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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Sep 16. 2022

당근거래 조차 모험이 되어버린 퍼피 임보

펠라 임보 일기 3




망했다. 펠라가 오기로 정한 약속보다 먼저 한 당근 거래 약속이 있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펠라가 온 다음날 아침 9시가 될 줄이야. 남편은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고 아직 반려견 무늬와 임보견 펠라가 완전히 *합사를 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펠라는 내가 누군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보였다.


*합사 : 기존 반려견이 있는 상태에서 임시보호를 할 때 두 강아지를 집의 모든 공간을 공유하여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을 '합사'라고 한다. 원 뜻은 한 울타리, 어항, 우리 등 인위적으로 조성된 특정 공간에 2 개체를 함께 넣는 걸 뜻하지만 반려동물과 관련하여 앞에 언급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육아에 지쳐 쓰러진 반려견 무늬(4세)

복잡한 머릿속을 겨우 정리해 위험 요소를 떠올리며 세운 허술하고 비루한 대안을 하나씩 소거해 나갔다.


1안, 무늬와 펠라 둘만 두고 잽싸게 나갔다 온다? 우선 무늬가 펠라를 어떻게 대할지 아직 예상할 수 없었다. 여태껏 다른 강아지를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사람에 대한 입질도 전혀 없는 애라 공격성이 제로에 가까운 평화주의자 무늬지만, 둘만 있을 땐 아이 안의 흑염룡이 깨어나서 표호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펠라도 어떤 성향의 아이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5개월 특유의 발랄함을 무늬가 성가심으로 느껴 둘 사이가 영영 틀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2안, 무늬만 데리고 펠라를 집에 두고 다녀온다? 무늬와의 외출은 오래 입어 목이 늘어난 티셔츠처럼 편안해서 걱정할 게 없지만, 혼자 있을 펠라의 상태는 어떨까. 혹여나 분리불안이나 격리 불안이 있어서 혼자 있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 나머지 짖거나 하울링을 할 수 있다. 더 걱정인 건 퍼피에게 우리 집이 완벽히 안전한 공간인가의 여부였다. 무늬가 생활하는 공간이지만 전선, 의자 다리, 휴지 등 강아지들의 간지러운 이빨과 궁합이 잘 맞는 물건을 살뜰히 치워두지 않았다. 무늬는 모든 것에 초연한, 혹은 모든 것을 무서워하는 강아지이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위에 언급한 물건뿐 아니라 대부분의 물건을 생전 건드리거나 깨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3안, 무늬를 집에 두고 펠라를 데리고 나갔다 온다? 남은 대안이라곤 '이렇게 된 이상 거래하기로 한 분을 집에 초대한다.' '사정을 말하고 당일 거래를 취소하는 무개념 노매너를 시전 한다.' 정도였다.


펠라는 아직 전염성 질병 예방을 위한 기초 접종을 끝내지 않은 아가여서 리드 줄을 한 채 땅을 직접 걷게 할 수 없었다. 무늬가 종종 쓰는 슬링백에 넣어 안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펠라와 내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펠라는 내가 조금 다가가면 도망가 거리는 쫄보였고, 그래서 제대로 쓰다듬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펠라처럼 날쌔게 움직이지 못하는 굼뜬 사람이었다. 그렇게 불리한 조건에서 펠라와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펠라는 설마 뛰어넘을까 싶었지만 그럴 리 없을 거라 믿으며 위안을 삼던 조금 어설픈 높이의 울타리를 마치 이거보다 쉬운 게 없다는 듯 가볍게 뛰어넘으며 독창적인 루트를 만들며 나를 농락했다. 나는 땀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얼굴을 한 채 손과 발이 따로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뚝딱거렸다. 다행히 구석에서 갈 곳을 잃은 펠라의 목줄을 살짝 잡았다. 펠라의 몸과 표정이 얼음처럼 굳고 겁이 난 나머지 그 자리에 살짝 오줌을 지렸다.       

울타리 넘기 선수 펠라가 울타리 안에서 의기양양한 자세로 자고 있는 모습이다.

펠라를 겨우 슬링백에 넣어 안고 아파트 정문으로 나갔다. 마음씨 좋은 거래자분은 펠라는 귀엽고 예쁘니 좋은 가족을 찾을 거라 말씀해 주셨다. 그 말에 나는 정말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헤헤 거리며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바보 같은 미소를 조금 감출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슬링백에 안긴 아기 펠라(왠지 졌다. 의 표정)

하지만 나는 정말 바보였다. '당근'하고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다. 오전에 거래한 구매자 분이었다. 내가 물건의 정보를 잘못 알고 올려서 구매자 분의 집 물건과 호환이 안돼서 쓰지 못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엥? 하고 확인해봤더니 역시 내가 바보짓을 했다. 펠라와의 2차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펠라가 눈치를 채 버려서 더 오래 걸리기도 했고 무늬도 함께 데리고 나가야 해서 결국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운 좋게도 구매자 분의 배려로 기분 좋게 환불해 드리고 직접 구운 과자까지 나눠 주셨다. 빈 손으로(아니, 정확히는 강아지 두 마리를 안은 손으로) 나간 건 경황이 없었다는 핑계로 퉁 치기엔 너무 죄송했다. 구매자 분께서 주신 것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기프티콘을 사서 전송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아주 조금 내려놓았다.

당근으로 시작해서 당근으로 끝난 하루였다. 아직도 펠라를 안기 위해선 눈치게임과 술래잡기를 하고 오줌을 지리는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얼마나 무서우면 오줌을 참지 못할까. 사실 무늬도 처음 집에 왔을 때 그랬다.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약해지지만 얼마 뒤 무늬는 내게 안겨서 버그 가드 옷을 입고 리드 줄을 하면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는 산책길에 나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눈치게임, 술래잡기가 아니라 댄스파티가 열린다. 펠라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어쩌면 무늬보다 조금 더 빨리 올 것이라 믿고 있다.  


조만간 땅 밟고 흙냄새 꽃냄새 많이 맡자. 펠라!


똥꼬발랄 펠라 사진 더 보기!


https://www.instagram.com/dearest_p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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