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스레츠코 호르바트의 고향은 유고 슬라비아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내전의 홍열을 앓던 고국을 떠나 독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
호르바트는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철학자로 살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내력이 그가 사랑과 혁명을 고찰하는 책을 쓰는 힘이 되었으리라.
호르바트는 여러 독재정권과 콜로타이, 아르망, 레닌,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시민들의 활동을 싣고 있다.
1979년의 이란 남성들, 2011년 타흐리르 광장 시위, 2015년 오슬로 시위 등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감싸주려고 했던 사례들을 열거하며 타인에 대한 사랑 없이는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랑과 혁명을 저울 위에 올려,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둘이 사실은 상호 등가적 관계이고 같은 감정의 폭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느 쪽의 전제도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헤겔적 지양의 태도라고 느껴진다.
그럼, 호르바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사랑의 감정은 급진적으로 생겨난다. 하지만 그것은 인스턴트식 연애도 아니고 가벼운 성적 결합도 아니다.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 힘, 영속성을 지녀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용기로 강해진다.
상대방을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뻗으려는 모험심, 사랑을 전제로 행동하려는 결단이 그렇다.
호르바트가 말하는 혁명 역시 같은 모습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그러므로 꿈을 향해 내디디려는 모험심을 행동으로 이루려는 결단, 그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볼까.
사랑은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와 공감하려는 노력, 상대를 위한 헌신과 자신을 양보하는 희생이 있어야 진정해진다.
이것은 사랑을 지켜가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호르바트는 혁명도 그렇다고 말한다.
같은 사회를 공유하는 일에 관한 이해, 타인에 대한 공감,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진정한 혁명으로서 당위성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호르바트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사랑이 발현하고 우린 타인을 자신을 대하듯 사랑하고자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점점 커져 공동체 의식이 되어, 같은 사회를 공유하는 공동의 이상을 위한 목표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다 같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연대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그런 연대이니 사랑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는 말이 된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투쟁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할 수 없었지만 그 신념도 사랑 없이는 시작도 못 했을 거라는 게 호르바트의 주장이다.
사랑과 혁명이라는 철학적 사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예술작품부터 가요까지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김현성의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라는 노래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필요한 것임을"이라는 가사가 있는 서정적인 노래이다.
어쩌면 진정한 유대감의 시작은 해결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감하는 것인가라고 생각이 든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 카즈코는 소설가 우에하라를 만나기 위해 상경한다.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결심으로 편지를 쓰는데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간다'라고 말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사랑과 혁명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6월 봉기가 일어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장발장과 그가 사랑한 코제트를 생각한다.
코제트를 위해 그녀를 마리우스에게 맡기고 떠나는 모습이나 6월 봉기에서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를 살려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일련의 사건이 지나가고 장발장은 코제트를 그리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코제트와 재회를 하자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죽는다.
그의 사랑은 코제트를 향한 부성애였고 그녀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희생하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사랑과 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1968년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역사의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네 남녀를 통해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그 작품의 주인공들 같은 예술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도 빼놓을 수 없다.
멕시코 민중봉기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디에고와 그를 사랑한 프리다의 절절한 이야기는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디에고의 여성편력에 더해 수술 후 입은 장애로 그녀는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사랑과 운명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이 많았다.
멀게는 고구려의 명림답부, 가까이로는 정도전, 근처에는 갑신정변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이 있고 김산이라는 독립운동가도 있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죽었고 김옥균은 은신하다 암살당했으며 박영효는 친일로 돌아섰다.
운명과 함께 삶을 마무리한 낭만이 살아 있지만 사랑이 식어 신념이 꺾여버린 이도 존재하는 것이다.
김산은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거리에서 기도를 하던 여신도들을 총칼로 탄압하는 일본 순사들에게 분노하여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이유 없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타인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의 존중의 마음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는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 많은 아이와 어른이 죽었다.
이 사건은 사랑과 연대에 대해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이야기다.
유가족들과 다수의 시민들은 그 테러리스트에게 노래로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장면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복수와 용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없어도 우리가 사람일 수 있는 건 사랑을 하고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넘어 타인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우리는 개별적으로 독립된 존재이지만 내가 '나'일 수 있고 정체성을 만들 수 있는 건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다른 타인을 사랑하고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 인류는 많은 이유로 분열하고 있지만 천천히, 천천히, 끈끈한 연대감으로 맺어지게 되리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