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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konohime Apr 14. 2020

9. 아빠, 사랑해요.

아빠에 대한 기억

2010년대 상도동 & 싱가포르


2012년 6월 나는 민준이와 싱가포르로 갔다. 다니던 회사를 2011년 9월에 그만두고 집에 있던 상태였다. 오랜 회사 생활에 지치기도 했었고,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민준이의 학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충격을 받았었는데, 민준이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민준이와 대화를 해보니 선생님이 오해하신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맞벌이하는 집 애라서 표가 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있으니까 좋아.”

집에 있는 동안 민준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피자나 감자 커틀릿 같은 민준이가 좋아할 만한 간식을 준비해 줬더니 먹으면서 한 말이다. 나는 민준이가 안쓰러웠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엄마가 돈을 벌겠다고 노량진에 있는 공장에 나간 적이 있었고, 집에만 있던 엄마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일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 갔다 오면 나를 항상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집에 없고, 내가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쓸쓸해서 엄마한테 일을 하지 말라 했었고, 아빠도 옆에서 거들어 준 덕에, 엄마는 3-4일 만에 공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민준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일하는 엄마였고, 민준이에게는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은 엄마가 집에 있기를 바랐으면서, 민준이에게는 그런 엄마가 되어 주지 못한 점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엄마가 집에 있어서 좋다고 했던 민준이는 싱가포르로 가면서 이제는 할머니 조차 없는 집에 혼자 열쇠를 열고 들어가야 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이 결정은 엄마도 심란하게 만들었다. 친절한 딸은 아니었어도 늘 근처에 살던 딸이 갑자기 먼 곳으로 간다고 하니 엄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젊었을 때보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나이 든 부모님에게는 의지하고픈 또는 무슨 일이 있을 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이번에도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항상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그냥 잘 갔다 오라고 할 뿐이었다.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녹록지 않은 변화였다. 영어도 능숙하지 않은데 민준이 학교, 살 집 등을 스스로 알아봐야 했고, 회사에서도 최소한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남편, 엄마 등 내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싱가포르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처음 제안을 받은 후 반년이 지나도록 선뜻 가겠다는 결심을 못하고 있던 차에, 어느 날 갑자기 이 기회를 버리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2월에 호주에 갔을 때 어리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 막내가 타국에서 힘들지만 잘 버티며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기도 해서 저질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싱가포르에 온 후 얼마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긴장을 많이 하고 있던 상태여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국 집에 전화도 거의 안 했다. 친정에 가뭄에 콩 나듯 전화를 해도 통화를 한 사람은 항상 엄마였고, 아빠의 소식은 엄마를 통해서 간간히 전해 들을 뿐이었다.


이렇게 2-3년이 흘렀던 어느 날, 카카오톡 메시지를 하나 받았는데, 발신자가 아빠였다.

“타지에서 건강 잘 챙겨라.”

내용은 이랬지만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엉망인 메시지였다. 이제 막 문자 보내는 것을 배운 듯 한 서툰 솜씨였다. 자식이 연락을 안 하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아빠가 어떻게 배워서 보낸 모양이었다. 아주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아빠의 핸드폰을 보니 천지인 자판으로 설정이 되어 있어서, 내가 아빠 핸드폰에서 한글을 입력하는 것도 아주 불편하게 느껴졌다. 왜 진작 좀 살펴보고 좀 더 쓰기 편한 자판으로 바꿔 드리지 못했던 것인지 후회가 되더라. 이 이후로 아빠는 아주 가끔 나에게 카카오톡으로 그림도 보내고, 동영상도 보내곤 하셨다. 나는 아주 가끔 사무적인 메시지만 보냈을 뿐이다.

“아빠, 생일 축하드려요. 용돈 조금 송금했어요.”

“민준이 아빠 싱가포르에 오늘 도착했어요.”

“엄마가 병원에 간다는데 아빠가 좀 같이 가주세요.”

