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퇴사해서 파이어족은 못 되어도, 종종 쉽니다.
조심스럽게 고백해본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안식년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학교는 얼결에 현역으로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자의 혹은 타의로 최소 6개월 이상씩은 쉬었었다. 생산적인 일 따위는 하지 않고 푹 쉬었다.
이런 시기마다 주변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있다. 쉬는 건 부러워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나는 한 번 쉬면 다시 열심히 살기 힘들 것 같아서 못 쉬겠어,
혹은 쉬고 싶어도 그 시간을 잘 보낼 용기가 없어,
혹은 쉬면 불안해서 못 쉬겠어 부러워, 의 이유를 붙인 말을 종종 듣는다.
아니 이렇게 좋은 안식년을 왜 주변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지 안타까워서
나는 안식년 전도사가 되어 종종 그저 이 하릴없는 쉼의 시간을 찬양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뭐든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가보다. 열심히 일할 용기는 잘 내는데, 쉴 용기는 잘 내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면 많이 쉰 것 같지만, 20대 중반에 1년을 쉬고, 또 30대 초반에 6개월 정도를 놀았다.
에? 그정도면 다들 취직 준비하고 하다보면 쉬게 되는 거 아닌가 싶을거다.
하지만 나의 전공은 의료보건계열이다. 보통 졸업하고 나면 대부분 바로 취업을 한다.
주변에서는 쉬어서 한 살이라도 많아지면 다시 일하러 가기 힘들다고들 말했었다.
동기들보다 1년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을 앞뒀던 그 시기, 나는 도저히 일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너무 그저 쉬고 놀고 싶었다.
자격증을 최종 목표로 대학교 생활을 했다. 뭔가를 성취해야지만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는 것에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쉬겠다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반대하실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제적 원조도 없이 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성인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난 원체 고집이 좀 센 편이기도 했다.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다. 취직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여행 다니면서 놀았던 그 1년은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시절이다.
고등학교에서 입시 전쟁을 시작하면서 (요즘은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
나는 1년씩이나 되는 내 삶의 시간 계획을 내가 직접 짜서 운용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누군가 늘 나에게 지금 현재 해야 하는 삶의 목표를 지정해줬다.
나는 세상이 정해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느라 아등바등했다.
그게 나의 26살까지의 삶의 궤적이었다.
그동안 삶에서 나의 주체성이란 없었다. 내 시간들은 큼지막한 선에서 이미 정해져있었다.
내 맘대로 한 건 고작해야 내가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거, 하고싶어서 한 연애 정도였을까?
근데 엄밀히 말하면 옷도, 먹는 것도, 연애도 100% 주체적이진 않았던거 같다.
세상이 입으라고 정해준 마지노선의 튀지 않는 옷, 요즘 유행하는 음식점, 남들이 한 번쯤은 해보라는 혹은 하지 말라고 말리는 CC 정도.
나의 시간은 나의 것이지만, 세상에 끌려 다니는 기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시간들 속에서 나를 위한 건, 늘 해야하는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가능했다.
그 미뤄진 우선순위가 나의 영혼을 지치게 했던 것 같다.
도저히 쉬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고 선언해버렸으니 말이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까? 최소 시간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1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의대 6년, 인턴 1년, 전공의 4년. 재수를 하거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들어간 경우는 그에 더해져 총 12~13년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4년의 학부 과정을 마치고 4년의 로스쿨 생활을 마치면 총 8년, 그런데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50%이다 보니 대부분은 시험을 2-3번 친다. 그렇게 되면 9~10년이 걸린다.
문이과의 가장 대표적인 전문직의 직함을 달기 위해서는 대략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내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들인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잘 취직하고, 월급을 벌고, 결혼하고, 집을 사기 위한 시간은 참 많이 들였다.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떻게 살고 싶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간을 거의 못 썼다.
아니 전문적인 뭔가를 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삶을 잘 살아내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잘 살아내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셈이다.
나는 어디서 그런 글을 읽은 것도 누가 상담해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일단 모든 것을 놓고 쉬어야겠다고 절박한 마음으로 결심했다.
아니 결심했다기 보단 그냥 그래야 한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왔다.
불안정하고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서 그냥 푹 쉬는 시간을 가져버렸다.
그냥, 그냥 쉬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운동도, 아무리 좋은 여행도, 사이의 쉼은 꼭 필요하다.
