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ft feminism
오십대의 초중후반 어디쯤 여성은 대개 완경(폐경)을 한다. 좀 이른 경우 사십대 말에 하기도 한다. 완경 뒤엔 의학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냉동난자를 마련해두지 않았다면,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하다. 좀 무례하고 약간 무감각한 어르신들은 ‘여자로선 이제 끝난 거지’라고 함부로 말할지 모르겠다.
저기요, 잠깐만요. 여자로서 끝난 거라면,
그럼 뭐가 시작된 건가요?
어쨌거나 나는 쉰두 살이다. 곧 53세가 될 거다. 10월 18일, 그날부터 나는 쉰세 살이라고 말할 계획이다. 생일을 거론했으니, 잠깐만 샛길로 새자. 나와 생일이 같은 유명 철학자가 한 분 계셨다. 생(life)의 철학자로서 대체로 쇼펜하우어, 딜타이, 니체 등과 단체로 언급되는 베르그손(Henri-Lois Bergson). 흔히들 ‘베르그송’으로 표기하는데, 원어민들은 [송]보다는 [손]에 좀 더 가깝게 발음하는 것 같다. 내 귀엔 그리 들리는데 다른 사람들 귀엔 달리 들릴지도 모른다. 10월 18일, 베르그손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859년에.
다짜고짜 나이와 생일을 밝히는 데에는
(개인정보 유출이려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십대 싱글여성의 잔잔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나는 실수로든 의도로든 폭력의 결과로든 임신·출산의 경험이 없고, 그에 따른 육아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입양을 통한 양육경험마저도 없는 ‘오십대 싱글여성’이다.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이 전무한 사람인 것이다. 아참, 결혼도 이혼도 해본 적 없는, ‘단조로운’ 싱글이다.
오십대 싱글여성이 되려고 어려서부터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거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계획의 기쁨과 효력은 ‘성취’에 있다기보다는, 계획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품어지는 ‘기대감과 자신감’에 있으리라.
계획도 준비도 무엇도 없이 오십대에 들어선 싱글여성으로서 나는 페미니즘을 양념같이 사용하며 나의 글을 써내려가고자 한다. 나의 글에 스며든 양념맛 페미니즘은 소위 여성스러운(?) 체험, 그리고 여성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이미 해본 여성들이 ‘살살’ 말하거나 ‘팍팍’ 말하는 페미니즘들과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더 나을 거라는 거 아니고, 그냥 좀 다를 거라는 거.
대체로 페미니즘을, ‘여성의 경험’을 다루는 학문이라 말한다. 학문의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인간을 일반화하여 다룰 때 여성의 경험이 번번이 누락되었는데, 페미니즘은 그걸 지적하는 가운데 당당히 출범했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똑같은 현상이 페미니즘에도 벌써 나타났다고 느낀다.
우리가 현실에서 자주 대하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경험을 섹슈얼리티와 성폭력과 성차별, 임신과 출산(혹은 낙태), 육아 및 경력단절 등으로 정돈하여 제시한다. 좋다. 아주 좋은 주제들이다. 그런데, 위 주제들을 다루는 와중에 불가피하게 엄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며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나 같은 여성의 경험이 누락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게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말 아니다. 지금 페미니즘이 아주 잘못 가고 있다 주장할 생각은 별로 없다. 그냥 주류 페미니즘에서, 한국에 사는 오십대 싱글여성인 나의 경험이 누락되어있으니, 내가 채워넣으면 되겠구나 마음먹게 되었다는 심정을 가볍게 거론했을 뿐이다.
인류역사(history)와 인문학(humanism)에서 남성의 경험만을 인간의 경험으로 다룰 일이 아니라 여성의 경험이 동등하게 동급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게 처음부터 페미니즘이 줄기차게 강조해온 주장이다. 그것은 명백히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므로, 오십대 싱글여성인 나의 경험을 페미니즘 관점 위에서 잔잔히 풀어내려는 나의 갸륵한 계획을, 다른 누구는 몰라도 페미니스트들이라면 틀림없이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본다.
요컨대 나는 오십대 싱글여성 개인이다. 그런데 나 개인의 경험은 여타의 오십대 싱글여성들이 ‘아, 맞아’ 하며 공감할 법한 일일 수도 있고, ‘난 아닌데’ 하며 고개 저을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경험도 분명 인간의 경험이기에, 나의 삶과 페미니즘을 오밀조밀 엮어가는 글모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