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버님 덕에 막막하기만 했던 나와 아들의 삶이 조금씩 윤택해졌다. 죄송하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돌이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은 내 아들 빈센트 반 고흐는 자라면서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게 되는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았다.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주버님이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이력 때문에 ‘미친 화가’로 알려져 있기도 했는데, 내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큰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으니 좋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놀이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그림그리기인데 아들은 꼭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그림그리기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미술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건지,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은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들은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는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또 내가 해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가던 중에 아주버님의 그림과 인생에 감동을 받은 분들이 아주버님의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에 뜻을 모았다. 나도 막연하게 바라기만 했었는데 구체적으로 일이 진행되니 감격스러웠고, 드디어 남편과 아주버님에 대한 나의 책임과 도리를 다한 기분이었다. 감사한 분들로 인해 암스테르담에 아주버님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겼다. 집에 있던 아주버님의 그림들을 그곳에 기증했다. 그림을 사셨던 분들 중에서도 다시 기증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 그림 중엔 나에게 없었던 남편의 초상화도 있었다. 많이 닮았었구나. 새삼스럽게 남편과 아주버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20년 넘게 흘렀다. 23년만이다. 남편이 떠난 지 23년 만에 형 곁으로 옮겨주었다. 위트레흐트에 있던 남편을 오베르에 계신 아주버님의 옆으로 옮겨준 것이다. 내 인생은 질기고 질겨 쉬이 남편 곁으로 가질 못하니, 남편이라도 사랑하는 형 곁에서 외로움을 달래라고. 편지로 나눴던 대화를 이젠 옆에서 하라고.
이 동네는 이렇게 햇볕이 쨍쨍하구나. 구름 없는 환하고도 따뜻한 날씨가 제법 오랜만인 것 같다. 아주버님의 그림에서 보았던 오베르시청에서 길을 건너 라부 여인숙으로 가 보았다. 여인숙 1층은 식당인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밭에서 일을 하다 왔는지 밀짚모자의 장화차림을 한 남자가 어서 오시라며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직원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사장님이신가. 그때도 계셨던 사장님이신가. 아닌가. 오래된 일이라 사장님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정신이 없기도 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