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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akonohime Apr 14. 2020

7. 아빠, 사랑해요.

아빠에 대한 기억

1990년대 상도동


설레는 대학 시절이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사회 계층의 차이도 절감하게 되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는 대체로 비슷한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물론 빈부의 차가 있었겠지만 그다지 실감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 가급적 지원해 주려고 하셨던 분들이라 나는 더더욱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하나의 과만 해도 전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부모님이 대기업 임원이거나 사업하시는 분, 교수나 전문직, 지방의 대단한 유지인 경우도 꽤 많았다. 반면 아침에 세차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학비를 버는 친구도 있었다. 여대이고 잘 사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위 패셔니스타도 많았다. 나는 그냥 평범한 축에 끼는 그런 학생이었는데 약간 기가 죽은 적이 있긴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친해졌던 친구는 아빠가 대기업 임원이셨고, 엄마가 부동산 투자를 잘하셔서 돈을 많이 버셨다고 했다. 그 친구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방배동의 아주 넓은 아파트에 그 친구가 쓰는 방만 두 개였다. 그 두 개의 방은 공주풍의 하얀색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한 번은 그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핫플레이스였던 강남의 한 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나는 깔끔한 남방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내 친구를 비롯한 초대된 다른 친구들은 외국 영화에 나올 법한 타이트한 검은색 원피스 차림에 화장도 곱게 하고 있어서 내가 좀 많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동시에 다른 세계도 있었다. 위에서 말한 친구와 보육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봉사 활동을 하는 대학 연합 서클에 가입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알게 된 선배나 친구 중에는 소위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가 여럿 있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S대에 입학한 선배, (선배이긴 하지만 나와 동갑이었다.) 역시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해서 전주에서 K대에 입학선 선배, 부모님이 안 계셨음에도 공부를 잘해서 광주에서 S대에 올 수 있었던 친구, 집안 형편이 안 좋은 케이스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해서 나를 웃프게 만들었던 S대 친구 등…


여하튼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좁은 우물 안에 있었던 나는 대학에 들어와 보다 넓어진 세계를 경험하면서 약간 방황도 했던 것 같다. 2학년이 되고 나서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시험을 치겠다고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를 한 적도 있다. 학원비는 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 돈을 보태기도 했지만, 내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할 정도로 의지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부모님은 나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한 적이 없고, 심지어 시험 보는 날에는 아빠가 시험 장소에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첫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이후 바로 공부를 그만뒀다. 그만큼 큰 고민 없이 시도한 일이었다. 우리 집이 넉넉한 집이 아니었음에도 장학금을 받아 보려는 시도를 한 적도 없고, 졸업이 다가와도 취업에 대한 절실함을 갖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말 철딱서니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나의 대학 졸업식에는 엄마만 참석을 했다. 아빠는 회사를 결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졸업식에서는 부모님에게 학사모를 씌워 주고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었다. 나는 그 주 주말에 집 근처에 있는 중앙 대학교 교정으로 가서 아빠에게 학사모를 씌워 주고 엄마 아빠와 다시 한번 사진을 찍었다. 이 부분은 지금 후회가 많이 된다. E여대의 교정은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아빠가 딸이 다녔던 학교를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때라도 같이 가서 구경을 시켜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게 된다. 나는 정말 살가운 딸이 아니었다.


졸업을 하고 역삼동에 있는 작은 무역 회사에 취직을 했다. 아빠는 당시 출근 장소가 압구정동이었고, 같은 강남권이라는 이유로 나를 회사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아빠는 아침을 반드시 드시는 반면 나는 학창 시절부터 아침을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빠는 시간 여유가 있는 날이면 차를 야채 계란 샌드위치를 파는 포장마차 앞에 세우고, 나한테 천 원짜리 몇 개를 쥐어 주면서 샌드위치를 사 오라고 했다. 든든하게 먹고 회사에 들어가라고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빠의 그 마음이 생각나 눈물이 많이 난다.


