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힘든 날들이 계속되자 나는 테오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고, 마지막 두 달은 1인실로 격리되어 끝내 나와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채로 눈을 감았다.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고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내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이 이런 모습이라니. 한동안은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도 괴로웠다. 내 몸과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남편도 아주버님을 따라갔다. 가버렸다. 가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만난 지 4년, 결혼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나는 28살. 28살에 애 딸린 과부가 되었다.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했다. 이사하고 나서도 남편이 한사코 못 들어가게 했던 그의 방도 정리했다. 그림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고 종이뭉치도 수두룩했다. 한때 <곷피는 아몬드 나무>로 감동을 주었던 아주버님의 그림이지만 지금은 그냥 쓰레기캔버스일 뿐이다. 남편과 내가 일했던 몽마르트의 화랑에 모두 다 팔아버렸다. 내가 일했던 화랑의 사장님들 중엔 가장 인격적이고 따뜻한 분이셨다.
“요안나, 소식 들었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러게요. 저도 모르겠어요. 이 그림들 살펴보시고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다니, 요안나. 고갱이 얼마 전에 연락왔었어. 고흐의 그림을 좀 보고 싶어서 테오한테 편지를 했는데 답이 없다면서 여기로 왔더라고. 고흐 그림 보겠다는 이가 고갱 말고도 몇 있었어.”
“아, 그래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너무 지쳤고 누가 와서 아주버님의 그림을 찾든 말든 나는 이 그림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이제 고흐 집안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그리고 그림이 팔리는 대로 더 보낼게. 내가 노력할테니 그림은 걱정말고”
“네. 감사해요.”
“걱정 내려놓고 일단 좀 쉬어. 연락할게”
“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쉬어지지가 않는다. 쉬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림에 대해서는 전혀 흥정 하지 않았다. 주는 대로 받았다. 일단 그림이 내 주변에서 없어져 주는 게 고마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파리는 내게 아픔을 주었다. 파리는 아픔의 파리이고, 나를 앓게 하는 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