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책은 첫 장을 읽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흥미가 돋고 작가의 세계관에 젖어들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재미있는 책이다.
이번 도서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이다.
도서명은 '픽션들'로 보르헤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읽어보면 안다.
이것은 마치 현실처럼 사실로 일어났던 일처럼 다가온다.
보르헤스가 작정하고 각주를 달아놓은 탓에 그의 덫에 여지없이 걸려들기도 한다.
그래서, 흥미로움을 넘어서 보르헤스의 생애가 궁금해지고 그가 창조한 세계가 매력적이라서 그것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보게 된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한 권의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독자가 생겨나고 그것은 새로운 창작의 영역으로 이끈다.
아, 보르헤스는 천재적인 예술가였구나.
왜 아르헨티나에서 보르헤스를 영웅적인 작가로 여기는지 알 것 같다.
1. 지각과 사유
폐울혈로 죽었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보자.
그는 사고로 뛰어난 기억력을 얻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기억이 중첩될 뿐이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더라도 그에겐 항상 새로운 것이다.
우린 구름의 모양이 달라도 같은 구름이고 하늘의 색깔이 달라도 같은 하늘이지만 푸네스에겐 구름과 하늘이 동일한 것이 아니다.
푸네스에겐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을 지각할 때도 항상 새로웠을 것이다.
사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둘이 하나의 나라고 추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영역이다.
푸네스는 감각으로 대상을 구체화할 수 있으나 그것을 구성하여 개념으로 만들고 추리하여 판단할 수 있는 사유라는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보통 감각으로 얻은 것들을 일반화하여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상을 이해한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2. 차이와 반복
피에르 메나르는 푸네스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한 톨도 다르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을 창작한다.
차이는 무엇인가.
배경, 작가의 사상, 글이 읽히는 시대, 독자의 다름에서 비롯된다.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반복한다고 해서 항상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기억 천재 푸네스는 반복하지만 항상 다른 풍경을 보았다.
그는 미세한 차이를 인지했고 질 들뢰즈가 주장한 차이가 생성으로서의 과정이라는 것을 보았다.
보통 인간은 그러지 못한다.
우린 미세한 차이를 담아낼 인식 체계가 없어 반복이라는 단어로 매 순간 달라지는 세상을 붙잡는다.
페에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반복하면서 차이를 생성했듯이 우리도 모든 순간을 반복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그 순간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린 인지할 수 없는 차이점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3. 무한과 순환
보르헤스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개념을 벗어나 통합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시간은 뒤에서 앞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시에 흐른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세상은 한 권의 책이자 하나의 시다.
그것들은 세상을 닮아 같은 구조를 이룬다.
보르헤스의 묘사대로 무한히 계속되는 육각형의 진열실을 떠올리면, 그것은 명확해진다.
단순한 모양이 끊임없이 자기 증식을 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이룬다는 것은 순환을 말한다.
그리고 그 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니 자기 유사성을 띤다.
사실, 우리가 실재하는 세상에 이렇지 않은 것이 몇 개나 있는가.
혈관의 분포도, 나뭇가지 모양, 산맥의 모습 등 모든 것이 프랙털의 구조로 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이것이 주기적으로 반복한다고 말했다.
바로, 그것이 무한이다.
질 들뢰즈가 또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시간을 독립적인 사건, 과거 사건을 종합하여 구성, 회상과 기대를 통한 미래 창조라는 세 가지 종합 이론을 내세웠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이 살아 끊임없이 반복하듯 현재라는 시간은 살아 있는 것이다.
고정된 단위가 아닌 계속해서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수축의 과정이다.
그것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서 잘 드러난다.
4. 미로와 카발라
보르헤스는 환상적 사실주의의 대가였다.
그러니, 미로와 카발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작품에는 미로가 자주 나온다.
'바벨의 도서관'도 미로의 하나이고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죽음과 나침반'도 그렇다.
보르헤스는 무한히 반복하는 육각형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카발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카발라는 일종의 신비주의로 생명수나 장미십자단 등 여러 영성학파와 연결된다.
생명수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한데 이것이 육각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나무는 힘의 기둥과 현태의 기둥, 균형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는데 유출, 창조, 형성, 활동이라는 사중구조를 갖는다.
이것은 신의 이름이라는 야훼에 해당한다.
이 기둥들과 네 개의 세계에 교차점이 발생하고 이곳에 10개의 세피로트가 생긴다.
이 세피로트가 바로 육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각종 기호학과 기하학을 사랑했던 보르헤스는 이러한 카발라의 철학관으로 상상력을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유산을 이어받아 영화나 예술에서 활용하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큐브 등>
5. 해체와 난해
이제 감상의 끝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각주를 달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보르헤스는 작가로서 글에 참여하였지만 각주를 달면서 편집자로서 참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주석들을 해석하려는 도전은 의미가 없다.
그는 전통적인 읽기를 해체한 것이다.
하나의 기호인 글을 제공하고 독자가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읽기에서 벗어나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을 바벨의 도서관으로 만들었고 똑같은 돈키호테를 전혀 다른 작품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면서 묻는다.
너는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고.
내가 사용한 언어가 네가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기호냐고.
읽기를 해체하고 기호를 해체하고 인간을 해체하여 미로처럼 만든다.
그러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서 합쳐지기도 한다.
이래서, 그의 글은 난해하다.
나는 이것을 보르헤스가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수사법엔 비유, 강조, 변화 등의 방법이 있듯이 보르헤스는 자신의 작품을 일부러 난해하게 표현한 것이다.
보르헤스의 감상이 끝났다.
그의 뛰어난 예술 감각 덕분에 실컷 신나게 놀았다.
이제 더 무엇이 남았을까.
보르헤스의 말대로, 이 미로와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시인으로 남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을까?
아, 시인이 되기란 참으로 어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