뭐 이런 식의 잔 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메시지들 말이다.


호주에 사는 동생이 집을 살 계획이라고 했다. 모아 놓은 돈이 많지 않아서 은행 대출을 받겠다고 하는데, 엄마 아빠가 한국에서 돈을 조금 송금해 주었고, 마침 우리도 길음동에 가지고 있던 아파트의 전세금 인상분 3000만 원을 받은 게 있어서, 은행 대출 먼저 갚고 우리 돈은 천천히 갚는 조건으로 필요하면 빌려 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해서 동생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엄마는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한 번씩 물었다.

“성훈이가 네 돈은 조금이라도 갚았어?”

“얼마 전에 조금 갚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환율이 안 좋아서 나중에 환율 좋아지면 그때 갚으라고 했어.”

“내가 민준이 아빠 보기 미안해.”

“우린 당장 쓸 데가 있는 게 아니라서 괜찮아. 시동생한테도 해준 적 있으니까 민준이 아빠 눈치 안 봐도 돼.”


하지만 엄마는 내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2017년 겨울 한국에 갔을 때 내가 딸 노릇 한번 하겠다고 저녁 상을 차려 엄마 아빠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엄마가 말했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어. 닭찜을 어떻게 그렇게 맛있게 했어?”

그러면서 흰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너네가 성훈이한테 빌려준 돈.”

“성훈이가 빌린 돈은 성훈이가 갚아야지 왜 엄마 아빠가 주는데?”

“아빠랑 이야기했어. 성훈이네는 애들도 어려서 돈 써야 할 데도 많고 언제 돈 모아서 갚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우리가 줘야겠다고. 그동안 엄마 아빠 마음이 많이 불편했어.”

“장모님, 이러시지 마세요. 저흰 그 돈 어차피 은행에 넣어 놔야 하는데, 지금 은행 이율도 낮잖아요. 나중에 그 돈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엄마 아빠는 돈도 많이 없으면서, 그 돈 우리 줄 생각하지 말고 엄마 아빠나 좀 쓰면서 살아. 우린 아직 돈 벌잖아.”

아빠가 말한다.

“한 서방, 그냥 받아.”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는 엄마 아빠가 그 봉투를 거의 던지다시피 떨구어 놓고는 서둘러 집으로 가버렸다.


그 이후에도 그 봉투는 엄마네 집과 우리 집을 몇 번 더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우리가 엄마 통장으로 돈을 송금해 버리면서 상황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나는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여태 우리를 키우느라 아빠는 정말 힘든 일을 오랫동안 해오셨고, 엄마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적은 돈이나마 맘껏 써본 적이 없었을 것인데, 그렇게 해서 모은 많지도 않은 돈을 또 자식한테 주려고 하니까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저럴까 하는 생각에 속이 아팠던 것이다.


엄마가 한 번은 나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월급 얼마나 받니?”

사실 직장 생활 초기에는 월급이 많지 않아서, 민준이가 태어난 후 매달 육아비 명목으로 엄마에게 주었던 용돈이 시세에 비해 엄청 저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남는 돈이 많지 않았지만, 어느새 경력이 쌓였고, 내 월급이 아빠가 받았던 월급을 추월하게 되었다. 뭐 아빠의 월급이 결코 많지 않았으니까… 그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내 월급이 얼마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보다 많이 버는 자식을 보며 뿌듯해하셨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다른 기분을 느끼게 되실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나는 이제 내가 벌어서 먹고 살만 하고, 이게 모두 엄마 아빠의 덕인데, 왜 당신들이 자식한테 쓰는 돈은 당연한 것이고, 자식이 당신들한테 쓰는 돈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해하는 것인지, 이런 부모님을 볼 때마다 항상 마음이 짠했다.


