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이별
아침 일찍 일어나 사촌 큰오빠와 함께 9시 이전에 동두천의 추모 공원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을 했다. 어렸을 때는 명절마다 큰집에 가서 사촌들과 어울렸던 기억이 있는데, 결혼한 후로는 큰집에 간 적이 거의 없었고, 더군다나 최근 몇 년간은 싱가포르에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전화 연락 조차 주고받지 못했을뿐더러, 작년 큰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도 나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아빠 일에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니, 역시 가족과 친척이 중요하고 앞으로 내가 좀 잘해야겠다는 반성이 많이 되었다.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니 청주에 살고 있는 큰집 식구들과도 가끔씩 왕래를 해야 할 것이다.
동두천에 위치한 추모 공원은 상조 회사 팀장님이 말한 대로 규모가 크고 깔끔했다. 느낌이 국립 현충원 같았다.
“요즘에는 묘지도 아파트 짓듯이 하는구나.”
사촌 오빠가 말한다. 우리가 선산으로 안 가고 다른 곳을 알아보고 다니는 것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내심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인데 내색을 안 하고 도와주는 오빠한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일단 위치를 정해야 한다니까 여기로 하는 경우 어디가 좋을지 정하고 가자.”
우리는 추모 공원 직원의 안내로 부부묘 평장이 가능한 곳으로 가서 아직 분양이 되지 않은 곳 중 하나를 큰오빠의 조언대로 고른 다음, 오늘 중으로 연락을 준다고 하고, 광릉에 있는 추모 공원으로 이동했다.
광릉에 있는 추모 공원은 동두천에 있는 추모 공원보다는 덜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부부묘 평장이 가능한 곳으로 가서 보니 두 줄이 있었고, 아직 평장 부지 조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곳이어서, 앞 줄에도 분양이 안된 곳이 있다고 했다. 큰오빠는 몇 군데를 돌아보며 앞으로 펼쳐진 전망을 보더니, 오빠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곳을 골라 주었고, 이 곳이 전에 본 곳보다 공간이 좀 더 여유 있어 보인다고 의견을 주었다. 이 곳은 전에 본 곳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긴 했지만 조만간 공사가 마무리되면 좋아질 것으로 예상하며 큰오빠 의견에 따라 이 곳으로 결정 후 계약을 마치고, 1시로 예정되어 있는 입관식 전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길을 나섰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입관식이 있었다. 아빠가 깔끔한 수의를 입고 계셨다. 얼굴은 마지막 순간에 비해 편안해 보였으나 배는 마지막에 찬 복수를 빼지 않아 아직 부풀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복수 때문에 많이 답답해하실 것 같아서 가슴이 또 아팠다. 상조 회사 팀장님은 아빠가 아직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실 수 있다고 했다. 엄마와 가족, 친척들이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메시지만 남겼다.
“아빠,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꼭 좋은 데 가세요. 나중에 다시 만나요.”
입관이 끝난 후에야 남자들은 완장을 차고 여자들은 핀을 꽂는 거란다. 각자 행색을 갖추고, 상조 회사 팀장님의 진행에 따라 제사를 지낸다. 하라는 대로 따라서 하긴 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게 실제 상황인가 싶었다.
오후부터는 문상객이 늘었는데 모두들 하시는 말씀이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이었다.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국사봉에서 만나 차를 같이 마셨고, 연말 모임에서 만나 같이 식사를 했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똑같은 마음이었고, 마치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문상객을 맞이하면서도 중간중간 추가 배달되는 물품들을 확인해야 했고, 아는 손님들이 오시면 테이블에 가서 잠시 대화라도 나눠야 했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는 못한 것 같다.
나보다 한살이 많은 이모가 안동에서 올라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셨으니 나보다 훨씬 일찍 부모를 잃은 이모다. 이모가 울먹이면서 말한다.
“지혜야, 너무 놀랐지? 근데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해. 아빠가 고통을 덜 받고 돌아가셨다고.”
암 투병을 몇 년씩 하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이모 말이 맞기는 하지만, 마지막 순간 아빠가 너무 급속도로 무너지는 모습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모두 보았기에 아직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상조 회사 팀장님은 우리가 결국 광릉에 있는 추모공원과 계약을 했다고 하니, 본인이 주선을 해 준 그곳과 본인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면서도 서운해하는 눈치였고, 엄마를 위해 새로운 상조 상품을 가입할 것을 권했다. 장례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번에 상조 회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은 컸지만, 아빠의 장례식 기간에 이런 일까지 생각하는 것은 버거워서 나중에 생각해 보고 필요하면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말았다. 장례식이 누군가에게는 큰 슬픔의 시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즈니스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했다.
밤 9시가 넘어 호주에서 올케가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도착했다. 두 아이는 같이 문상 오신 사돈 댁으로 보낸다고 한다. 어린애들 데리고 먼길 오기 힘들다고 안 와도 된다고 했건만, 하나 있는 며느리가 안 올 수 없다고 늦게라도 온 정성이 고맙게 느껴진다.
12시가 지나 어느 정도 문상객의 발길이 끊긴 후 나는 또 현실적인 일들을 처리한다. 내일 발인 전에 이것저것 정산을 해야 하는데 현금을 찾아 놓지 못해서 일단 부조금을 체크한다. 지금까지 받은 영수증을 체크해서 대략 지불해야 하는 비용들을 항목 별로 봉투에 나누어 담아 놓는다. 고마운 분들에 대한 사례금도 조금씩 봉투에 담아 놓았다.
엄마가 내가 모르는 사이 동생을 시켜 출금한 현금이 있어서 일단 그 돈으로 내일의 비용을 정산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