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기억
1980년대 초 우리 동네에는 재건축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 집 양 옆으로 우리 집과 비슷한 모양의 1층 집들이 줄을 지어 있었는데, 우리 집을 비롯한 몇 집이 마당이 넓은 그 예쁜 집들을 허물고 상가 주택을 짓고 있었다. 우리 집도 지하층이 있고, 1층에는 2개의 상가와 살림집, 2층에 살림집 그리고 옥상이 있는 멋없는 건물로 바뀌고 말았다.
지하층에는 자개 기술을 가지고 있던 큰삼촌이 작업장을 차렸고, 1층에는 약국과 이불집이 들어왔고, 이불집을 하는 가족이 1층 살림집에, 우리는 2층에 살게 되었다. 엄마는 건물을 짓는 내내 일하는 아저씨들의 점심을 손수 해다 날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아빠가 박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셋방 살이 한번 해본 적 없고, 엄마 아빠가 나이 들어서도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안 할 수 있는 건 아빠의 성실함 외에도 엄마의 알뜰함 덕분일 것이다.
나는 그 사이 좀 컸다고 아빠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수준인지를 눈치채게 되었다. 아빠는 중앙 석유라는 회사의 사장님 차를 운전한다고 했는데, TV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런 운전기사들이 어떤 식의 대접을 받는지 너무나 잘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회사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실제 그 회사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운 좋게 아주 좋으신 분들과 함께 했다 하더라도, 아빠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이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많았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회사에서 일을 해보고 난 후에야, 아빠가 한 회사에서 몇십 년을 근무 후 정년 퇴임을 한 것이 실로 대단한 일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상도 초등학교를 다니고, 5학년부터는 집 근처에 새로 지어진 신상도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리 튀지는 않지만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용모 단정한 모범생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는데, 가정환경 조사서를 통해 우리 집이 불교인 걸 아시고, 내가 교회를 다니게끔 2년간 매주 일요일 아침에 전화를 주셨고, 나는 덕분에 영동 사거리 근처의 교회를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줄곧 다녀야 했다. 가끔씩 교회에 가는 걸 귀찮아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선생님께서 나에게 쏟으신 정성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선생님이 지도하셨던 학교 합창반 활동도 했는데, 우리 학교가 서울시 합창 대회에 나가 은상을 타게 되었을 때에는, 내가 교육 구청에 선생님과 상을 받으러 간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깔끔한 용모 탓도 있었을 것인데, 내가 용모 단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가 당신 옷은 못 사도 우리들 옷은 철마다 새로 사서 말끔하게 입혔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시기에 입고 다니던 옷 중에는 공주풍의 프릴이 예쁘게 달린 공단 블라우스가 있다. 그 블라우스를 입고 나가면 누구나 다 예쁘다고 했던, 백화점에서만 살 수 있었던, 소위 김민재 아동복 브랜드의 옷이었다. 내가 그 블라우스를 갖게 되었던 날이 기억난다. 엄마랑 남대문 시장에 갔다가 그냥 구경만 하겠다고 신세계 백화점 아동복 코너에 갔었는데 그 블라우스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블라우스가 예쁘다고 하니, 엄마는 나한테 정말 이거 갖고 싶냐고 여러 번 물어보았고, 눈치 없던 나는 그렇다고 했다. 엄마가 지갑에 있던 돈을 탈탈 털었는데 아마 몇십 원 또는 몇백 원 정도가 모자랐던 것 같다. 우리가 선뜻 사지를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 블라우스 주위를 서성대고 있으니 백화점 직원이 모자란 돈을 보태줄 테니 사라고 해서 마침내 그 블라우스를 갖게 된 것이었다. 알고 보면 웃픈 사연으로 갖게 된 옷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어느 하루가 생각이 난다. 그 날은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의 학력을 조사하신다고 했다. 난 사실 우리 부모님의 학력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매년 가정환경 조사서를 작성해서 제출할 때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아빠는 고졸, 엄마는 중졸이라고 써서 내긴 했지만, 내가 알기로 우리 엄마 아빠는 영어를 잘 읽거나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속으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물론 아빠는 한자를 엄청 많이 알고 영어도 혼자서 공부해 보려고 시도했었는지 집에 아빠가 들고 다녔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영어책이 있다. 아빠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빠의 어린 시절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빠는 밥을 배불리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논과 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밥을 굶은 적은 없으나 할머니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는 이야기를 둘이 하고 있던 것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여하튼 엄마 아빠가 부끄러운 마음을 가질까 봐 자세한 걸 묻기도 싫었다. 그 날 선생님이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자, 모두들 눈감고 선생님이 손들라고 할 때 들면 돼요.”
