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도시, 디자인의 힘

Ep 29. Kind Cities, Thoughtful Design

by 롤라

어릴 적 내가 꿈꿨던 직업 약 백만 스물한 개 중 하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디자인하는 나와 건축하는 배우자가 함께 소박하게 집을 짓고 취향대로 꾸미며 사는 삶을 가끔 상상해 보기도 했다. 대학생 때는 그 영역이 도시로 확장되어, 전공과 관련이 전혀 없는데도 도시계획이나 도시재생 관련 강연이 있을 때마다 들으러 다녔다.


일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거나 언젠가 살게 될지도 모를 지역과 도시를 더 살기 좋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늘 마음속에 품은 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애정을 많이 쏟긴 했는지, 한번은 회사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데도 도시재생 관련 강의를 제안받아 하게 된 적도 있다. 만약 지금의 내 직업과 관계없이 오로지 관심사만을 기준으로 딱 한 가지 전공을 택해 다시 공부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도시 관련 전공을 택할 것 같다.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여름학기를 위해 덴마크에 가기로 했을 때에도 덴마크 국민의 높은 행복지수에 도시 디자인이 미치는 영향이 궁금했다. 코펜하겐을 비롯한 덴마크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 중심의 도시 설계, 녹지 접근성, 이동의 자유로움,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시민들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 직접 가서 두 눈으로 꼭 살펴보고 싶었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ad430fe2-153c-4c69-bbf5-e7dc18c370fb_2252x1526.png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는 덴마크 사람들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다 같이 자전거 레이싱 경기를 하는 줄 알았다. 통근 시간에 거리를 채운 것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였고, 학생과 직장인들뿐 아니라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는 분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디를 가든 자전거 행렬이 쉴 새없이 이어졌다. 심지어 덴마크는 왕세자가 자전거를 타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걸로 이슈가 된 적도 있다. 덴마크 사람들의 이 넘치는 자전거 사랑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코펜하겐 거주민의 56%가 자전거로 출퇴근 또는 통학을 한다고 한다. 자전거 도로가 차도, 인도와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장거리 이용자를 위한 자전거 전용 고속도로와 신호등도 따로 있다. 신호를 기다릴 때 발을 올려둘 수 있는 지지대까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지도 앱으로 경로를 검색하면 자전거가 지하철보다 두 배나 빠른 경우도 많다. 이는 우연히 만들어진 결과가 아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안전하고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도시 전체를 설계했다는 뜻이다.


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이동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건 이동 약자들도 그만큼 다니기 수월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분들, 거동이 불편하신 고령자분들이 어려움 없이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설계된 도시에서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친환경에 진심인 도시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원 낭비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도시 곳곳에 배어 있었다. 여름에도 덴마크 사람들은 실내에서 에어컨을 잘 안 튼다. 햇볕이 뜨거운데도 버스, 기차, 내가 갔던 대부분의 건물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처음에는 추위를 많이 타는 나도 더위를 느낄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가 너무 추워서 여름에도 늘 겉옷을 들고 다녔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오히려 좋았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c9f2871c-c01a-4689-97fd-cf9b64c7f9fb_4096x2730.png 무너져가던 건물이 복구되어 활용되고 있는 모습

덴마크에서 낡거나 무너진, 오래된 건물들을 어떻게 리디자인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러 갔던 건축센터에는, 1층으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탈지 미끄럼틀로 내려갈지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처음엔 아이들이 타는 놀이기구인 줄 알았는데 어른들도 다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문화였다. (직접 타 봤는데,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것보다 빠를 뿐 아니라 솔직히 너무 재밌어서 또 타고 싶었다…) 이런 노력이 모이면 정말 전력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17618e2d-c754-40ab-8766-022b277cceea_4096x2730.png 덴마크 건축센터의 미끄럼틀

재활용 문화도 남달랐다. 마트에서 물이나 음료수를 사면 대부분 보증금이 붙는다. 빈 병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고, 뚜껑도 라벨도 제거할 필요 없이 기계가 알아서 처리해 준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2021년 한 해 동안 19억 개의 공병과 캔이 수거됐고 재활용률은 93%에 달하며, 덕분에 약 21만 톤의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고 한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3ff8577b-bfb3-4103-b965-987bdb72e321_4096x2730.png 오른쪽 사진에 PANT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병 보증금이다. 페트병뿐 아니라 맥주캔, 유리병도 다시 병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디자인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문제를 넘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도시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전하고 편하게, 존중받으며 살아가느냐와 직결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안전하고, 휠체어를 탄 사람이 불편하지 않고, 재활용이 자연스럽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더 쾌적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결국 그 작은 쾌적함이 모여 일상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덴마크에서 나는 도시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그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말해준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이 경험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공간들이 얼마나 사려 깊게 설계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아직 철이 덜 들었는지 여전히 어린 날의 그때처럼 백만 개 정도의 장래 희망을 가진 나는,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도시 디자인에 대해 한번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꿈을 마음에 품어 본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참고>

1. Urban planning and development the Danish way, State of Green, https://stateofgreen.com/en/news/urban-planning-and-development-the-danish-way/

2. 한국일보, 「페트병 반환하면 돈 준다? 덴마크에서 외화 벌어봤습니다」, 2022.08.1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1812150001810?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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