달리기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심폐지구력과 전신 근력을 키워준다. 뼈를 튼튼하게 하고 당뇨나 고혈압 등 성인병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건강에 좋을까? 그렇게 계속 달리기만 하다가는 쓰러져서 탈수와 열사병으로 응급실에 실려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달리기가 좋은 운동이어도, 어느 순간 내 건강을 해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달리기를 멈추고 쉬어야 한다.
쉬면서 숨을 돌리면서 물을 마시고 근육을 쉬게 하고 충분한 영양소를 보충해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달리기가 내 몸에 좋은 영향을 주도록 할 수 있고, 잠깐 쉬어감으로 더 멀리까지 뛸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그렇게 달리면서 어느샌가 내 영혼의 한계치까지 왔음을 느꼈고,
숨이 너무 찬 나머지 잠시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그 1년을 쉬는 동안 특별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기준이었다.
내 삶인데 그 이상으로 중요한 기준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1년 동안 100권 가까운 책을 읽었다. 무려 일주일에 2회씩 독서토론 모임도 열심히 나갔다.
책을 좋아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맘껏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단순히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으면 가능하지 않겠냐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시간의 여유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의 여유다.
보통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제대로 못 보낸다.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적은 시간도 잘 보낸다.
그런데 정말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제대로 쉬지 못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다.
쉬어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간신히 되찾는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므로 쉼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비성수기에 동유럽 자유 여행도 다녀왔다.
성수기를 살짝만 비껴가도 훨씬 적은 금액으로 오랫동안 머물며 여행 다닐 수 있다.
민박도 호스텔도 묵어 보았다. 한국인 친구들도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고 가끔 동행도 함께 했다.
그 시간은 내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그 용기 이상의 보상을 가져다주었다.
아마 지금 다시 여행을 간다 하더라도 그 나이의 그 감수성으로 풍경을 마주하고 감동을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봉사활동도 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검색해보니 1365 자원봉사포털이라는 곳이 있더라. 접속해보니 집 근처의 방과 후 아동 돌봄 센터에서 낸 공고가 있었다. 다문화 가정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의 방과후 시간을 담당하는 선생님 자리였다.
원래도 아이들을 좋아해서 어렸을 적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이렇게라도 그 꿈을 이뤄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의미있을 것 같아 지원했다. 그리고 그 1년 정도의 시간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따.
한 두 달만 왔다가 가는 선생님이 많아 처음에는 아이들이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서 아이들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점점 친해지고 나에게 속마음을 터놓는 것은 또 다른 큰 감동이었다.
나중에는 급식 시간에 내 옆에 앉으려고 쟁탈전을 벌이던 초1의 귀여운 두 꼬마 아가씨들,
매우 퉁명스러운 말투로 애를 먹었으나 나중에는 친구와의 고민 상담까지 하던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
어린이날 기념으로 다이소에서 구입한 학용품 같은 별로 비싸지도 않은 선물에도 너무나 기뻐하던 그 순수한 웃음들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잘 지내고 있을 지 지금도 가끔 궁금해진다.
그렇게 단순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는 것’ 만으로 1년을 보냈다.
뭐 거창하고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세운건 아니다. 엄청난 자기 발전을 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이런 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어떤 방향의 감을 잡은 느낌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것을 중요시 여기며, 어떨 때 행복한 지에 대해 1년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열심히 탐구했던 것이다.
1년 동안 푹 쉬면서 알게 된 나라는 사람의 특징은,
1. 워라밸을 매우 중시한다. 하지만 아예 노는 것보단, 약간은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상적으로는 주 20-30시간 정도)
2. 막상 돈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작은 돈으로도 1년을 꽤 즐겁게 살았다.)
3. 여러 가지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4. 취미로는 책 읽고, 춤추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5.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해내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이었다. 나 스스로 알아낸 나의 특징은 그 이후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나침판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겐 이게 좋을 거야'라고 대신 말해주는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알아낸 것들이기에, 바쁘고 멘탈이 흔들릴 때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나로서 잘 살아가기 위한 실험을 해보았다.
석사나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한 실험이 아니었다.
A라는 환경에 놓였을 때 이 실험쥐가 잘 지내는지가 아니라,
A라는 환경에 놓였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잘 지내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 실험은 나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고 누구도 결론을 내려줄 수 없었다.
직접 가설을 세우고 실험해보고 분석해서 내 삶에 대해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는 건 분명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을 들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쉬는 것은 내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걸 늦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지름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