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늦게 잤더니 잠 패턴이 망가졌다. 나와 달리 어제 잠자리에 일찍 든 딸아이가 기특하게도 일찍 일어나 제 손으로 도시락을 싸며 눈을 비비고 뒤늦게 나온 나에게 다시 자러 가란다. 도시락 싸고 학교 가기 전 30분간 공부하겠다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아이 공부방에 있는 소파에 누워 같이 있어줬다. 더 잘 수 있는 엄마의 처지를 부러워하며 입이 삐쭉 나온 아이를 문 앞에서 배웅했다.
마음 편히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나는 요즘 내 몸의 반응에 철저히 따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일찍 눈이 떠지면 떠지는 대로 눈을 부릅뜨고 자지 않으려 했다. 막연히 뭔가 내가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에 떨며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뭘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과 초조함에 시달렸다. 습관화되었기에 그런 생각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무심히 보고 모른 척할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다시 침대로 돌아가 푹 잤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어나니 오랜만에 난 햇살이 반갑게 나를 간지른다.
부엌에 나가보니 남편이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다. 요 며칠 장을 안 봤더니 집에 과일이며 채소며 똑 떨어졌는데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누텔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다. 마케도니아가 고향인 남편이 어릴때 사회주의 국가 체제였던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시어머님이 일하시던 회사에서는 때마다 업소용 누텔라를 나눠줬고 덕분에 남편은 좋아하는 누텔라와 어린 시절 내내 아침을 함께 했다고. 지금까지도 누텔라를 좋아하는 남편과 초콜릿이라면 마다 않는 딸아이 덕분에 우리 집엔 누텔라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나는 원래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아서 가족들의 강력한 권유에도 누텔라를 전혀 입에도 안 대었다가 얼마 전 우연히 딸램의 토스트 한 입 얻어먹은 게 갑자기 엄청 맛있는 거다. 요즘 누텔라 러버가 되었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싱싱하진 않지만 그래도 먹을 만한 새빨간 파프리카를 발견했다! 누텔라만 먹으면 안 되니 소간처럼 시뻘건 파프리카를 아무렇게나 썰어 놓고 오븐에 구운 닭가슴살을 보약 먹듯 먹었다.
그리고 빵을 두 조각 토스트해서 얼마 전 멋있는 JS Jeongsoon Choi 최 정순 대표님께서 귀한 마음 담아 보내주신 #쿠자의주방 예쁜 나이프로 푹 퍼서 듬뿍 올려 먹었다.
천국이 먼 곳에 있지 않다, 여기가 천국이다.
아침을 먹으니 어느새 시간이 한 시가 다 되어간다. 누텔라도 먹었는데 수영장 가야지. 내가 사는 도시에는 커뮤니티 센터가 여러 군데 있는데 멤버십을 결제하면 어느 곳이든 이용할 수 있다. 자유 수영 시간이 센터마다 다른데 특별히 좋아하는 센터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수영장에 가야지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가기 싫다. 밍기적거리고 있다 부랴부랴 준비하니 어느새 1시 반. 이런 자유수영은 2시까지인데, 어쩌지. 15분 걸려 가봤자 15분밖에 안 남네. 흠, 어쩔수 없네? 가지 말자.
그렇게 찜찜한 포기를 하고 앉아 있는데 우연히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센터 스케줄을 보니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자유수영 시간이 2시까지인 거다! 그래, 여기다. 가자, 나머지 20분을 붙잡아 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타고 달렸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아 이런 설레임이라니, 막연히 오늘,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나는 지금 당장 수영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마치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을 붙잡으러 공항에 가는 느낌이랄까. 떠나지 마, 사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한단 말이야.
한달음에 달려가 주차장에 대충 차를 세우고 뛰어 들어갔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동료 직원과 수다를 떨며 점심을 먹고 있는 뿔테 안경을 쓴 주근깨 가득한 아가씨에게 지금 들어갈 수 있냐고, 사정하듯 말했다. 'Of course!' 겨우 한입 베어문 커다란 치킨 샌드위치를 들고 유쾌하게 말한다. 내 절실한 마음을 알아준 그 귀여운 아가씨에게 점심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연신 고맙다 외치고 탈의실로 달려갔다. 오늘은 운이 참 좋은 날이야!
지난 몇 년간 죽어가던 바짝 마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와도 같은 나의 마음에 생기가 넘친다. 이런 열정이라니 정말 눈물 나게 반갑다.
역시 첫 번째 물살 가르기가 가장 즐거워. 마치 내가 마이클 펠프스 선수라도 된 것 같단 말이야. 기분 좋게 세 바퀴를 돌았다. 그랬더니 시간이 10분 남았다. 체육시간에 달달 외웠던 개인 혼영 접(영)-배(영)-평(영)-자(유형)이 떠올랐다. 그래 해보자!
역시나 2년 만에 찾은 수영장이라 그런지 접영이 잘 안 된다, 세 번 만에 평영으로 결국 평배평자가 되었다. 못해도 즐겁다. 이 달콤한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두 바퀴를 돌고 미련 없이 풀 밖을 나왔다. 이젠 여한이 없다.
지난번의 실수를 기억하고 오늘은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는 민망한 실수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야. 물살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며 온 몸 구석 구석에 에너지를 채워주는 기분이다. 나는 늘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고.
온마음을 다해 절실하게 오늘을 사랑해야지.
그렇게 10월 어느 날의 즐거운 오후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