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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팅게일 Nov 27. 2024

9월의 끝, 새로운 시작

아침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 캄캄한 걸 보니 이른 아침인 것 같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이다. 요즘은 알람 없이 눈이 쉽게 떠진다. 잠도 잘 자고 별다른 생각 없이 일어난다. 평소에 자주 시달렸던 이유 없는 불안 증세도 없다.


최근 몇 달간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체중은 꾸준히 줄고 있지만, 그건 식단 조절 덕분이다. 5년 전 허리 디스크로 호되게 고생한 적 있는 나는 운동을 강도 높게 하진 않지만 가벼운 운동을 꾸준히 해왔다. 그러다 올해 들어 흐지부지하다 그나마 했던 스트레칭과 산책도 안 하고 지난여름 두 달 내내 꼼짝을 안 하고 있었더니 2주 전 허리 디스크가 도졌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내일은 꼭 운동해야지~ 미루다 이렇게 된 거지. 다행히 이제는 아는 병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안다. 지난 4년간 내 허리를 달래주고 계신 마사지 원장님이자 카이로프랙터 의사 선생님을 급하게 만나 응급 처치를 하고 살살 걸어 다니고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매일 스트레칭을 했더니 좀 살 것 같다.


아침에 눈이 떠지면 수영장을 가겠노라 다짐했다. 30분 밍기적 거렸지만 기쁜 마음으로 향했다. 수영장을 다시 찾은 건 2년 만이다.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가는 오늘의 이른 아침은 제법 어둑어둑하다. 내가 처음 수영을 배운 건 고등학교 1학년때다. 그때도 새벽 수영을 다녔는데 수영이 너무 재밌어서 주 5일 매일 학교 가기 전에 수영장에 갔고 주말에도 연습하러 갈 정도였다. 수영장에 열심히 다니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7살 어린 남동생을 같은 시간에 등록시켰다. 그날 이후 나는 어린 동생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왕복 40분 거리를 매일 달렸다. 어스름하고 아직은 잠이 덜 깨 모든 게 희미한 아침 풍경이 그 시절의 아침과 닮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코끝을 스치는 촉촉한 바람, 두 사람 분의 페달을 힘차게 밟아야 했던 그 무게감과 내 허리를 꼭 잡은 작은 남동생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한다.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다.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시절, 그 장면과 거기에 묻어 있었던 내 마음이 그리운 거다. 동생을 데리고 수영장에 다닌다고 좋아하시고 뿌듯해하던 어머니의 얼굴도, 그 얼굴을 좋아했던 나도.


물이 겨울 스웨터 마냥 따스하다. 탈의실에서 만난 여성분이 오늘 물이 참 따뜻하다고 했다. 물에 몸을 처음 담글 때 머리끝까지 쭈뼛하는 찬물은 싫은데 반가웠다. 알고 보니 그분은 물이 너무 따뜻해서 운동할 때 덥다고 불평하는 거였는데 오랜만에 수영장에 와서 기분이 좋은 나는 쾌활하게 좋다고, 멋진 하루 보내시라고 인사했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무리하지 말아야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수영장은 25미터짜리 세 레인뿐이지만 그래도 레인이 널찍한 편이다. 야호! 5명뿐이다. 2년 만이라니, 천천히 조금만 해야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첫 삽을 떴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래 이거지, 살을 타고 매끈하게 갈라지는 물살과 오랜만에 나 여깄어요 하는 심장의 팔딱거림에 기분이 좋아졌다. 2년 전 증상이 한창 심할 때 80킬로가 넘는 몸을 이끌며 이곳에 왔을 땐 모든 것이 고역이었다. 고약한 생각들이 나를 끌어내렸고 운동을 해야 하니 억지로 오긴 왔건만 수영장 물에 나의 우울감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것 때문에 한동안 수영장에 오고 싶지 않았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하면 천천히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유형과 평영으로 6바퀴 돌았다. 자, 이제 도시락 싸러 가야지. 이만 하면 됐어, 첫날 치고 잘했어.


우리 집에서 Awkward(부끄러움? 민망함?)를 담당하고 있는 나는 호흡을 가라앉히며 2년 만에 수영장을 다시 찾은 나를 대견해하며 당당하게 샤워실로 걸어 들어가는데 어디선가 'Hey Miss, you're in the wrong place'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안경이나 렌즈 없이는 애미/애비도 못 알아보는 급(?)의 몹쓸 시력을 갖고 있는데 알고 보니 남자 샤워실인 거다! 세상에, 좀 전에 샤워실에 들어오며 다른 분들을 보긴 했지만 남자 샤워실일 줄이야. 그분들도 당당히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내가 나갈 생각을 안 하니 마지못해 말해준 거다. 'OMG, Sorry'를 연신 외치며 눈을 가리고 황급히 나왔다. 그분들께는 죄송하지만(이런 말도 이상하지만 결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죄송해요ㅠ) 웃음이 났다. 이런 재미있는 실수를 하다니, 역시 나야. 증상이 심할 때 이런 실수를 했다면 다시는 그 수영장에 가지 못하거나 하루 종일 자책하느라 바빴을 텐데 예전의 덤벙대고 쾌활한 나로 돌아온 것 같아 기뻤다. 집에 오자마자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니 나의 사랑스러운 가족들은 고맙게도 대신 부끄러워했다.


정상인이 된 것 같아 행복한 요즘이다. 기분 좋게 시작한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매일 나를 괴롭혔던 불안 초조 증세도 비난의 목소리도 없다. 그들 없이 보내는 순간과 하루라니 꿈만 같다. 매 순간 자유롭고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내가 그리고 하루가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리고 이런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한 과거의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좋아하는 수영과 일출로 물들어 가는 아침, 내가 좋아하는 스무디와 카모마일 한잔, 따뜻한 햇살에서 쓰는 새로운 일기.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늘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새로운 하루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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