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
독서나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사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필사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베껴 쓰는 것이다. 이는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글을 표절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글을 모아둔다는 의미이다. 멋진 작가들이 쓴 멋진 글을 잘 모아두다 보면 필사는 여러 방면으로 쓰일 수 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후에 꼭 필사를 한다. 일종의 독서 마무리 루틴인 격이다.
필사 노트는 책 전체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기억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 이유와 같다. 여행이 끝나더라도 생생하게 현장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대부분의 내용을 까먹기 마련인데, 필사를 해두면 감명 깊었던 부분을 훨씬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전체 글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의 나만의 편집본이 만들어진다.
나는 약 5년간 꾸준히 필사를 해왔다. 지금까지 약 네 권의 노트를 꼬박 채우고 간직하고 있다. 때에 따라 내가 쓰는 글에 입체감을 더하기 위해 인용하기도 한다. 인용의 효과 이외에도 필사 노트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글의 휴대가 편리하다는 점이다. 책을 들고 다니기 무거울 때 필사 노트는 진가를 발휘한다. 가끔 카페에 가서 라테 한 잔을 옆에 두고 사색하고 싶은 날, 또는 가볍게 바람 쐬러 나가고 싶은 날에는 꼭 필사 노트를 챙기곤 한다. 손에 가볍게 쥐어지는 노트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을 수도 있고, 자투리 시간에도 부담 없이 꺼내어 읽을 수 있다. 여행을 떠날 때도 필사 노트는 반드시 챙겨 나간다. 작은 노트 하나에 책 열 권이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책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무게 면에서나 핵심 면에서나 이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점은 좋은 작가의 좋은 글들을 다독(多讀)하면서 그들의 문체나 사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생겨난다. 좋은 글을 나의 손으로 기록을 해두고 반복해서 읽는 과정에서 작가의 관점과 나의 관점이 융합되면 생각의 확장이 일어난다. 즉 여러 작가로부터 조금씩 얻어내는 지혜로부터 연결점을 찾고, 나만의 생각을 다시 발견해내는 것이다. 필사는 단지 남의 말을 따라 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읽고 소화하는 과정 모두를 총괄한다.
필사 노트는 나만의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전에 쓴 노트로 그간 내가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연도별로 바뀌는 관심사를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어떤 날은 감상적인 시나 소설의 한 구절이 기록되어있고, 어떨 때는 실용서의 현실적인 한 마디가 쓰여있다. 필사는 일기보다도 훨씬 더 정갈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이다.
필사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책에 줄을 긋거나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어두고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는 도서관 책을 주로 읽기 때문에 최대한 책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책을 깨끗이 읽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할만한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작은 플래그 포스트잇을 붙이는 방법이다. 책을 읽으며 감명 깊은 구절에 표시를 해두고,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으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표시된 구절을 필사하면 된다. 포스트잇은 투명한 재질보다는 종이로 된 것을 추천한다. 투명한 재질을 쓰면 스티커 부분에 먼지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종이로 된 플래그는 그보다 튼튼하고 먼지도 잘 보이지 않아서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시 재사용할 수 있다.
필사를 위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책 전체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거시적인 관점이 보인다. 이것은 내가 필사를 할 때 가장 흥미롭고 기대되는 부분이다. 가령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라도 중요한 구절을 모아두면 작가의 의도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쉽고 빠르게 된다.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베껴쓰기는 꼭 함께 시도해볼 만한 활동이다. 필사는 책뿐만 아니라 자신이 본받고 싶은 멋진 글이라면 모두 가능하다. 인터넷 기사든, 블로그 글이든, 잡지든, 출처 없는 길가의 광고판이라도 차곡차곡 기록을 쌓다 보면 언젠가 나만의 멋진 잠언시집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