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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konohime Mar 12. 2020

5. 아빠, 사랑해요.

아빠에 대한 기억

1970년대 상도동


그래서 상도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상도동에 살고 있다. 


상도동으로 처음 이사 와서 살았던 집은 작은 일층 집이었는데, 그 당시 내 느낌으로는 마당이 꽤 넓었다. 앵두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봄마다 빨갛고 탐스러운 앵두를 따 먹는 재미가 있었고, 늦봄에는 담벼락을 타고 늘어선 장미 나무에 빨간 장미꽃이 소담스럽게 피곤했다. 여름에는 엄마가 심은 앙증맞은 채송화와 분꽃, 탐스러운 모란과 해바라기, 붓꽃, 맨드라미 등이 피었고, 가을에는 분홍빛과 보랏빛의 국화가 소박한 자태를 보여 주었던, 내 기억에 다시 살고 싶은 집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나는 우리 집 마당이 선물하는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소꿉놀이하는 것을 좋아했고, 아빠는 이 집에서 나무 가지치기도 하고, 가끔씩 해충을 없애는 약을 뿌리기도 하고, 김장철에는 땅을 파서 항아리를 묻기도 했다.


이 집에 할머니가 오실 때에는 나는 안방에서 엄마 아빠와 같이 잘 거라고 떼를 쓰다가 결국 작은 방으로 쫓겨나 할머니와 같이 잤었다. 큰집 둘째 오빠가 서울에서 공부를 한다고 이 집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오빠가 일요일마다 마루에 걸터앉아 햇볕을 쬐면서 소설책을 읽고 있었던 모습이 기억나 이야기를 하면, 큰집 다른 오빠들은 그 오빠가 책을 읽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들을 보인다.


그 당시 상도동은 시골 동네 같았다. 여름 장마철에는 산에서 떠내려온 흙이 대문 앞에 수북이 쌓이는데 아빠가 매번 삽으로 치우곤 했고, 겨울에 눈이 오면 역시 집 앞에 쌓인 눈을 아빠가 손수 만든 넉가래로 치우곤 했다. 나와 첫째 동생은 옆에서 작은 삽을 들고 아빠를 따라 하곤 했는데 우리가 아빠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빠가 모아 놓은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했던 건 기억이 난다.


당시 집 앞에는, 지금은 슈퍼마켓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에 풀이 자라던 커다란 공터가 있었는데, 겨울에는 누군가가 스케이트나 썰매를 탈 수 있도록 물을 가두어 얼리고는 돈을 받고 아이들을 입장시켰다. 현경이 언니가 쓰던 스케이트를 물려받아 여기서 스케이트를 배웠던 게 기억난다. 겨울이 지나면 그 공터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아빠가 운전하는 차도 그곳에 세워져 있곤 했다.


상도동으로 이사를 온 후 같이 놀 친구가 없어 심심해하고 있을 때, 엄마가 동네에서 놀고 있던 은하를 나와 같이 놀게 하기 위해 집으로 데리고 왔고, 은하와는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렸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며 지금까지도 막역하게 지내고 있다. 우리는 함께 고무줄놀이도 하고, 국사봉에 올라가 역할 놀이를 하기도 하고, 쭈쭈바를 먹고 남은 용기에 개미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집에서 종이 인형 놀이를 하기도 했다. 새침한 나와는 달리 은하는 활달하고 싹싹해서 동네의 여러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나도 은하 덕에 그 틈에 끼어 놀 수 있었다.


