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피오르 크루즈
크루즈 여행의 설렘이 절정에 달했던 날, 우리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 스타방에르(Stavanger)에 도착했다. 작은 포트가 8000명을 태운 배가 들어 서니 꽉 차 보였다. 바다 위에는 오렌지색 둥근 머리의 해파리 무리가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얇은 흰 막이 물결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운 좋게도 우리가 도착한 날은 스타방가 푸드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거리 곳곳엔 여러 나라의 향신료와 달콤한 초콜릿 향, 치즈 냄새가 어우러져 코끝을 자극했다.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 시키는 데는 음식이 한 몫한다.
수많은 음식들 사이, 유독 눈에 띄는 부스 하나가 있었다. 태극기 모양으로 디자인된 대한민국 부스였다. 매콤한 고추장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떡볶이와 만두’라는 한글 메뉴판이 반가웠다. 글자만으로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건 추억의 힘일 것이다.
초등학교 앞 분식집에서 친구와 나눠 먹던 떡볶이, 아침마다 떡볶이 사 먹으라며 100원을 손에 쥐여주고 출근하셨던 아버지, 떡볶이를 평생 먹고 싶어 나중에 분식집 사장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어린 시절의 나. 음식은, 언제나 추억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줄을 섰고,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 용기를 받아 들었다. 아침도 푸짐하게 먹고 나왔는데, 또 이렇게 잘도 들어간다. 배는 불렀지만 입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양념이 잘 배어 있었고, 떡은 쫄깃쫄깃했다. 간간이 들어 있는 어묵을 건져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지난 6일 동안 밍밍한 서양 음식만 먹었던 터라, 불향 가득한 매콤한 음식이 들어가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낯선 도시, 낯선 페스티벌 속에서 만난 익숙한 맛은, 그렇게 스타방에르의 떡볶이는, 다시 추억이 되었다.
만두는 이안의 추억이었다. 첫 한국 여행에서 대부분의 음식은 맵고 자극적이었지만 만두만큼은 그의 입맛에 딱 맞았다. 만두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육즙이 가득해, 외국인들에게도 부담 없이 먹는 음식이다. 그는 자칭 ‘만두 킬러’다.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만두’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요즘은 해외 어디를 가든 한국 음식을 찾는 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신기한 건 현지인들도 젓가락질이 제법 능숙하다는 것이다. 한국인끼리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것도 잠시, 우리는 다시 배로 돌아가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우리는 작은 보트들이 모여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뤼세피오르드(Lysefjord)와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을 감상하는 코스였다. 스타방에르 항구에서 출발한 보트는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피오르드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금문교를 본떠 만든 듯한 긴 다리와 양 떼 목장 양들은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배는 양쪽으로 솟아오른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 사이에서 잠시 멈췄다. 604m 높이의 절벽은 프레이케스톨렌 일명 '설교단‘ 이름은 바위의 형상이 설교단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하이킹하는 이들이 중간 기점에서 내렸다. 그들은 아마 이 피오르드를 아래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경험을 할 것이다.
https://blog.naver.com/sudinnie/223743773103 디지지니 기록장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보트가 점점 깊숙이 들어서자, 절벽 위에서 풀을 뜯는 야생 염소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곳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모습은 동화 속 장면처럼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염소들은 계절마다 절벽을 오르내리며 살아간다고 한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배 쪽으로 걸어 내려와 가이드가 주는 우유를 받아먹는다. 아마도 관광객들에게 염소를 더 보여주려는 보트 투어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덕분에 나도 노르웨이 염소 사진을 찍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서 사는 염소가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모순 같은 상황이었다.
보트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거대한 폭포 아래로 다가갔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물줄기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렸고, 차가운 물방울이 바람을 타고 얼굴을 적셨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였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 밀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트의 위치가 바뀌자, 폭포의 물살도 방향을 바꾸며 우리를 흠뻑 적셨다. 불쾌함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작다.
보트 투어가 끝난 뒤, 우리는 아직 다 둘러보지 못한 푸드 페스티벌의 나머지 구역을 보기 위해 다시 걸었다. 그러나 그쯤에서부터 ‘바가지요금’이라는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99% 땅콩으로 만든 수제 땅콩버터 300g의 가격을 묻자 15유로였다. 핸드메이드라고 강조했지만, 다른 두 곳에서도 똑같은 제품을 팔고 있었고, 가격은 22유로였다. 15유로도 비싸다 느꼈지만, 같은 제품을 세 곳이 동시에 판매하며 모두 ‘핸드메이드’라고 주장하니 믿음이 가지 않았다. 기꺼이 지갑을 열려던 마음이 닫혔다. 페스티벌 초반의 설렘도 서서히 사라졌다.
치즈를 산 뒤엔 더 사고 싶은 물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날씨 때문인지, 발걸음에는 피로가 느껴졌다. 그 와중에 반가웠던 건 페스티벌 안에 식수대를 설치해 둔 점이었다.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대부분은 물조차 돈 주고 사 마셔야 하기에, 주최 측의 작은 배려에 조금 전의 불쾌함도 누그러졌다.
배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활기찬 부스들과 초콜릿 입힌 딸기, 진열된 치즈들로 가득한 축제처럼 보였다. 기대와 현실 사이엔 작지 않은 간극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그리고 페스티벌 또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