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t feminism
5 년 전, 6월의 첫날, 나의 큰형부가 세상을 떠났다. 큰형부 56세, 큰언니 53세 때의 일이다. 결혼생활 26년 만에 일어난 이별이다. 아주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형부는 간암 투병중이었기 때문이다.
투병중이었다고는 하나 형부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도 상당히 건강해 보였다. 가만 보면 암은 참,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병인 것 같다. 치료가 꽤 효과 있어, 하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회복되었다 싶었는데, 갑자기 악화되었으니까.
이른 아침, 형부가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때는 직장인이었는데) 출근을 접고, 곧장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에 있는 형부를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면회시간은 하루에 딱 두 번이었다. 점심 먹고 조금 기다리니,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나는 조심조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중환자실용 실내화를 갈아신으며 둘러보니, 수많은 의료기기들 사이로 형부가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간암의 마지막 증세일 텐데, 온 몸의 피부가 노랗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형부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침대에 결박돼있었다. 저 정도로 중한 병색의 환자가 발버둥이라도 칠까 봐 그랬을까? 마음이 무거웠다.
저녁에 중요한 모임이 있어, 나는 병원을 떠났다. 모임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형부의 사망소식이 휴대폰 문자 메시지함으로 날아들었다.
남편이 사망하고 삼사 년쯤 지나며 어떤 사람들이 가끔 언니에게 ‘재혼’이란 단어를 꺼내는가 보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다. 남자도 안 만나는 눈치다. 나중에 또 어찌 될지 모르지만 사별 후 5년째인 올해까지 언니는 딸과 함께 지내며, 재혼은 안중에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얼마 전 어떤 분이 내게 언니 안부를 물었다. 나와의 친분으로 인해 수십 년간 우리 가족의 대소사를 거의 다 아는 분이다. 가끔 내게 언니의 안부도 묻곤 했다. 그분이 ‘재혼 생각은···?’이라고 물었다. “언니는 생각 없대요”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여든 살 넘도록 남편과 다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생활하시는 그분에게서 “힘들 텐데···”라는 반응이 금방 돌아왔다. 왜 힘들 거라 생각하시냐 되물었더니 “남자 없이 사는 건 힘들 테니까”란다.
나도 남자 없이 산다. 그런데 그분, 그동안 나한테는 남자 없이 살아서 힘들겠다는 말씀을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다.
남자 없이 사는 게 힘든 일이지만 그건 사별한 여성에게만 해당된답니꽈?! (약간의 섭섭함이 내 맘속에 솟아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자 없이 살아서 ‘나’는 힘들 때 많다. 양손에 무거운 거 들고 집으로 걸어들어와야 할 때, 완전히 꼭 닫힌 병뚜껑을 반드시 내 힘으로 열어야만 할 때, 컴퓨터나 배수관을 고쳐주러 ‘기사님(대개 남성이다!)’들이 집에 들어와야만 할 때 등등···.
또 집에 혼자 있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몇 시간 흐르면 목이 잠기는데, 그때 마침 전화를 건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내어 영어책 읽으며 발성연습(?)을 해둘 때도 있다. 그밖에 다른 경우에도 힘든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글에서 말하게 될 것 같다.
그분과 그 대화를 나눈 때로부터 시간이 좀 흘렀지만, 남자 없이 사는 여성의 힘겨움을 거론한 그분의 진심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른다. 다만 ‘있다가 없으면 더 힘들 수 있다’는 차원에서 건넨 말일 수도 있겠거니 추론할 뿐.
그러나, 그분께 잠깐 느꼈던 섭섭함은 이내 사라지고 없다. 왜냐면, 평소 그분과의 관계가 꽤 나름 돈독하므로.
나는 그분이 ‘돌봄(care)’의 의도로 내게 큰언니 안부를 물은 것임을 안다. 그분은 심리상담가이며 내게도 언제나 돌봄의 의도로 말을 건네시니까.
헌데, 가만 보면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표현은 그것이 ‘지나가는 말’이 아닌 경우, 대체로 오지랖과 돌봄 사이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듯하다. 걸치는 이유는, 말하는 쪽과 듣는 쪽 요인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지랖 차원에서 건넨 말인데도 타인이 내 말을 돌봄으로 알아들어 고마워할 수 있다. 개떡같이 말했든데 찰떡같이 알아들은 거다. 반대로 내가 아무리 돌봄의 의도로 다가갔어도 상대에게 오지랖으로 오해되면 분위기 ‘싸~’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대화에 참여한 두 사람의 성별이 여성이냐 남성이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생물학적 성별로 사람들을 구분해 ‘그녀’와 ‘그’를 달리 대하고픈 의도를 품고 실행함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성별의 특징은 통계적으로 볼 때는 현실에서 거의 맞는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대화 가운데 말하는 이의 의도와 듣는 이의 반응이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방책은, 생물학적 성별보다 상대가 매순간(!)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의 질과 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혹시 상대의 삶에 관하여 이런저런 말을 해주거나 거들고 싶어졌다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결혼경험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의 삶의 경험에 먼저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오해는 일어날 수 있으니 약간 ‘달관’할 필요가 있을 수도.)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기혼여부와 사실상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매순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을 인간으로 환대하며 대접하는 일, 그것이 페미니즘의 기초 아니던가. 그러니, 세상 사람 모두가 기초적 의미에서,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