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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Oct 25. 2022

충, 그 단순한 글자가 주는 슬픔

멸칭이 가져오는 혐오의 증폭

아이들은 곤충 구경을 좋아한다. 나는 징그러운 맘에 좀 싫어하는데. 사진 찍어달라 들고 온 사슴벌레를 보다가 문득 요즘 세상에서 없애고 싶은 글자가 있다면 충()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자 '벌레 충()'. 곤충, 삼엽충, 기생충....자주 볼 수 있고 모양도 참 쉬운 글자다. 나는 벌레 싫어(무서워)하지만, 저 한자를 특별히 싫어하진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글자가 불편해졌다. 원래 가진 뜻과는 다르게 우리 곁을 맴돌면서,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어서다. '충'자를 붙인 멸칭들이 쏟아져 나오면서부터다.


멸칭(蔑稱). 경멸의 마음을 담아 부르는 말.


'충'자를 처음 멸칭으로 접한 것은 특정 커뮤니티 이용자를 의미하는 '일x충'이었던 것 같다. 평소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짓을 일삼던 곳이어서 나도 이 단어를 몇 번 입에 담아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이 '충'자가 벌레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급식충, 맘충, 틀딱충, 비온 후 벌레가 급속도로 번식하듯 충이란 글자도 밑도 끝도 없이 번식다. 이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벌레로 분류될 판이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책 '82년생 김지영'에는 유모차를 몰고 커피를 마시는 김지영 뒤에서 일도 안하고 남편이 벌어온 돈이나 축내는 맘충이라고 수근거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 역시 아침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서 커피를 한잔 하 게 내 낙이었는데,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가 남편 돈을 축내는 걸로 오해하면 어쩌나 신경쓰였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커피 좀 마시면 안될까요.

충이란 글자는 이제 이렇 사람을 위축키는 글자가 됐다. 이 글자는 어디에 붙어서도 멸칭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커뮤니티에서는 맞춤법 지적하는 댓글을 향해 맞춤법충이라고 하기도 하고, 가부장적인 한국남자를 한남충이라고 부르는 부류들도 있다.


충자 들어간 멸칭을 쉽게 쓰는 사람들은 아마 급식충이란 단어를 대하던 내 마음과 비슷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그런 벌레가 아니니까. 그런 마음이 충자의 번식을 빠르게 한 것 같다.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마음.


하지만 충자는 벌레처럼 어디든 잘 붙을 수 있고, 경멸하는 마음으로 바로 나를 노릴 수도 있다. 내가 맘충이라는 단어에 찜찜한 마음을 느끼는 것처럼, 비슷한 속성이 있다고 나를 노려 찌를 수도 있는 혐오의 표현이다.


어떤 부류를 한 묶음으로 묶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쉬워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특징 한 가지를 가진 모두를 혐오하는 것도 쉬워진다. 맘충, 한남충, 틀딱충은 벌레 같은 것들이니 혐오스런 행동을 하지 않는 애엄마, 한국남자, 노인들마저도 혐오하는 대상이 돼버린다.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모두를 쉽게 타자화하고 멸시하고 배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멸칭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나와 다른 그들에 대한 혐오를 속 증폭시킨다.


충이란 글자는 그래서 나를 슬프게 한다. 벌레를 뜻하는 단어에 쓰이는 것 말고는 세상에서 모두 지워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몇 안되는 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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