지금은 양녕대군 묘역이 문중에 의해 잘 가꾸어져 관리되고 출입도 자유롭지 않은 듯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중 하나였다. 묘지 주변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도 하고, 남자아이들은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양녕대군 묘역 맞은편에는, 지금은 롯데 캐슬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고목나무를 중심으로, 한참 전에 지어진 듯한 소박한 집들이 작은 시골 마을 같은 모습으로 들어서 있었다. 지금 보면 이 곳은 우리 집이 있던 곳에서 정말 가까운 거리인데, 그 당시에는 이 곳에 갈 때마다 뭔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국사봉은 양녕 대군이 이 산에 올라 국사를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중간에 상도동과 봉천동을 잇는 국사봉 터널도 뚫려 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에 집과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 자체의 규모가 많이 줄어든 상태지만, 그 당시에는 꽤 큰 산이었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잘 만들어지고 휴게 시설이나 다양한 운동 기구 등이 들어서 있지는 않았지만, 중간중간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있는 바위로 둘러 쌓인 공터는 우리의 비밀 장소도 되어 주고, 놀이터도 되어 주었다. 이 산에는 약수터도 있어서 아빠는 매일 아침 출근 전 이 산에 올라 철봉 운동을 한 후 이 곳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와 우리 집의 식수를 공급하셨는데, 이 일은 아빠가 아주 최근까지도 하신 일이다. 가끔씩 약수터가 수질 문제로 폐쇄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빠는 매일 아침 약수터의 물을 받아 오셨다.


아빠는 퇴근할 때마다 과일이든 과자든 아이스크림이든 우리의 간식거리를 사들고 오셨다. 나는 아빠들은 다 그러는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고 민준이가 태어난 후에 민준이 아빠는 뭔가를 사서 들고 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그제야 이 세상 아빠들이 모두 우리 아빠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아빠가 바나나 한송이를 들고 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바나나는 동네 과일 가게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정말 귀한 과일이었는데, 아빠가 우리한테 먹여 보고 싶어서 큰 맘먹고 구해 오셨던 모양이었다.

은하가 최근에 해 준 말에 의하면 아빠가 나와 은하를 데리고 명동에 가서 돈가스를 사준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은하는 그 돈가스가 생애 처음 먹어본 돈가스라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은하에게도 아빠는 자상한 아빠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서는 아빠가 내게 손목시계를 사다 주셨다. 그 날은 아빠가 집에 늦게 오셨고, 나는 이미 잠을 자려고 이불속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만화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시계를 나에게 건넸다.

“지혜도 이제 학교에 들어갔으니 시계를 차고 다닐 때가 됐지.”

아빠는 이렇게 말했지만 당시 내 또래 중 시계를 차고 다니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나는 학교에 들어간 후에 튀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얌전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고 공부도 곧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빠는 그런 내가 자랑스러우셨고, 뭐라도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가 우리 아이에게 느끼는 마음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에 걸쳐 1개만 틀린 적이 있었다.

“지혜 시험 잘 봤는데 갖고 싶은 거 하나 말해 봐. 아빠가 사줄게.”

나는 친구들과 마론 인형 놀이를 즐겨하고 있었는데, 마침 마론 인형을 위한 가구 시리즈가 출시되어 우리 여자 친구들을 유혹하고 있던 시기였다. 친구네 집에 인형 놀이를 하러 갔다가 친구가 갖고 있던 인형 옷장을 보고 정말 부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론 인형 침대 갖고 싶어요.”

그 주 주말에 명동 신세계 백화점에 가서 아빠가 분홍색의 소위 캐노피 인형 침대를 사주셨고, 한동안 은하를 비롯해 함께 인형 놀이를 했던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있다.


나는 원래 상도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상도 초등학교는 어른 걸음으로도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는 가야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다니기에는 다소 먼 학교였다. 아빠는 가끔 출근길에 나를 차에 태워 데려다 주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 앞에서 내리지 않고 학교랑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가곤 했는데, 이유는 어린 마음에도 친구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차가 있는 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초등학생들은 누구는 어느 아파트 몇 평에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빠는 두 형제 중 차남이었고, 엄마는 구 남매 중 첫째 딸이었다. 나는 엄마 아빠의 첫째 딸이었으므로, 큰집에 가든 외갓집에 가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귀여움을 받는 첫 손주 내지는 첫 조카였다. 더군다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피부가 뽀얗고 예쁘장한 편이었으며 춤과 노래를 곁들인 애교도 많았다고 한다. 사촌 오빠들이나 이모, 삼촌들이 어린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놀아 줬던 기억이 많이 난다. 아빠 역시 맏딸이었던 엄마의 남편으로서 외갓집에서 든든한 첫 사위 대접을 받고 있었고, 친가 쪽이든 외가 쪽이든 어느 친척 집에 가더라도 환대를 받았는데, 아빠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지는 않았겠지만 빈 손으로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베푸는 데 인색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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