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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konohime May 08. 2020

18. 아빠, 사랑해요.

아빠와의 이별

2020년 1월 28일 (화)


오늘은 복수 빼는 일과 담당 교수 회진이 오후로 예정되어 있어 내가 오후에 병원에 있기로 했다. 11시쯤 집에서 나와 약국에서 아빠 발에 발라줄 바셀린을 사고, 딸기 한 팩과 복숭아 통조림을 사 가지고 병원으로 간다. 

오늘은 설 연휴 후 외래 진료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병원의 출입 통제가 아주 엄격하지는 않았다. 출입증 없이 병동으로 올라가서 엄마와 아빠가 있는 병실로 갔다.

“아빠, 딸기 새로 사 왔는데 좀 드릴까요? 복숭아 통조림도 있어요.”

“딸내미가 당신 이것저것 많이 사다 주네.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딸기 몇 개만 먹어 볼까?”

딸기를 씻어 아빠와 엄마에게 드린다.

“너도 좀 먹어.”

“나도 먹고 있어. 근데 복수는 언제 빼준대?”

“1시쯤 사람이 올 거라던데.”

“병원에서 준 점심은 또 안 드셨네.”

“지금은 못 먹겠어. 이따 복수 빼면 죽을 좀 먹어야지.”


아빠는 어서 복수를 빼고 싶어 한다. 복수의 성분이 체액이나 혈액이기 때문에 복수를 뺄 때마다 몸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도 복수가 차면 일단 너무 답답하니까, 요즘 하는 말로  삶의 질이 떨어지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빠는 복수가 빨리 찰까 봐 물도 자주 안 드시고 계셨는데,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복수가 차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른 것인지, 아니면 병원에서 꾸준히 주사하는 큰 팩의 수액과 주사제가 복수 차는 속도를 더 빠르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는 생각도 자꾸만 하게 된다.


1시쯤 되어 이동을 도와주시는 분이 오셨고, 아빠는 이동용 베드에 실려 1층 영상의학과로 내려간다. 나도 뒤따라간다. 영상의학과에서 아빠 배에 주사 바늘을 꽂자마자 복수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영상의학과에서는 주사 바늘을 꽂는 일까지만 하고 다시 병동으로 올라와 병동 복도에서 복수 빼는 일을 계속한다. 복수는 끊임없이 나왔다. 하나의 병이 차고, 다른 병으로 바꾸길 몇 차례… 주치의가 잠깐 와서 지금까지 나온 복수의 양을 체크하고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돌아간다. 2-3 시간이 지나자 복수가 더 안 나오고, 여태 별말씀 안 하시던 아빠가 주사 바늘 꽂힌 데가 너무 아프다고 빨리 뺐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지만, 그 일은 인턴 선생님이 해야 하는데, 인턴 선생님이 지금 다른 환자를 보고 있으니 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그 사이 담당 교수님의 회진이 있었고, 항암 치료를 시작할 수 있도록 염증 수치 개선에 신경을 쓰고 있고, 당분간 수액을 좀 더 사용하면서 지켜보겠다고 하신다. 아빠는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말씀하신다. 복도에서 30분 이상을 더 기다린 후에야 인턴 선생님이 도착해 배에서 주사 바늘을 빼 주었고, 아빠는 병실 침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빠, 복수 빼니까 답답한 건 좀 나아졌어요?”

“응. 복수 빼고 나면 좀 괜찮아. 근데 배는 여전히 아프네.”

아빠의 표정에 약간의 여유가 느껴졌다.

“여기 죽 갖다 놨네요. 죽 좀 드세요.”

“그래 좀 먹어보자.”

나는 아빠를 일으키고, 식판을 세워 병원에서 갖다 놓은 소고기 죽을 드린다.

“이거 말고 엄마가 아욱죽 쒀서 갖아 놓은 거 있을 거야. 그거 줘 봐.”

“아욱죽 드실래요? 잠깐만요.”

아욱죽 반공기와 복숭아 통조림 한쪽을 꺼내서 같이 드린다.

“엄마가 옛날에는 아욱죽을 아주 맛있게 쑤더니 지금은 솜씨가 별로야.”

“아빠가 지금 입맛이 없어서 맛이 없나 봐요. 맛있어 보이는데요.”

아빠는 죽과 복숭아를 천천히 다 드신다. 아니, 다 드시기 위해 노력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주사 바늘을 통해 알부민이라는 약과 수액도 계속 공급되고 있었다. 알부민 한 통을 다 맞고 나니 간호사가 하나를 더 가져온다.

“복수가 3000cc 이하면 알부민 하나만 맞으시면 되는데 5800cc가 나와서 하나 더 맞으셔야 해요.”

5800cc? 아빠가 지난 화요일과 목요일에 복수를 뺐다고 했고, 그때 이미 각각 3000cc가량이 나왔다고 했는데, 그 사이 이렇게 많은 복수가 다시 찬 거란 말인가? 그 많은 양의 복수를 배에 담고 있었으니 얼마나 갑갑하고 불편했을 것이며, 또 그만큼을 몸에서 빼냈으니 몸이 얼마나 축이 났을 것인가? 가슴이 미어졌다.

“아빠, 힘든데 이제 누워서 좀 쉬세요.”

“그래. 너도 힘든데 집에 가서 좀 쉬어라. 밥도 안 먹었잖아.”

아빠는 이 와중에도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신다.

“저는 괜찮아요. 배가 안 고파요.”

“먹어야 돼. 냉장고에 두유 있을 거야. 그거라도 꺼내 먹어.”

아빠가 계속 권해서 두유를 하나 꺼내 먹는다. 잠시 후 퇴근하던 민준이 아빠 전화가 와서 집에 같이 가기로 한다. 

“아빠, 여기 분홍색 빨대컵에 물 따라 놓았고요, 하얀색 빨대컵은 야채수프예요. 목마를 때마다 가급적 물 말고 야채수프를 드세요. 저 내일 또 올게요. 쉬고 계세요.”

“그래,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하네.”

내가 하는 게 무슨 고생이라고… 아빠는 훨씬 더 아프면서…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집에 오니 XX 도라지가 배송되어 있었다.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일부터 이거라도 드려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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