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이 강사의 글쓰기 수업
제주에서 8월 말부터 <나를 돌보는 에세이 읽고 쓰기>라는 새로운 강의를 시작했다. 이번엔 일주일에 한 번씩, 총 12번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4주나 6주 동안 해오던 그간의 수업보다 더욱 설렜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일정이라 충분히 머물며 돌보는 긴 호흡의 쓰기와 읽기의 여정을 타박타박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기대로. 심혈을 기울인 강의 계획서와 교안의 매무새를 다지며 든든히 채비를 마치고, 다정한 학인 분들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강의 신청일, 다행히 성원을 너끈히 채우고 예비 신청자 분들 수까지 채우게 되어 무사히 개강하게 되었다.
에세이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니. 독자들과 마음을 모으고 이야기의 물꼬를 터 더 좋은 글로 나아가기 위해 '에세이 읽기'를 선택한 것은 오랫동안 에세이 냉담자(에세이 작가임에도 독자로서는 에세이 읽기에 시원찮은 사람이었다.) 였던 나로서는 나름의 묘수였다. '묘수' 라고 던진 것이 부디 '자충수'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강의 커리큘럼을 짜고 수업의 흐름도를 작성하며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어떤 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오실지 모르기에, 초반 수업을 하며 준비한 방식을 매만져가며 진행해야 겠다 생각했다.
수업 첫 시간은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열기로 했다. 나의 첫 글쓰기 선생님이었던 그의 책을 뒷배 삼아 자연스레 에세이의 영토에 학인분들을 모시고자 했다. 그 뒤로 상반기에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글, 나만의 작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책을 두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정혜윤 작가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이슬아 작가의 <끝내주는 인생>, 홍지이 작가의 <여기 다 큰 교사가 울고 있어요>,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이 그러했다. 그 주에 다루는 책에서 건져 올린 단상을 문장으로 다듬어 강의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으며 생각할 것은 '삶의 옹호자가 되기 위한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와 같은 식으로. 내 책도 살짝 끼워넣었다. 독자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발의 준비를 한 것과 달리, 첫 시간부터 큰 일이 터졌다. 8월 말, 체감상 한여름보다 더 더운 늦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열댓명이 아담한 수업 공간에 디귿자를 그리고 앉았는데, 에어컨이 먹통인 것. 시설 담당자가 그래도 신경을 써 주어, 에어컨이 작동하는 복도의 냉기를 끌어오기 위해 선풍기 몇대를 이어붙여 강의실로 바람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밖에도 빔 프로젝터의 해상도가 개화기 인쇄물 수준이라 텍스트를 알아볼 수 없었다. 현장에서 프레젠테이션 화면의 모든 글씨를 매우 검고 진하게 처리한 뒤에야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자리를 채워주신 학인 분들의 목소리와 글로 쌓아 가시는 문장 하나하나가 더위를 이겼다. 수업을 마칠 즈음에는 이런 생각도 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후끈한 열기는 에어컨 고장의 여파가 아니라 학인 분들의 열정이 뿜어낸 기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번 주, 12차시로 계획된 수업이 어느덧 6차시를 넘겼다. 울다가 웃다가, 눈 맞추며 이야기하다, 끄적거리다 보면 금세 흘러가는 2시간. 늘 쉬는 시간도 없이 내리 연강을 해도, 매주 함께 읽고 쓰자는 나의 잔소리 섞인 돌림노래도 결국엔 더없이 따뜻한 글이 되어 돌아온다. 첫 독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며 학인들이 쓰신 글을 면밀히 살핀 뒤 진심을 담뿍 담은 소감을 드린다. 그 글과 오래 마주 앉아있었을, 저마다의 진지한 고민을 품은 깊은 눈동자를 기억하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덕분에 엄선한 글로 가다듬은 수업의 매듭이 나날이 촘촘해져 간다. 추석을 보내고 나면 좀 더 단단한 글을 함께 읽는다. 바로 다음은 한정원 시인의 <시와 산책>, 그다음은 신형철 교수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대기 중이다. 나는 늘 글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었지만, 수업을 하면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하게 되어 좋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 든든한 가을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