“아빠가 대학교 졸업하신 친구? 아빠가 고등학교 졸업하신 친구? 다음 중학교?”
“이번에는 엄마가 대학교 졸업하신 친구? 다음 고등학교? 중학교?”
그때 한 친구가 아직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아직 손을 안 들었는데요. 저희 부모님은 국민학교 나오셨어요.”
나는 순간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이런 식의 조사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의 학력에 대해서는 언급 조차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 친구는 부모님을 아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눈은 감은 상태였지만 목소리로 누군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그 친구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상도동의 두 번째 집에 살던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막내 외삼촌은 시골에서 토끼를 키우고 있었다. 외삼촌은 나와 동생들에게 토끼가 씀바귀라는 풀을 잘 먹는다고 알려 주었고, 우리는 그 풀을 뜯어다 주고는 토끼가 부지런히 먹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토끼가 너무나 귀여워 서울에 데리고 가겠다고 떼를 쓴 적이 있다. 막내 삼촌이 작은 토끼 두 마리를 줘서 결국 서울로 데려 오게 되었다. 아빠는 옥상에 집에 있던 합판으로 토끼장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손재주가 좋았다. 집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뭔가를 만들어야 할 때 아빠가 손을 대면 뚝딱 해결이 되었다. 나는 아빠들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역시 결혼한 후에야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여하튼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토끼를 예뻐할 줄만 알았지 제대로 보살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처음 몇 번은 우리가 직접 뒷산에 가서 풀을 뜯어다 먹이긴 했지만, 서울에서 씀바귀는 볼 수 없었고, 배추와 아침에 아빠가 산에서 뜯어온 풀이 우리 토끼의 주식이 되었다가, 얼마 못가 토끼를 돌보는 일 자체가 엄마 아빠의 차지가 되었다. 그 토끼들은 결국 서울에서 얼마 못 버티고 살이 많이 빠진 상태에서 막내 삼촌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1984년 강남 여자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딸 노릇을 하고 있었다. 1학년 때 반에서 3-4등 하던 성적은 3학년 때에는 전교에서 10등 안에 드는 성적으로 향상이 되었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친한 친구가 많지 않다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 친한 친구들도 많은 그런 학생이었다.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는 나한테 뭔가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공부하라고 한 적도 별로 없었다. 내가 민준이를 키우는 동안 해댔던 잔소리를 생각하면 놀라울 뿐이다. 내가 공부를 하든 안 하든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를 믿고 기다렸던 것이지 아니면 내가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헌신적인 부모님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 학교 과학 행사에 참석하라고 하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리모트 컨트롤이 되는 조립용 레이싱 카를 조립해서, 경주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선생님께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고민스러워하며 엄마한테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나를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맞은편에 있었던 그런 물건을 파는 상점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를 덜컥 사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10만 원이 훨씬 넘었던 비싼 가격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물건이 있어도 나는 그런 복잡한 조립을 해본 적이 없었고, 집에도 마땅히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 과학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조립을 완성하고 우여곡절 끝에 경주에 참여하게 되었다. 평상시에 이런 쪽으로의 관심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종도 엉망이었고, 참가상 하나 받고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도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다.
여름 방학 중에는 희망자에 한해서 설악산 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 학교 행사가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나와 은하를 포함한 5명의 친구가 항상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냈는데, 은하는 사정이 있어서 못 갔고, 나도 사정이 있어 못 갔을 법도 한데 엄마 아빠는 어쨌든 나를 보내 주었다. 나는 우리 집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 중에 그것이 학교나 공부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게 해 주려고 노력했었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나보고 영어 스피치 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했다. 영어로 연설문을 작성해서 그걸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거란다. 담임 선생님은 평소 내 영어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나를 선정하신 것 같은데 이번이야말로 나는 시도해 볼 자신조차 없었다.
“집에 연설문 작성 도와줄 사람 없어? 언니나 오빠 아니면 부모님?”
“없는데요.”
담임 선생님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으시며 그럼 안 해도 된다고 하셔서 안도했던 기억이 난다.
“지혜야, 고등학교 어디 됐어?”
“상명여고.”
당시 상명여고는 삼각지 도로변에 있었다.
“그 학교 소음도 심하고, 올림픽 행사에 동원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행사에 동원되면 2학년 때 공부할 시간을 많이 뺏길 거고. 거기 아시안 게임 행사에도 참여했잖아.”
“그래? 그럼 큰일이네.”
“우리 집으로 전입 신고하고 학교 옮기는 게 어떨까?”
