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부터 내가 있는 수영 레인에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왔다. 작은 키에 예쁘장한 얼굴, 퉁실한 몸매를 꽉 채운 핑크색 수영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사교성도 좋아 처음 온 날부터 모든 회원에게 말을 걸고 가벼운 터치를 하며 친밀하게 다가왔다. 수영 경력이 있는지 모든 영법을 할 줄 알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 듯 힘들어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인지라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이건 체력의 문제라며 결코 수영 실력이 아님을 애써 부정하곤 했다.
“자기는 다 좋은데 물 밖으로 올라올 때 모양이 예쁘지가 않아.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팔과 함께 들어가야 해”
핑크 수영복 아주머니가 내 접영 자세를 지적했다. 순간 표정 관리가 어려워 어색하게 웃었다. 강사도 뭐라 한 적이 없는 내 접영의 모양새를 지적한 핑크 아주머니는 나보다 더 접영을 못했다.
“선생님이 참 많아. 그렇지?”
또 다른 중년의 아주머니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내 기분을 살피러 왔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 레인의 회원들은 텃세하나 부리지 않고 점잖고 겸손한 분들이 많다. 그분에게 괜찮다고 응수했지만, 이후로 접영이나 자유형을 연습할 때마다 어떤 저항감이 물거품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나잇값이란 나이 들수록 겸손하고 너그러워지는 것을 말한다. 현명할수록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다른 회원들에게도 이런저런 지적을 하는 핑크 아주머니를 보며 나는 꼰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남에게 강요하고 가르치려 드는 사람을 꼰대라고 생각한다. 이런 ‘꼰대’는 이상하게도 타인의 결점은 잘 보이는 반면 자신은 잘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거나 수용하려는 자세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왜곡된 시선과 생각을 알아채지 못한 채 라떼를 들이킨다.
글쓰기 합평 모임을 하며 수용하게 된 것이 있다. 합평을 하며 타인의 글을 살펴보자면 내 글의 결점이 보인다. 내 기준으로 타인의 글을 평가하는 동시에 내가 범한 오류도 보이는 것이다. 상대방의 글에 대한 충고는 곧 내 글에 대한 스스로의 충고가 되고 자문이 된다. 그래서일까? 글을 쓸 때마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물속에서의 저항감을 닮았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타인을 향한 지적이나 충고 이전에 ‘나는 어땠는가’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다. 인생을 연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지금 현재는 저마다의 삶에서 처음 맞이한 순간이다. 자문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인생의 연습으로 여기면 어떨까.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사유가 선행된다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릴 줄 알게 될 것이다.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한 번 뱉은 말에 대해서는 언젠가 후회가 밀려오더라. 그러나 당시 참았던 말은 말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일은 없었다. 되려 말하지 않길 잘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잇값이란 그런 게 아닐까.
잠깐, 꼰대가 되지 않을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도 너무 꼰대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