무역 회사의 내 담당 부서 과장님은 나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대단히 깐깐하신 분이었고 그래서 인정을 받고 계신 분이었다. 첫 직장이다 보니 처음에는 개념도 없고 서투른 점이 많아 과장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몇 달 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S사에게 개설한 SE(Software Engineer) 양성 과정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중학교 친구 선희와 등록을 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한 친구들에 비해서 출발 지점이 늦어지긴 했지만, 교육 과정을 마친 후 1997년부터 IT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최근까지 이 업계에서 일을 해왔다. D대 사회학과 출신의 선희도 여전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IT 컨설팅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하고 있다.


1994년 2월에 대학을 졸업 후, 3년이라는 어떻게 보면 짧지 않은 시간을 떳떳하지 못하게 이것저것 해보며 살았건만 엄마 아빠는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했고, 아빠는 내가 회사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역삼동에 있던 학원에 나를 데려다주었고, 엄마는 매일 아침 아침을 거르는 나에게 간식을 싸주었다. 나는 민준이를 키우는 동안 민준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봐 항상 채근하면서 스트레스를 줬는데,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잔소리 한번 안 하고 나를 지켜보기만 했는지, 지켜보면서 속으로는 얼마나 불안했을지 그 마음이 지금에야 이해가 되어 죄송한 마음이 크다.


나는 1999년 3월에 결혼을 했다. 당시 회사 일이 바빴기 때문에 가구나 가전 같은 혼수 준비를 나 대신 엄마와 아빠가 주말마다 다니며 했다. 엄마와 아빠가 팸플릿을 가져다주면서 조언을 해주면, 내가 고르고, 다시 엄마와 아빠가 가서 구입하는 식으로 결혼 준비를 했다. 상도동에 마련한 신혼집 입주 전 청소도 엄마와 아빠가 와서 같이 해주었고, 청소를 도우러 왔던 시동생들에게 점심으로 돼지갈비도 사준 것도 아빠였다. 아빠는 내가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걸 볼 때면 항상 이렇게 말했다.

“신랑한테 잘해. 집에서 대접받아야 밖에 나가서도 기가 사는 거야.”

남편도 처갓집에 잘하는 편이었지만 아빠도 사위를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다음 해 내가 민준이를 낳았을 때 나는 난산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산모들보다 병원에 하루를 더 있었는데 아빠가 퇴원 전날 혼자 여의도에 있는 병원에 오셔서 수고했다고 용돈을 주시고는 바로 가셨다. 나는 어차피 다음 날 퇴원 후 엄마네로 갈 예정이었는데 왜 아빠가 굳이 그 날 오셨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90년 대에 우리 집은 상가 주택을 팔고 다시 작은 마당이 있는 1층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이 집에 살 때 아빠는 당신의 차를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가 산 건 아니고, 회사에서 안 쓰는 차 룰 아빠에게 줬다고 한다. 이 차가 나의 출근을 도와준 그 차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에는 항상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보니 확연히 비교가 되었다. 아빠의 운전은 부드러웠다.


이 집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해 초겨울 엄마는 김장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돕는답시고 절인 배추를 나르다가 그만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고, 순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놀라서 나를 내 방 침대로 옮기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허리 찜질을 시작했다. 그 날 아빠가 몇 시간 동안 내 허리를 주물러 줬던 게 기억난다. 나는 물론 그다음 날부터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으면서 회복이 되었다.


이 집에서 얼마 살지 않아 이 집은 다시 다가구 주택으로 재건축이 되었다. 반지하층에 2가구, 1층에 1가구, 2층에 1가구가 살 수 있었고, 옥탑방이 있는 그런 주택이었다. 마당이라고 할 게 없었지만 아빠는 구석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 거기에 감나무를 심으셨다. 우리는 이 집 2층에 살았다. 나는 이 집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결혼 후 이 집을 떠났으나, 민준이가 3살쯤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아빠가 심은 감나무에서는 달고 탐스러운 대봉이 열리기 시작했고, 최근까지도 매년 감을 수확해 겨우내 드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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