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day – 바다 위의 하루

노르웨이 피오르 크루

by 은주

노르웨이에서 영국으로 돌아갈 때, 배는 32시간가량을 쉼 없이 달린다. 그것을 일컬어 Sea day라고 한다. 32시간 배에서 있어야 하니 지루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바다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요가, 라인댄스, 필라테스 같은 액티비티들로 24시간이 모자란다. 크루즈의 프로그램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다시 밤까지 이어지지만 나는 저질체력을 원망하며 오전에만 참석했다. 필라테스 후 수영장 옆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선베드 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에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해 질 녘에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끝없는 수평선 너머로, 건물도 사람도,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 탁 트인 공간이다. 크루즈 중 자주 애용했던 곳이다. 그 옆 공간에는 따뜻한 물이 퐁퐁 나오는 ‘월풀(Whirlpool)이 있었다. 낯선 이와의 대화가 그리워질 때는 월풀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노르웨이 여행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남편을 두고 혼자 여행 중인 미국인 중년 여성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영국을 거쳐 노르웨이로 이어지는 여정을 풀어놓았다. 그녀의 왼쪽 옆으로 스코틀랜드 악센트가 강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따뜻한 물 안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에 침이 꼴깍 삼켜졌다. 셋을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미국 발음과 영국 발음의 차이를 제스처까지 흉내 내며 미국 여행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감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 나는’이라고 입을 떼는 순간,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정지되며 6개의 반짝이는 눈이 나를 쳐다봤다. 나의 이야기가 궁금했나 보다.

“나는 크루즈가 처음이야. 나이 든 사람만 즐긴다는 편견이 있었거든.”

“오 – 노노노” 앞다투어 노를 외친다.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용한 분위기의 IONA는 중년에 즐기기 좋고 조금 더 시끌벅적한 MSC는 20-30대가 많고 약간 비싼 프린세스 크루즈가 서비스는 좋다고 한다. 그리스섬을 도는 크루즈 투어나, 캐리비안 투어를 추천받았다. 다음 크루즈를 위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배에도 면세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멀버리 백을 좋아한다. 약간 망설이면 포기해야 하는 공항과 달리 크루즈는 7박 8일 동안 면세점이 열린다. 점심 먹으러 갈 때, 아침 조깅 갈 때 매일 지나치니 맘에 두고 있는 백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하루 종일 배에만 머무는 마지막 날에 결국 샀다. 기념품이나 면세품을 사면 선실 번호와 이름을 적은 쪽지를 투명한 플라스틱 박스에 넣어 준다. 마지막 날의 이벤트 중 하나는 제비 뽑기였다. 사실 이런 운이 좋은 편이 아니라 큰 기대는 하지는 않았다. 경품은 3등 크루즈 백과 인형, 2등 후드 티와 크루즈 모형, 그리고 1등은 이 배에서 직접 생산된 진(Gin) 한 병이었다. 1등 발표 순간, 어차피 당첨은 아니겠지 싶어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사회자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으…’ 하며 ‘은주’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혹시나 싶어 멈춰 섰다. 그러더니 “Ms. Song”을 외친다. 설마? 내가 넣은 번호가 1등이었다. 소리를 지르자, 2등에 당첨된 일흔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당신 진 못 마실 것 같은데, 내 거랑 바꾸자”라고 했다. 이안은 혹시 내가 바꿀까 싶었는지 “얘 진 마실 수 있어요”라며 웃으며 막아섰고,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인생 최초의 ‘공짜’ 당첨이었다. 주최 측은 진을 건네며 ‘배의 향기를 담은 술’이라고 설명했는데, 그 말이 낭만적으로 들렸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일몰시간인 10시 45분까지는 환해 하루가 길었다. 오늘의 하루는 삶의 축소판이었다. 사람과의 만남, 음악과 이야기, 기대치 않던 행운. 바다 위라는 특별한 공간은 일상의 벽을 허물었다. 모르는 사람과 쉽게 친구가 되고, 월풀에 혼자 앉아 있을 때도 대화 상대가 나타났다. 낯선 프로그램이 내 취미가 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지 않던 내가 흥에 겨워 자발적으로 춤을 추기도 했다. 마음이 쌓아 올린 경계를 허물자,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keyword
이전 08화스타방에르 Stavanger - 떡볶이와 만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