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
S금융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내일 아침 회의야”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 전날 우리 팀은 모여 또 회의를 했다. 전체 회의에서 발표할 실적을 정리하고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난 후에야 퇴근했다.
퇴근 후엔 늘 헬스클럽으로 직행했다.
러닝머신 위에서도 나는 내일 할 브리핑을 연습했다. 발은 앞으로 나아가고, 입은 내일 할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속도에 맞춰, 호흡에 맞춰, 나는 머리보다 몸으로 외우는 법을 배웠다. 분기 말이면 이런 ‘회의를 위한 회의’가 거의 매일이었다. 곡소리가 절로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체력이었다.
수영을 며칠 쉬면 금세 들킨다.
허벅지 안쪽, 옆구리, 겨드랑이 아래. 평소엔 조용하던 부위들이 묵직한 통증으로 말을 건다.
“나 여기 있다”고, “이만큼 너를 지탱해왔다”고.
그럴 때면 결심하게 된다. 오늘 밤은 전신 스트레칭과 스쿼트 300개는 꼭 채우고 자야지. 몸을 돌보는 마음을 다시 보듬는다.
확실한 건, 근력운동을 한 다음 날의 수영은 훨씬 가볍다는 거다. 물속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저항감도 느슨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데자뷰처럼 과거가 스친다. 회의를 위한 회의. 훈련을 위한 훈련. 축적된 반복의 경쾌한 감각.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말보다 빠르게, 의식보다 오래.
무의식은 근육 속에, 관절의 각도에, 호흡의 길이에 깊게 숨어 있었다.
의식이 외면하면 무의식은 저장한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아니, 잊으려 한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피로, 그래서 던져버린 마음, 말하지 못한 감정, 삼킨 말들. 의식이 꺼진 곳에서 무의식은 묵묵히 저장한다.
때때로 수영의 익숙한 동작 사이로 불쑥 과거의 장면이 밀려든다. 어떤 감정은 팔을 뻗을 때, 어떤 생각은 숨을 참고 있을 때 되살아난다. 몸은 기억하고 있다. 의식이 외면했던 것들을 무의식은 몸의 기억으로 남긴다.
이따금, 삶의 어떤 치유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몸이 먼저 복원하려고 한다.
삶도, 수영도, 결국은 ‘기억된 몸’으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몸은 안다. 몸은 잊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순간을 맡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