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의 공동묘지이다. 살아있는 동안 친구도 거의 없이 그림만 그리셨을 아주버님은 동네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함께 계신다. 어쩌면 아주버님은 외롭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오히려 외로웠을 사람은 위트레흐트에 있던 내 남편 테오였을까. 테오를 보내고 10년 후 나는 재혼을 했고 그 뒤로 10년 후에 또 사별했다. 남들은 단 한 번 힘겹게 겪어 내는 사별을 나는 두 번이나 겪었다. 나에겐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고, 손자도 있고, 손녀도 있지만 남편만은 있지 않았다.
이렇게 쨍한 햇볕을 이렇게 오래 쪼이고 있던 건 처음인 것 같다. 이 동네는 원래 볕이 잘 드는 동네인가. 햇볕을 쪼이며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니 남편에게 가야 할 햇볕을 내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비껴섰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는 남편과 아주버님 사이에 서 있다. 둘은 나란히 누워있다.
내 사랑하는 남편, 많이 사랑했던 남편 그리고 남편이 사랑했던 그의 형.
남편을 바라본다. 남편을 생각한다. 많이 사랑했지만 사랑만 할 수는 없었던 날들의 나의 부족했던 마음과 차가웠던 말들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 들었지만 잊은 척 해주었던 당신의 사려깊음을 기억한다. 미웠고 원망스러웠지만 결국 내게 중요한 선물을 주고 가신 아주버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제는 내가 떠나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여한이 없을 인생이지만 떠날 때를 내가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 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이 사랑했던 아주버님의 그림과 글을 알려서 아주버님의 영혼의 친구들을 더 만들어 드려야지 싶다.
엔지니어가 되었던 아들이지만, 전쟁 후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아들은 아주버님의 그림과 편지에 관심을 보이더니 본격적으로 미술관 일에 나서주었다. 나로서는 참 고마운 일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내 판단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고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툭 터놓고 상의하기에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믿고 상의도 할 수 있고 의지도 할 수 있는 아들이 나서주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여전히 햇볕은 따사롭게 비치고 있고 나는 적당히 눈부시게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맑고 높지만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 덕분인지 하늘과 땅의 거리가 참 가까운 것 같다. 이런 햇볕이 이 둘을 감싸주면 좋겠다. 지금처럼 가까이서 따뜻하게. 이렇게 햇볕이 이 둘을 감싸준다면 이곳에 인적이 드물어도 둘은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둘이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해가 있는 동안에는 따뜻하게 가까이서 감싸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