2018년 겨울 한국 방문을 앞두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내 생애 처음으로 부모님들께 뭔가 괜찮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와 시어머님을 위해서는 똑같은 모양의 색만 다른 손가방을 하나씩 샀다. 엄마는 노란색, 시어머님은 빨간색, 명품백은 아니었다. 명품백을 선물해도 명품인지 모르실 분들이니까. 하지만 백화점에서 따끈따끈한 신상으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구입했다. 아빠와 시아버님께는 좋은 시계를 선물하고 싶었다. 나는 물건은 제 기능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예를 들면 시계는 시간이 잘 맞으면 되고, 자동차는 우리의 이동만 도와주면 되고 하는 식으로, 회사에서 어느 해인가 우수 사원으로 지명받아 그때 부상으로 선물 받은 좋은 시계를 차보니 아주 가볍고 찬 듯 안찬 듯한 것이 비싼 이유가 있는 듯싶었다. 그래서 오차드 로드에 있는 명품 시계 상점으로 갔다. 그 상점에는 몇천만 원이 넘는 시계들도 많았는데, 좋은 시계를 사고 싶었지만 내가 그 정도 능력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 상점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시계 중에서 디자인이 심플하고 무게가 가벼운 것으로 선택을 해서 포장을 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아빠한테 시계를 드렸다.

“너 외국에서 돈 벌어서 민준이 교육시키느라 힘들 텐데 무슨 내 선물까지 사 왔어?”

“아빠 좋은 시계 한번 차 보시라고요.”

“시계야? 나 시계 여러 개 있다.”

“이 시계가 아주 가볍더라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 시계를 매일 차고 다니세요.”

“아빠 죽기 전에 좋은 시계 한번 차 보라고 사 온 거야?”

나는 마음이 아파졌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민준이 아빠 갖다 줘. 아빠는 좋은 거 필요 없어.”

“민준이 아빠는 나중에 제가 또 사주면 되니까 이건 아빠가 차요.”

아빠가 마지못해 시계를 차 본다.

“알았다. 딸내미가 아빠 생각해서 사다 준 거니까 잘 차고 다닐게. 고맙다.”

“아주 비싼 건 아니에요.”

“좋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빠가 한동안 이 시계를 차고 다니시긴 했지만, 작년에 막내 동생네 식구가 한국에 갔을 때 결국에는 막내 동생한테 주셨다고 한다. 아빠는 왜 자꾸만 나를 속상하게 만드는 것일까?


싱가포르로 돌아가기 전날 밤 엄마네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동네 음식점으로 해물 샤부샤부를 먹으러 갔다.

“어휴, 손자분이 아주 잘생겼어요.”

음식을 서빙해 주시는 분이 말씀하셨다.

“우리 손자가 싱가포르에서 공부를 해요. 7년 됐어요.”

아빠는 뜬금없어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똑똑한 손자 두셨네요.”

아주머니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셨고, 아빠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다음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딸아, 잘 가거라. 항상 몸조심해라.”

“곧 또 올 건데요 뭐. 싱가포르에 오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그건 신경 쓰지 마. 엄마가 차려주는 밥 한 끼 못 먹고 가는 게 영 미안하고 서운하네.”

엄마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아빠한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었지만, 아빠는 그래도 자식한테 집에서 한 밥을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2019년 2월, 엄마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요즘 정부에서 노인들 운전면허증 반납하면 무슨 혜택을 준다고, 아빠가 운전면허증 반납하겠다고 그러더라. 이제는 눈도 침침해지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아빠가 운전 안 하려고 그래. 그래서 차는 민준이 아빠한테 줄라고 생각하고 있어. 민준이 아빠 차 오래돼서 요즘 여기저기 수리해야 한다고 며칠 전에 그러더라.”

아빠는 4-5년 전 차를 바꾸고 난 후, 청주 부근에 있는 큰집에 갈 때 또는 경조사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지하 주차장에 주차만 해두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다시 한번 애가 탔다. 아빠가 이제는 평생 하시던 운전 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나이가 든 건가?


