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아이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는 화창한 어느 10월의 아침, 카푸치노 위 첫 거품 한 모금 마시는 것만큼 발코니에서 들이키는 아침 첫 공기가 부드럽다.
요즘 나는 다시금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즐겁고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새로운 하루는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단조로운 일상에 가족 외 만나는 사람도 정해져 있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쳇바퀴 굴러가듯 수없이 해본 일들을 그저 해내는 것이 매번 새로워 설렐 지경이다.
지난 3년은 단조로운 감정으로만 가득했다. 극도의 불안 증상에 불안, 초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 또다시 불안, 불안정한 마음속 확대 해석, 또다시 불안으로 가득한 하루에 다른 감정들이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달을 기점으로 다양한 감정들이 되살아나니 하루가 다채롭다. 아침엔 고요한 행복으로 시작했다가, 좋아하는 노래 오프닝에 버스 정류장에서 첫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설렜다가도,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화도 냈다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가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 운동하며 다시 뿌듯함에 따른 행복도 느꼈다가 세상 다 무너질 만큼 걱정도 했다가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의지도 다졌다가, 새로운 일에 후회도 했다가, 다시금 용기를 내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걸 다시는 못할 줄 알았는데 이들이 돌아와서 무척이나 반갑다. 거기다 나는 정말인지 구제불능인 게으름뱅이인 줄 알았는데 마음의 평화가 깃든 요즘 감정 속에서도 나를 일으키고 다시금 해야 할 일들을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나 자신을 보는 게 얼마나 눈물이 날 만큼 안도하며 기쁜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이기에 안 그래도 여러 실패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내가 하루에도 증상과 여러 생각에 무너져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 게으르다 손가락질 안 하고 싶지만 실망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긴, 그건 내가 디스크로 한동안 걷지 못했을 때도 그랬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다리가 속에서는 신경이 눌려 걸을 때마다 누군가가 정강이를 걷어차는 느낌과 무릎 꿇고 혼나는 사람처럼 다리 저림이 심했다. 운동은커녕 일상생활도 해내질 못하니 답답하고 화가 났다. 뭐든 회복하는 데 시간은 필요하고 그렇게 된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관리하지 못한 나를 탓했고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저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난 병가 기간도 다르지 않았다 -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왜 일어났을까 세상을 원망했다가 그런 일을 벌인 건 결국 자신이기에 나의 무능력을 인정하진 못하면서 지켜보는 게 참으로 어려웠더랬다.
2년 전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강한 증상에 힘들었던 여름, 아이의 생애 첫 졸업식이 있었다. 무사히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졸업식 단상에 올라가 상까지 받았다. 아이가 받은 것은 'Personal Growth Award'.
아이는 5년 전 한국에서 4학년을 마치고 쉬다가 6학년 학기 중에 캐나다 학교에 들어갔다.
캐나다에 오자마자 체류 여건 때문에 학교에 바로 갈 수 없어서 집에서 몇 달간 홈스쿨링한 일, 학교에 보내려고 지역 교육청과 싸운 일, 그 싸움에서 이겨 겨우 학교 보냈더니 3개월 만에 터진 코로나... 로 1년은 오로지 온라인으로, 그간의 모든 여정들이 쉽지 않았기에 더욱 특별했고 당시에는 에세이는커녕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아이가 그간 피땀눈물 + 영혼까지 갈아 넣은 시간과 노력을 알아봐 주신 선생님들 덕에 현지 아이들 틈에서 상까지 받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증상 대환장 파티 속 딱딱해진 마음에 좋은 경사에도 제대로 기뻐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이대로 넘길 순 없다고 생각, 당시 일을 기념하기 위해 감격하는 척 글을 썼다. 그렇게라도 내 인생에 몇 없을 순간을 기리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특별한 이유나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가 감격스럽다.
향긋한 가을 아침 내음에, 수영장 창가 사이로 들어온 햇살 한 줌에, 물속에 비치는 너울거리는 빛 그물에, 남편과 잡은 따뜻한 손에, 아이와 나눠 먹는 빼빼로에, 이런 하루를 살아내는 나를 보고 감동한다.
행복엔 조건이 없음을 마음 깊이 깨닫는 요즘이다.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아이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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