소명이는 신상도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한 친구다. 소명이 아빠는 LG 화학에서 근무하고 계셨고, 엄마는 결혼 전 교사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소명이네 집에 가면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신 소명이 아빠가 그리셨거나 그리고 계시는 유화들이 여러 점 있었고, 환상적인 사진이나 화보들이 실린 잡지들이 많아서 그런 것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었다. 소명이는 이 시기 방배동에 살고 있었고, 서문여고를 배정받았다고 했다. 소명이가 상도동을 떠난 이후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가끔 만나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서로의 졸업식에 참석도 하면서 아직도 순수하고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명이네 집은 부모님이 정보력이 있으셔서 상도동에 지어진 건영 아파트에 입주를 했다가 강남 개발 붐을 타고 강남으로 입성한 그런 사례였던 것 같다. 소명이 엄마는 항상 세련된 차림이셨고, 백화점에서 자주 장을 보셨다.
엄마 아빠한테 소명이가 한 이야기를 했더니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불법이기도 하고, 학교를 옮겨 멀리 다니게 되면 나도 힘들어질 거라면서 반대를 했다. 역시 우리 엄마 아빠였다.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하고, 따라야 하는 규칙은 절대로 어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이 높았고, 나는 좋은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엄마 아빠의 생각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화도 살짝 났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명 여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다행히 올림픽 행사에 동원되지는 않았다. 강남에 있는 학교들에 비하여 명문대 진학률이 좋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학교에서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졸업할 때에는 단상에 올라가 상도 받았다. 우리 집 형편에 재수까지 하게 되면 엄마 아빠가 힘들어할까 봐 대학은 안정권으로 지망해 E여대 사학과에 차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 읽은 만화책의 영향이다. 나일강의 소녀, 나일강의 여신 등 나일강 시리즈가 그중 하나였는데, 고고학을 전공하는 미국 소녀가 BC 3000년 경의 고대 이집트로 타임 슬립 되어 젊고 잘생긴 파라오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만화책들은 중학교 때 탐독한 황미나 작가의 아뉴스데이, 불새의 늪 등이다. 사실 만화책뿐만 아니라 학교 교과목 중에서도 중학교 이후로 역사 과목을 좋아했는데,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기 때문이었다.
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와 진로 이야기를 잠깐 한 기억이 있다. 아빠는 내가 약대에 가기를 원한다고 했다. 내가 약대에 가면 1층 상가 하나를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약대에 갈 실력이 될지 안될지를 떠나서 하루 종일 작은 약국에 있을 생각을 하면 답답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으로 아빠의 의견은 싹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직업 선택의 폭이 좁을 수 있는 사학과를 갔으니 나도 참 우리 집 가계에는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자식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때 아빠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지금도 가끔 후회가 된다. 물론 아빠가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빠는 내가 E여대 사학과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기뻐하셨던 것 같다. E여대는 당시 나름 명문대였고, 내놓으라 하는 집안의 딸들이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아빠가 친구나 친척들에게 지혜 E여대 갔다고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걸 몇 번 보거나 들은 적이 있다. 그걸 보는 나는 아빠 왜 저러냐고 부끄러워했었지만 말이다.
아빠가 어느 날 퇴근을 하면서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아는 분이 키워보라고 주셨다 했다. 소위 족보가 있는 강아지는 아니었지만 하얀 털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귀여운 암컷 강아지였는데, 첫째 남동생이 해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빠는 며칠 후 해미를 위해 빨간색 지붕의 파란색 강아지 집을 사 오셨다. 해미는 우리가 예뻐하기도 했지만, 아빠도 예뻐하던 강아지였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아빠가 집에 오는 것을 용케 알고는 현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다가 아빠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 펄쩍 점프를 해서 아빠 입에 입맞춤을 하곤 했다.
해미는 몇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밖에서 임신해 온 강아지를 5마리 낳은 날에는 엄마가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기도 했다. 해미는 내가 대학 시절 답사를 가 있는 며칠 사이 갑자기 죽었다. 내가 답사에서 돌아온 날 엄마가 해 준 이야기에 의하면, 해미가 죽던 날 첫째 남동생이 길을 가다가 차에 치었는데, 엄마는 해미가 동생 대신 하늘나라로 간 것 같다고 했고, 해미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했다.
아빠는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동안 사교댄스에 취미를 붙이신 적이 있다. 퇴근 후나 주말에 마루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지르박, 브루스 등의 댄스 연습을 혼자 하시곤 했다. 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분과 춤을 춘다고 질투였는지 비난이었는지 모르는 잔소리를 시작해 가끔 부부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나는 사교댄스라고 하면 카바레의 이미지가 떠올라 아빠가 왜 하필 이런 취미 생활을 할까 생각하면서 아빠가 춤 연습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도 엄마도 귀여웠던 것 같고, 아빠가 잠깐이라도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마냥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