아빠는 정년퇴직 후에도 회사의 부탁으로 몇 년 더 그 회사에서 일을 하셨다. 그 후에는 심심풀이 삼아 하고 싶을 때만 하겠다고 하시면서 개인택시 일을 또 몇 년 하셨다. 마침내 개인택시 일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는 전립선 비대증이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차는 개인택시를 팔면서, 당시 집에서 사용하던 다른 차도 좀 오래된 상태였기 때문에 겸사겸사 바꾼 차였다.

“집에 차가 한대 있어야지. 운전은 성민이가 하면 되고. 왜 우리한테 그 차를 준다는 거야?”

“성민이 직장도 안 다니는데, 세금이나 보험료 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혹시 사고라도 나면 감당하기 힘들어. 그 차 사놓고 거의 안 써서 새거나 다름없는데 팔면 얼마 받지고 못할 거고. 그러니까 민준이 아빠 주는 게 나아.”

아빠는 항상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빠가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자동차세와 보험료를 걱정하는 궁핍하지는 않지만 결코 풍족하지도 않은 친정의 재정적인 현실이 슬펐으며, 이 와중에도 우리에게 자꾸 뭔가를 주려고 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속이 많이 상했다. 


결국 차는 이전되었고, 우리는 차 값 명목으로 약간의 돈을 엄마와 아빠 통장에 반반씩 송금했다.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돈을 왜 그렇게 많이 보냈어? 너무 당황스럽네. 돈 받을라고 차 가져가라고 한 거 절대 아닌데.”

“알아요. 그냥 그 돈으로 엄마랑 외식도 가끔 하면서 사이좋게 지내세요.”

“알았다, 그럼 유용하게 쓸게.”


2019년 7월 초, 아빠가 카카오톡으로 킹크랩 사진을 보냈다. 민준이 아빠가 아빠 생일이라고 모시고 나가 대접했다고 한다.

“민준이 아빠가 저녁 사줘서 아주 잘 먹었다.”

“예. 저는 용돈 조금 송금했어요.”

“민준이 아빠가 저녁도 사 줬는데 용돈을 또 보냈어? 내가 염치가 없네.”

“어쩌다 한번 보내는데요, 뭐.”


이 날로부터 일주일 후, 큰아버지가 폐암 진단 후 두 달만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혜야, 큰아버지 돌아가셨어.”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큰집 큰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왈칵 울음이 터졌다.

“오빠, 미안해, 내가 지금 여기 있어서 큰아버지 돌아가셨는데도 못 가보네.”

“민준이 아빠가 왔으니 됐어.”

“나중에 한국 들어가면 한번 갈게. 장례식 잘 치러. 정말 미안해, 오빠.”

큰아버지는 아빠의 하나밖에 없는 형제였고, 할머니가 20여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아무리 다른 친척들이 있었어도 아빠가 오랫동안 심적으로 많이 의지해 온 분일 터였다.

“엄마, 아빠는 괜찮아? 아빠가 많이 충격받았을 것 같은데.”

“하나밖에 없는 형이 돌아가셨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 근데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

그래도 나는 아빠가 많이 염려되었다. 아빠는 평소에 내색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9년 12월, 한국을 떠나기 전날, 엄마네로 가서 저녁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배달 음식이 도착하자, 짧은 실랑이 끝에 아빠가 사주고 싶었다며 결국 아빠가 값을 치르셨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우리가 먹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아빠 팔순이라고 민준이 아빠가 아빠 여행 보내 드리겠대요. 평상시에 가고 싶었던 데 있어요?”

아빠는 말없이 힘없는 미소만 지으셨다.

“이번에는 엄마랑 성민이도 데리고 호주에 한번 더 갔다 올까요? 성훈이 집도 샀는데 한번 가보면 좋잖아요. 호주 말고 다른 데 가도 되고요.”

“그래, 그때까지 건강이 괜찮으면 한번 더 가자.”

이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슬슬 여행 계획을 세워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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