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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konohime Apr 24. 2020

13. 아빠, 사랑해요.

아빠와의 여행

2012년 호주


막내 동생은 2008년 호주 캔버라로 이민을 갔다. 처음 1-2년은 집도 구하고 직장도 구하느라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오래 살 수 있는 있는 집을 구하고 직장 생활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즈음인 2011년 첫째 조카 시현이가 태어났다. 


동생네 부부는 시현이 사진을 이메일이나 카카오톡을 통해 엄마 아빠에게 자주 보내 주었다. 엄마 아빠는 새로운 사진이 올 때마다 반가워하면서 자주 꺼내 보았고, 우리가 놀러 가면 TV를 연결해서 보여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첫 친손주이다 보니 더 애틋하고, 항상 볼 수 있는 외손주인 민준이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나 보다. 사진을 보내는 일이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첫 돌도 안 지난 어린아이를 키우는 경우라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자주자주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내 주고, 또 엄마 아빠는 그걸 보고 활짝 웃으면서 기뻐하시니, 올케의 마음 씀씀이가 많이 고마웠다.


나는 2012년 초 직장을 안 다니고 집에 있었고, 동생네 부부가 한번 꼭 오라고 청하기도 해서 엄마 아빠를 모시고 호주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돈어른들은 시현이가 태어났을 때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서 호주에 다녀오신 적이 있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민준이 아빠 눈치가 보여서는, 비행기표는 아빠가 사고 나머지 여행 경비는 우리가 내겠다고 했는데, 아빠가 며칠 후 천만 원을 주시면서 이번 여행을 하는데 쓰라고 하셨다.


나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받고 12일간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동생네 집에 너무 오래 있으면 올케가 힘들어할 테니, 멜버른으로 들어가 우리끼리 5박 6일간 여행을 좀 하다가 캔버라 동생네 집으로 가서 4박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엄마는 불면증 때문에 당신이 가면 우리 여행까지 망친다면서 한사코 안 가겠다고 했고, 결국 엄마와 큰 동생은 집에 있기로 했다.


민준이 아빠가 외국에서 운전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라 렌터카를 빌려 자유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아빠에게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나는 다시 한번 딴지 관광청에서 읽은 바 있는, 부모님의 해외여행 시 고려해야 할 사항을 떠올렸다. 아빠를 생각해서 직항 국적기를 알아봤어야 했는데, 비용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길래, 더군다나 비행기 티켓은 아빠가 부담하기로 했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에서 트랜스퍼하는 가장 저렴한 말레이시아 항공을 타고 가기로 했다. 출발과 도착 일정 모두 야간 비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부분이 지금도 후회가 많이 된다. 아빠의 나이가 이미 70을 넘은 상태였는데, 나는 아빠가 여전히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어 문제야 우리가 동반을 하니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음식은 아빠를 위해 햇반과 즉석국, 김을 좀 챙겨 갔다. 민준이 아빠는 해외여행을 할 때 한국 음식을 챙겨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아빠와 함께 하는 여행이니 예외가 적용되었다.


출발하는 날, 아빠도 우리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보니 설레는 표정이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내려 공항에 조성되어 있는 열대 식물원 등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빠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민준이에게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외국 자주 안 다니셔서 여기 화장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으니까 가서 무슨 일 있으면 도와 드려.”

민준이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왔다. 나중에 아빠가 한 말이다.

“민준이는 어린애가 속이 깊어. 내가 실수할까 봐 그러는지 따라다니면서 모르는 거 있으면 자기한테 말하라고 하더라.”


멜버른에는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고,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우리가 예약한 시내의 숙소에 바로 체크인을 할 수가 없었다. 숙소가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 마켓에 갔는데, 민준이가 FC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발견하더니 갖고 싶어 했다. 아빠가 사주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고, 우리는 시장 구경을 좀 하다가 현지에서 생산된 신선한 과일을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숙소는 3개의 작은 방과 간단한 요리가 가능한 조리 시설, 작은 거실이 갖춰져 있는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아빠가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있어서 좋았다. 아빠는 피곤했던지 낮잠을 자겠다고 했고, 우리는 그 사이 마트에 가서 호주에서 유명한 소고기와 야채, 와인을 사 와서 호텔에서 저녁을 차려 먹었다.


여행 3일째, 아빠에게는 햇반과 즉석국을 데워 드리고, 우리는 빵을 먹은 다음 그레이트 오션 로드 투어를 하러 출발했다. 아빠는 즉석국이 맛있다고, 앞으로는 해외여행할 때 음식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며 잘 드셨다. 투어 내내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졌고,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나무나 꽃들을 볼 수 있었다. 점심은 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피시앤칩을 먹었는데 아빠가 이런 음식도 잘 드셔서 다행이었다. 


4일째는 오전 느지막이 숙소 근처의 멜버른 자연사 박물관으로 갔다. 호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곤충의 표본과 동물 박제, 공룡 화석, 원주민들의 풍습 또한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빠가 의외로 관심 있게 보시며 좋아하셨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하니, 그래, 사진 하나 찍자고 하면서 선뜻 응하셨다. 생각해 보니 아빠에게 박물관 구경은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경복궁에 있는 민속 박물관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엄마와 함께였지 아빠와 가 본 기억은 없다. 박물관을 나와서는 박물관 근처의, 음식점이 많이 자리한 거리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실 모처럼의 외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여행 비용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그나마 가성비가 있어 보이는 곳을 찾기 위하여 한참을 걸어 다녔던 것 같다. 아빠에게 익숙한 곳이었다면, 아빠가 사주겠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자고 했을 텐데, 아빠가 잘 모르니까 내가 가는 대로 계속 따라왔던 것 같다. 마침내 한 식당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해서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 부분도 후회가 많이 된다. 멜버른에, 그것도 아빠와는, 다시 올 기회가 없을 터였는데, 왜 맛있는 음식을 사드릴 생각은 못하고, 비용만 고려했던 것일까?


