쪽, 왼쪽으로 함께 리듬을 맞췄다.

아쉬운 점은 공연이 항상 40분으로 짧았다. 크루즈의 공연은 지루해지지 않도록 길게 하지 않는다. 다채롭고 짧은 무대들로 구성된다.


밴드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안의 생일날, 라임 나이트클럽에서는 저녁 식사를 하며 뮤지컬 갈라 공연을 감상했다. 무대 위에는 전직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 역을 맡았던 켈리 매티슨(Kelly Mathieson)이 있었다. 뮤지컬에 문외한이던 나에게 처음으로 공연의 세계에 빠지게 한 작품의 주인공을,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되었다.

영국 배낭여행 중, 모두가 좋다기에 유행처럼 한 번쯤은 봐야 할 것 같아 긴 줄을 서며 관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봤다’는 데 의미를 뒀지만, 지금은 켈리의 목소리, 표정,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감은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녀는 나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선물했다.


그곳에서 자주 마주치던 사람들도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음향 엔지니어 아론과 치공사 헤이리 커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유쾌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론은 종종 음향 장비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곤 했는데, 그의 모습에서는 음악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피오르 크루즈는 말이 필요 없는 공간이다. 그곳의 침묵은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선실 신문 <Horizon>을 보다가 피아노 연주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이름이었다. 크루즈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어서 호기심이 생겼다.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망설이는 나에게 이안이 옆구리를 찌르며 인사하라고 부추겼다. 내가 타이밍을 보고 있는데 이안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자신의 부인이 한국 사람이라고 자랑하듯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곤 나를 부르며 와보라고 손짓했다. 알고 보니, 그 한국인은 이 큰 배의 모든 음악을 총괄하는 감독이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녀가 안내해 준 배의 뒤편 공간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710 클럽’은 피아노 기타 드럼 3인조 밴드가 재즈, 블루스, 소울이 어우러진 노래를 부른다. 고급스러운 칵테일 바 같았다. 이곳에서는 ‘계엄커플’ 줄리와 마크를 자주 만났다. 그들은 비 오는 날 하이킹을 같이 한 커플이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계엄령이 발표된 12월에 한국 여행을 다녀갔고, 계엄령이 해제된 4월에 또다시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붙인 별명이었다.

“무섭지 않았어요?”
“전혀요. 콘서트 같았어요. 한국은 사람도, 음식도, 도시도 모두 좋았어요.”

내 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했지만, 그건 지나친 우려였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도시도 좋아진다. 그들이 한국을 좋아했던 것처럼, 나도 노르웨이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사진 찍는 팁을 알려준 여행 인플루언서, 걷기 힘들어하던 어르신을 도와주던 중년의 남성, 혹시 놓칠까 봐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던 사람, 티와 어울리는 쿠키를 추천해 주던 여자.

여행은 혼자라도 친구가 생긴다.
Iona에서의 여행은 단체 관광이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참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되고, 취향이 맞는 이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거나 공연을 보기도 했다.

크루즈는 거대한 떠다니는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작은 마을처럼 관계가 빨리 형성되는 곳이다. 아침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사람이 저녁에 같은 공연장에 있을 수도 있고, 낮에 수영장에서 마주친 사람이 밤에는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함이 쌓이면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어느새 새로운 이와의 만남은 하루의 일부가 되었다. 다시 만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서로의 여정을 함께했던, 같은 배를 탄 선원들이었다.



keyword
이전 09화Sea day – 바다 위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