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을 대하는 자세
어제는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바로 '무기력'이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그 기운 없는 와중에 배는 어찌나 고픈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뭔가를 찾아 먹었다. 나는 작년 5월경에 지독한 위염과 식도염을 앓고 난 이후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는 게 거의 대부분인데, 요즘 뭔가를 하고 싶어 안달 난 지경이라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려 노력하고 안 다니던 수영장을 가열차게 다녔더니 식욕이 좋아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음식이 맛있어 죽겠는 입맛이 돈다는 느낌은 한창 먹성 좋았던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엔 뭐든 다 새롭고 맛있었듯, 생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모든 게 처음 경험해 본 것 투성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너무나 즐거운 요즘이었다.
식욕이 좋아짐에 하루 한 끼에서 두 끼를 먹으니 위에도 부담이 가고 수영장에 몸도 더 피곤했기에 요 며칠 컨디션 저하를 살살 느끼고 있었는데, 어제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도시락을 싸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한 볼키스를 받으며 시작한 아침, 잠시만 소파에 눕는다는 게 약 20시간을 일어나질 못했다. (중간중간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을 제외, 심지어 어젯밤 잠도 소파에서 잤으니까)
말 그대로 'Kaput' 상태였다.
'Kaput'은 본래 독일어로 'no longer working'이란 뜻이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는 마케도니아에서는 저 'kaput'이란 단어를 일상생활에 쓰는데, 남편 따라 마케도니아에 갔을 때 사람들이 많이 쓰는 걸 보고 딸아이와 내가 보고 배워 우리 집에서 통용되는 단어다.
루틴이 되어가던 책 읽기도 하기 싫어 한동안 안보던 유튜브 예능과 쇼츠를 실컷 봤다. 몸과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을 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머리는 띵하고 불쾌감이 엄습했지만 이럴 때마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스스로를 비난하던 목소리는 확실히 사라졌다. 보통은 그런 목소리로 시작해 자괴감에 시달리고 그러다 우울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과정인데,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그저 단순히 머리는 멍하고 컨디션 난조에 간간이 조바심만 고개를 들 뿐이다.
중간중간 일어나서 뭘 해보려고 노력하고 그 와중에 수영장을 가보겠다고 두 번이나 예약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이건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당연히 편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놓지 않고 뭘 해보려고 한 내 자신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삐죽한 머리에 세수도 안 하고 아침에 봤던 모습 그대로 잠옷을 입고 소파에 누워있는 쉽게 말해 폐인의 몰골인 나를 보고 가족들은 놀랐지만 그들을 안심시킬 힘도 없다. 나의 기분을 체크해주고 괜찮은 걸 확인한 가족들은 저녁을 알아서 챙겨 먹고 각자 할 일을 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던 나는 그냥 오늘 밤을 소파에서 보내기로 한다. 이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자괴감에 미쳐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괜찮다.
돌이켜보면 나는 학습된 무기력에 시달렸다. 보통 무기력에 시달리면 스스로를 질책하게 되는데 머리로는 할 수 있을거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하니 스스로의 무능력을 확인하고 보는 것이 못 견딜 만큼 괴롭다.
몇 달 전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에서 학습된 무기력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접했다. 이는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으면서도 그런 상황에서 회피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현상을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이라는 대목인데 누구나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하고 어떤 누구도 실패하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없듯 잘해보려고 한 선택도 실패할 수 있으며 원하지 않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거기다 이 세상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사실 거의 없다. 내 딴에는 잘해보려고 했던 선택이 실패했고 원치 않은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극복하고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도 해봤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니 좋지 않은 상황이 기대와는 달리 반복되었기에 무기력이 생길 만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가장 위안이 된 건 무기력이란 건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온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무기력에 빠진 건 내가 정말 무능력해서 빠진 게 아니란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이 주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뭔가 스쳐 지나가는 꿈을 꿨다. 그리고 정확히 오늘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15분 정도 누워있다가 보니 문득 무기력이란 손님이 간밤에 떠났음을 감지했다. 그래, 이제 또 시작이구나, 나는 소파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수영장에 가려고 커뮤니티 센터 스케줄을 확인하는데 오늘은 집에서 다소 먼 곳이다. 음 어쩌지, 냉장고를 열어보니 도시락 거리가 떨어졌다. 그래, 오늘은 장을 보러 가자. 정성스레 샤워를 마치고 잘 세탁된, 내가 좋아하는 까슬하고 제법 두툼한 후드티를 입고 장을 보러 나서는데 찬 바람이 폐 속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하얀 입김이 감돈다.
무기력과 함께했던 시간만큼 어쩐지 가을도 더 익었나 보다.
새벽녘인지 해질녘인지 모를 거리를 바라보며 집을 나선다. 저 하늘 끝 바게트 모양의 구름도 어쩐지 정겹다. 자주 드나들었던 베이커리 겸 슈퍼마켓 주차장은 갓 구운 빵 냄새로 가득하다.
익숙하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듯 새로운 아침 풍경에 감동한다.
그래, 살아있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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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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