아빠는 호텔에서 다시 낮잠을 주무셨고, 우리는 저녁에 야경을 보기 위해 유레카 타워 88층에 있는 전망대로 갔는데, 민준이와 민준이 아빠 그리고 아빠는 에지(Edge)라고, 바닥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밑이 아찔하게 보이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아직 우리 집에 하나 엄마네 집에 하나가 있다. 나는 무서워서 에지에 갈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렌터카 여행이 시작되었다. 멜버른 시내를 벗어나 야라 밸리에 있는 와이너리를 구경하고, 오랜 시간을 달린 끝에 레이크스 엔트런스(Lakes Entrance)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호수도 있고 바다도 있는 마을이었는데, 마을에서 긴 다리를 건너가면 만날 수 있는 해변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변인 90마일 비치라고 한다. 아빠는 역시나 바다를 보고 좋아하셨고, 사진도 몇 장 찍으셨다. 이 곳에서 우리가 묵은 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펜션 같은 곳이었는데 방 2개와 주방이 함께 있는 독채였다. 숙소 부근 작은 식당에서 피시앤칩을 사고, 한국에서 가져간 컵라면과 과일 등을 먹으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맥주 한 캔의 도움으로 숙면을 취한 후 다음날 아침 깨어났을 때, 아빠는 이미 바다 산책을 다녀오신 후였다. 길을 헤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나를 뭘로 보냐는 식으로 쳐다보셔서 뻘쭘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 행선지는 진다바인(Jyndabine)이라는 곳이었다. 레이크스 엔트런스와 진다바인은 운전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된 곳인데, 하루는 바다, 하루는 산이 콘셉트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다바인은 겨울철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운전하고 가는 길에 상점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점심도 길에서 잼을 바른 빵과 과일로 때워야 했다. 호주답게 광활한 자연환경이 펼쳐졌는데, 아빠는 한국과는 다른 풍경에 감탄하기도 하고, 민준이 아빠를 칭찬하기도 했다.

“외국에서 어떻게 그렇게 길을 잘 찾아다녀? 나라면 이렇게 못할 것 같은데.”

“내비게이션 보고 가는 건데요 뭐.”

칭찬은 했지만,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다니느라 힘들었을 법한데도 아빠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진다바인은 아니나 다를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였는데, 그다음 날 주변을 돌아다녀 보니 예쁜 숲도 많았고, 숲 속에 야생 캥거루들도 많았고, 기가 막힌 확 트인 전망도 많았다. 사람이 다가가도 캥거루들이 도망가지 않아서 민준이가 좋아했다.


이제 마침내 동생네가 사는 캔버라로 이동했다. 캔버라 시내에서 만난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따라 깔끔한 주택가로 들어섰는데, 동생 말로도 최근에 새로 조성된 비교적 살기 좋은 동네라고 했고, 살고 있는 집도 널찍하고 깨끗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마침내 시현이를 실물로 만나는 순간, 아빠가 흐뭇해하시는 게 표정에 다 드러났다. 동생이 얼큰한 게 먹고 싶었을 거라며 김치 찌개를 끓여 줘서 맛있게 잘 먹었다.


다음날은 동생이 캔버라 시내 관광을 시켜 주었다. 전쟁 박물관을 가고, 호주 국립대 캠퍼스도 돌아보고, 한국 식당에서 아빠가 사준 시원한 냉면도 먹었다. 아빠는 시현이를 자주 안고 다녔다. 저녁은 올케가 질 좋은 소고기와 함께 월남쌈을 차려 줬는데, 현지에서 먹는 호주 소고기가 정말 맛있었고, 월남쌈도 색달랐다. 아빠가 나한테 살짝 말했다.

“시현이 엄마가 집도 깔끔하게 관리하고, 애도 잘 키우더라.”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며느리를 많이 예뻐하셨고 칭찬도 많이 하셨다.


일요일을 맞아서 동생이 시드니 구경을 시켜 준다고 했다. 우리가 사용했던 렌터카는 반납하고 모든 사람이 한 차에 탈 수 있도록 큰 차를 빌렸다. 캔버라에서 시드니까지는 차로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침 일찍 출발했어도 그 날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 부근에서 좀 서성이다가 갭 파크(Gap Park)라고 영화 빠삐용을 촬영했다는 곳에 갔다가 다시 캔버라로 돌아왔다. 오페라 하우스 부근의 근사한 카페에서 차나 맥주라도 한잔 마시면서 그곳의 분위기를 만끽했어야 했는데, 그 당시에는 생각을 못해서 많이 아쉽다. 그 당시 나는 여행을 가서 먹는 거에는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주의였는데, 나중에야 기억에 남을 만한 음식을 먹으면 그 장소가 더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번 여행은 아빠와 함께 한 여행이었건만, 아빠를 배려하지 못하고 너무 내 생각대로만 행동한 것이 지금도 후회가 많이 되고 아빠한테 미안하다.


이렇게 호주 여행 일정은 대략 끝났고, 우리는 동생네서 이틀 밤을 더 자고 한국으로 왔다.


아빠와 함께 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연세를 고려했을 때 아빠가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좋아하긴 했지만, 나는 이 여행에서 아빠한테 좀 더 좋은 숙소, 좋은 음식을 대접해 드리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죄송스럽고, 후회가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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